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무한대로 질투해줄게.2021.12.05.
“……리아야.”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리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벌써 잊었어? 앞으론 뭐든지 나와 상의하기로 했잖아.”
당연히 잊어버린 건 아니다. 그저 수진에 관한 이야기니까 더욱더 조심스럽게 된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수진의 모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서인지, 리아는 마음이 무거웠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그런데 왜?”
아무래도 태호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다. 모든 일의 중심엔 태호가 있으니까. 그도 수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수진 역시 태호에게 말하라고 했고…….
“……태호야.”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며 리아는 태호를 향해 뒤돌아섰다. 깊고도 짙은 눈빛이 오롯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리아는 손을 들어 살며시 그의 뺨을 감쌌다.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 보기보다 속도 좁고, 짜증도 잘 내고, 화도 잘 내.”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난 내 남자 좋다는 여자, 그게 아무리 친한 친구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어.”
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가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떨리는지 모르겠다. 태호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일까? 사실 그가 어떤 반응을 나타낸다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불쾌한 반응을 나타낸다면 수진이 안 됐다고 느껴질 테고, 은근히 좋아하는 반응을 나타낸다면 그녀도 모르게 수진을 질투하게 될 테니까. 리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태호는 뺨을 감싼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누군데 그래?”
“…….”
“나도 아는 사람이야?”
리아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태호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걸까?
“혹시 한수진?”
“……알고 있었어?”
“아니.”
태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네 표정을 보니까, 혹시 수진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수진이 밖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유정이는 아닐 테고, 채영 씨나 다른 직원들도 아닐 테고. 물론 강수미도 아니고.”
한수진이 날 좋아한다고? 사실 매우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수진의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수진이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해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니, 좋아하든지 말든지……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강태호에게 한수진이란 주리아의 친구이며 한정안 사장의 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수진을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리아, 넌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오늘 수진이 만났어.”
“그 말은 수진이가 제 입으로 날 좋아한다고 했다는 거야?”
리아는 아무 말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랑 절교할 생각인가 보군. 그래?”
“응. 그런 거 같아.”
리아의 눈에 물기가 어리자, 태호는 수진의 경솔한 행동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당사자인 나에게 했어야지, 왜 리아에게 한 거야! 리아를 괴롭히려고 한 게 분명했다. 만약 그에게 고백했다면,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도 못하게 매정하게 잘라버렸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엔 리아처럼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을 터이다.
“……태호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이젠 예전처럼 수진일 볼 수 없을 것 같아. 나,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거든.”
수진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녀를 친구로서 좋아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리아는 더 이상 수진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하아, 항상 사랑보단 우정이 먼저라고 했는데……. 후, 결국 이렇게 되네.”라며 리아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리아의 물기 어린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깐 수진 때문에 마음대로 울지도 못 했다. 그녀도 수진만큼이나 울고 싶었지만, 차마 수진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순 없었기에……. 그렇다고 태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그녀와 수진과의 일이니까. 괜히 태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바꿔야겠지? 그래서 리아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목소리 톤을 올렸다.
“수진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질투 나서 미치는 줄 알았어. 태호야, 나, 질투의 여신인가 봐.”
“뭐?”
그 말에 태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리아가 스스로 질투 났다고 인정하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질투의 여신이라니……. 그런데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화르르 질투심에 휩싸인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보단 슬픔으로 가득 찬 상처 받은 사람의 표정이다. 바보야, 숨기긴 왜 숨겨? 나한텐 그대로 아픈 티 내도 되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던 태호는 천천히 리아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주리아, 그러면 날 차지하기 위해서 싸울 수 있어?”
당장에라도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상대가 용이라도? 잠자는 숲속의 미남처럼?”
“당연하지. 남자만 칼 들고 용이랑 싸우라는 법 있어? 여자도 용이랑 싸울 수 있다고.”
듣기만 해도 짜릿하다. 은빛 갑옷에 빛나는 주리아가 칼을 들고 불을 내뿜는 용과 대결을 벌인다니…….
“어디까지 질투해줄 수 있는데……?”
“무한대로 질투해줄게.”
“훗.”
그가 짧게 웃음을 내뱉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입술 위로 그의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숨결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대답……. 아주 마음에 들어.”
테호는 한 손으로 리아의 뒤통수를 감싸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두 입술이 깊숙하게 맞물리고, 달짝지근한 숨결이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열정적인 키스였다. 느릿하게 퍼져나가는 달콤한 자극에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위로하려고 시작한 키스였지만, 열기에 휩싸여 어느새 본래의 뜻을 퇴색해버렸다. 집중적으로 입술을 공략하던 숨결이 자리를 벗어나자, 리아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저 너머에서 반짝거리는 정원 불빛이 흘러들었다. 동시에 바깥의 찬 공기가 벌어진 셔츠 안으로 차갑게 스며들었다. 그제야 리아는 이곳이 침실이 아닌 테라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호야, 여긴.”
당황한 리아는 급히 손을 뻗어 태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더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버둥거리자, 그가 달래듯 속삭였다.
“괜찮아. 민수, 오늘 연구원들이랑 회식하느라 늦는다고 했어.”
지금 그게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테라스에서……. 리아가 다시금 몸을 비틀자, 할 수 없다는 듯 태호가 하얀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 싫어?”
아찔하게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빤히 쳐다보면,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뿐인가? 열기로 흐려진 눈빛과 흐트러진 호흡. 그런 모습이 색정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리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싫으면 말해.”
싫으면 말하라고?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얼굴로 물어보는데 어떻게 싫다고 할 수 있을까! 하아, 역시 난 태호에게 약한가 봐. 사실을 인정해서일까? 새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여기가 테라스이든 침실이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 봤자 신혼집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바깥, 공공장소만 아니면 된 거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억눌렀던 짐이 사라진 듯 온몸이 가벼워졌다. 이번엔 리아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양팔을 벌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
“여보, 벌써 이 주일이 되어 가는데, 인제 그만 민수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내가 민수에게 전화해…….”
탁―. 주 회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민 여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당신, 또 해외출장 갈 거 아니죠?”
“으응? 아니, 아니지.”
민 여사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주 회장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는 지금 민수를 챙겨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불똥이 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래도 요새 편하게 잠은 들어요.”
묵묵히 식사를 계속하는 주 회장을 바라보던 민 여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리아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한 거라고 하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민 여사는 옆에 앉은 주 회장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윽.”
주 회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었기에 뭐라고 항의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발 뻗고 잘 잤다는 소리잖아. 내가 리아 걱정하느라 끙끙대며 잠 못 자는 동안, 당신은 옆에서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더라.”
“흠. 흠. 나도 고민 많았어. 당신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하고…….”
“고민은 무슨 고민!”
주 회장의 변명은 민 여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며 빠르게 퍼부었다.
“어떻게 이야긴 하긴 뭘 어떻게 이야기해요! 그냥 말하면 되지. 그게 뭐 고민할 거리냐고! 아니, 내가 어디 가서 말실수할 사람이야? 당신 날 그렇게 본 거야?”
벌써 몇 번이나 한 소리지만, 민 여사는 할 때마다 처음 꺼내는 것처럼 흥분했다. 배신감이 너무 커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주 회장은 민 여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당신은 좋아하는 거, 못 감추잖아. 만약에 태호가 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라고 내가 말했다고 가정해 봐. 당신 그거 숨길 수 있었겠어? 태호 보면 ‘우리 사위’, ‘우리 사위’, 하면서 좋아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거야.”
민 여사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딱히 반대할 순 없었다. 그게 그녀의 성격이니까. 좋은 건 숨기지 못하고 티를 팍팍 내는 성격. 민 여사가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자, 주 회장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덕분에 억지로 연기 안 해도 되고 좋았잖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억지로 연기하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으니까. 민 여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에 주 회장은 서둘러 아까 끝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여보, 내가 민수에게 전화해 볼까?”
그러자 민 여사의 표정이 다시금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됐어요. 한 달이라고 했으면 한 달이야. ‘여아일언중천금(女兒一言中千金)’ 몰라요?”
“아, 그래.”
아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그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좋은 거다. 미안하다, 민수야. 주 회장은 민 여사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 리아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전화를 받고 내려간 거지만, 그래도 ‘설마?’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본인이 직접 온 게 아니라 대신 비서를 보내셨겠지. 그런데 로비에 내려가고 보니, 정말로 강 회장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대호 회장이 누구인가? 그녀의 시아버지이기 전에 주원식품의 경쟁사 KJ푸드를 계열사로 지닌 KJ그룹 총수가 아니던가! 그런 강 회장이 직접 리아를 보러 회사까지 찾아왔다니. 연락을 받았는지 주 회장도 급히 로비로 내려왔다. 주 회장 역시 리아만큼이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버님?”
리아는 조심스럽게 강 회장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