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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미안하다. 이제야 널 찾아와서 (81/81)

81. 미안하다. 이제야 널 찾아와서2021.12.08.

“새아가. 연락 없이 와서 미안하구나.”

리아를 바라보며 강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강 회장과 얼굴을 맞이하는 것은 저번 일요일 본가를 찾은 후, 오늘이 처음이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다. 마침 퇴근 시간도 다 되었고 해서 말이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걸까? 혹시 안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러셨군요. 전 괜찮아요, 아버님.”

강 회장 말대로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고 다행히 중요한 업무는 끝난 후였다. 그러나 강 회장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리아는 애써 긴장한 표정을 감추었다. 그때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주 회장이 앞으로 나섰다.

“강 회장님.”

강 회장과 주 회장이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는 것은 리아와 태호의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사돈을 맺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양가 사이가 회복된 것은 아니기에, 서로 만남을 회피한 결과였다.

“어인 일로 이곳까지 찾아주셨습니까?”

“아, 주 회장님도 마침 자리에 계셨군요.”

주 회장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자, 강 회장 역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누가 봐도 서로를 마주하는 주 회장과 강 회장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잔뜩 털을 곤두세운 채, 서로를 경계하는 개와 고양이 모습이랄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주 회장님도 잠깐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올라가시죠.”

주 회장이 먼저 앞장을 세자, 강 회장과 그의 수행원들이 뒤를 따랐다. 리아는 한 걸음 물러난 자세에서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태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버님, 지금 우리 회사에 계셔. 왜 오셨는지 알아?>

리아가 급히 문자를 보냈을 때, 마침 태호는 막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본 태호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뒤따라오던 남 비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 비서, 오늘 아버지, 주원식품 가셨다는데. 거기에 관해 들은 말 없어?”

강 회장의 비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곧바로 남 비서에게 연락하도록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네?”

남 비서가 놀란 표정을 짓는 동시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남 비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곧 태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받아보십시오.”

강 회장 비서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지금 회장님, 주원식품에 계십니다. 회사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차를 돌리라고 하셔서 이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리를 죽인 상태로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는 지금 회장실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안에는 회장님과 주 회장님, 주 팀장님 이렇게 세 분이 계십니다.]

“회장님, 왜 주원식품에 가셨는지 아십니까?

[저도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는지 모릅니다. 무작정 가자고만 하셔서…….]

“알겠습니다. 특별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네.]

전화를 끊은 태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 비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사전계획을 중요히 여기는 강 회장은 웬만해선 일정을 바꾸지 않는 편이고, 또한 즉흥적인 결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런 강 회장이 예정에도 없는 방문을 강행했다는 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말을 마친 태호는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비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회장실을 물러나자, 강 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이란 호칭 쓰지 말고, 우리끼리 있으니, 사돈으로 부르겠습니다. ……사돈.”

강 회장이 자신을 사돈이라고 부르자, 뭔가 어색한 듯 주 회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불쾌한 눈으로 차갑게 노려보기에 바빴던 두 사람이다. 아무리 사돈을 맺었다고 한들, 오랫동안 묵었던 감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우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몰라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제가 오늘 사돈을 찾아뵌 이유는…….”

“저, 잠시만.”

강 회장이 용건을 꺼내려는 순간, 주 회장이 급히 말을 막았다.

“그러지 말고 예전처럼 ‘영철아’라고 부르시죠, 형님. 말도 놓으시고요. 영, 어색해서 말입니다.”

“흠, 흠.”

그 말에 강 회장도 동의한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회사가 둘로 쪼개지고 나서, 강 회장과 주 회장이 사적으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공적인 자리에서 만남이 이뤄졌기에 서로 존대하고 회장님이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리아가 옆에 있다곤 하지만, 계속 존대하자니 뭔가 불편했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흠, 흠.”

강 회장은 다시금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이 타는 듯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리아의 목도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호칭이 회장님이면 어떻고, 사돈이면 어떻습니까? 존대를 하든 말을 놓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라고요! 차를 한 모금 들이켠 강 회장은 느릿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 어서 말씀하세요! 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강 회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강 회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 회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강 회장이 주 회장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영철아! 내가 다 잘못했다. 이 못난 형을 용서해라.”

“형님?”

강 회장의 난데없는 행동에 주 회장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리아 역시 주 회장만큼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아버님이 왜 우리 아빠에게 용서를 구하시지? 강 회장의 절절한 사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멀어지지 않았을 거다. 회사도 그대로였을 테고…….”

아마도 ㈜정직이 둘로 쪼개지던 때의 상황을 뜻하는 것 같았다. 리아가 알기론 그 당시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서로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엔 서로에 대한 믿음의 신뢰가 깨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이었던 날 용서해라.”

과거를 회상하는지, 강 회장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그에 못지않게 주 회장의 눈 역시 벌겋게 물들어갔다.

“용서는 무슨 용서를 합니까? 저 역시 형님을 믿지 못했는걸요. 그때 제가 형님을 믿었더라면 그런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제 잘못도 큽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에 와서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끈끈했던 우애를 쉽게 깨버렸던 것을 후회하는 분위기였다.

“미안하다. 이제야 널 찾아와서…….”

“아닙니다, 언젠가 형님이 찾아오실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용기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잘 오셨습니다.”

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영철아.”

“형님.”

“정말 미안하다.”

“아닙니다. 제가 더 미안합니다.”

리아는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두 사람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했더라면 이보단 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두 분 다 왜 느닷없이…….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리아는 가만히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잠자코 두 사람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리아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분명 그녀의 문자를 확인했는데 태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읽씹인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 퇴근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변 팀장이 민훈의 자리로 다가왔다.

“정민훈 씨, 지금 사장실로 올라가 봐요.”

“네?”

근무한 첫날, 민훈은 사장실로 올라오라는 한 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아무 말 없어서 잊은 듯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대놓고 변 팀장을 통해서 부르다니! 이건 염연히 도발이다. 지금 한 사장의 상황으로 봐선 몸을 사리며 사렸지, 대범하게 일을 벌이면 안 될 텐데……. 민훈은 도무지 한 사장의 꿍꿍이속을 알 수 없었다.

“사장님이 절 왜 보자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알겠습니까? 뭐, 경쟁사에서 왔으니까, 사장님이 직접 면담하고 싶으신가 보죠. 사장님 면담 끝나면 바로 퇴근해도 됩니다.”

변 팀장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곧 자리를 떠났다. 신속히 퇴근 준비를 마친 민훈은 사장실로 올라갔다. 사장실에 들어서자, 한 사장이 컴퓨터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왔나? 거기 앉지.”

민훈은 한 사장이 가리킨 소파에 앉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에선 웬만하면 아는 척 안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겁이라도 먹었나? 우선 앉아봐.”

한 사장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민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 사장을 힐끗 노려본 후, 묵묵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강 이사가 단독으로 일 처리하긴 했지만, 자네, 주원식품에서 파견사원으로 온 거 아닌가? 내가 그래도 KJ푸드 사장인데 모른 척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사실 한 사장은 직위만 사장일 뿐이지, 실제 업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강태호 이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한 사장은 뒤편에서 편히 지내는 쪽이었다.

“정확히 강 이사가 자네를 여기로 부른 목적이 뭐야? 조금 있으면 KJ푸드를 주리아 손에 넘겨 줄 테니까, 미리 준비운동 하고 있어라, 이건가?”

“네?”

“하, 자네 몰랐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한 사장은 말을 이었다.

“지금 강 회장님이 친히 주원식품을 방문하고 계시다더군. 뭐 하러 그곳에 갔는지, 쉽게 짐작은 돼. 강 이사와 주 팀장 2세에게 KJ푸드를 물려줄 거라고 하더니, 그보다 시기를 더 앞당길 생각이신가 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훈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한 사장은 픽 입매를 비틀었다.

“주원식품과 KJ푸드, 두 회사 다시 예전처럼 합친다는 소리야. 서로 사돈을 맺더니 덩달아 옛정이 살아났는지…… 하여간 지금 상황이 그래.”

떠보는 것처럼 민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부터 한 사장은 민훈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를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부모에게 해를 가한 인물이 주 회장이 아닌 한 사장이란 걸 알게 되는 즉시 민훈은 강력한 적이 되어버릴 테니까. 한 사장에게 민훈은 당장은 쓸모 있으나, 언제라도 버릴 준비가 된 카드였다.

“그러면 주원식품이 KJ푸드에 흡수되는 형태입니까? 아니면……?”

“그거야 아직은 알 수 없지. 하지만 합병이 된다면 아마도 직원 반 이상이 잘려 나가겠지. 사장인 나부터 잘리려나?”

주원식품과 KJ푸드가 다시 예전처럼 한 회사가 될 거라는 계획에 관해선 민훈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솔직히 복수가 끝나면 어차피 회사를 떠날 터이니,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민훈은 왜 한 사장이 자신을 사장실로 불러서 직접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한 사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민훈을 바라보는 한 사장의 눈빛이 어둡게 반짝거렸다. *** 한참 후에야, 강 회장과 주 회장은 서로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리아는 조심스레 찻잔에서 시선을 들고 자리로 돌아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강 회장과 주 회장은 격양된 감정이 진정되지 않은 듯 희미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리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강 회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아야, 미안하다. 우리가 이렇게 미리 화해했더라면, 네가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아버님.”

그때 노크와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태호가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두 분 뭐 하시는 겁니까?”

태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분위기는 제법 살벌했다. 강 회장과 주 회장을 바라보는 태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안 봐도 훤하군. 그새를 못 참고 언쟁을 벌이신 게 분명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 회장과 주 회장, 두 사람도 벌게진 얼굴로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한 사장의 계략으로 ㈜정직이 갈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두 사람의 태도엔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동안 패인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질 수 없는 건가? 안타까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태호는 어쩔 줄 모른 채, 앉아있는 리아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리아야, 괜찮아?”

우선은 한시라도 급히 불편한 자리에서 리아를 구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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