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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야. (79/81)

79.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야.2021.12.01.

일주일 넘게 쌓인 욕구불만이 하루 이틀에 모두 풀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급한 불을 끄기엔 충분했다고 본다.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오후까지 활활 불태운 두 사람은 집을 나설 때보다 훨씬 환해진 얼굴로 귀가했다. 물론 민수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가득 준비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우미를 들이는 것을 반대하던 태호였지만, 민수를 위해 그가 머무는 동안, 전문 요리사를 고용하기로 했다.

“고맙다, 친구.”

“고마운 걸로 따지면 내가 더 고맙지. 리아와 다시 잘된 거, 모두 네 덕분이니까.”

그 말에 민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잠시 후, 깜빡 잊었다는 듯 태호를 향해 고개를 돌았다.

“아 참, 어젯밤에 사돈처녀가 찾아왔었어.”

“태희가?”

“응. 너 보러 왔다면서 너한테 전화하려고 해서 내가 못 하게 말렸어. 날 밝으면 하라고.”

“그래? 급한 일은 아닌가 보군. 여태껏 전화가 없는 걸 보면.”

워낙 엉뚱한 태희이기에 태호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넘겨버렸다. 하지만 다음 날, 회사로 찾아온 태희를 맞이하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오빠, 나 왔어.”

남 비서를 어렵게 통과하고, 집무실로 들어선 태희는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태호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한 태호가 힐끗 노려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머, 오빠는? 내가 뭐 꼭 일이 있어야만 오빠 보러 오나?”

“응. 넌 그래야 해.”

앞으로 다가오는 태희를 태호는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귀찮게 굴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왜 다시 이러는지 모르겠다.

“엊그제도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왔었다며?”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하며 태호가 물었다.

“응. 그런데 갔더니 사돈이 문 열어주더라?”

태희는 소파에 앉는 대신 태호의 앞을 알짱거렸다. 태호는 그런 그녀를 짜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무슨 일은? 오빠 보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오빠아.”

태호의 차가운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태희는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떨며 뒤에서부터 태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었다. 이제 곧 오빠 입에서 “야, 강태희!” 하며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겠지? “손 잘리고 싶어?”라는 무시무시한 협박과 함께……. 오빠는 애교를 부리거나, 친근한 신체접촉을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니까. 그런데, 어라? 태희가 예상한 반응 중, 그 어느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태호는 협박하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에 놓인 태희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우리 막내, 걱정거리라도 있어?”

헐,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그냥 막내도 아니고, 우리 막내라고? 충격을 받아서인지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태희가 안고 있던 팔을 툭 내리자, 태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태희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에 그리도 놀랐는지 입까지 크게 벌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후, 태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뭐야? 너, 왜 그래?”

태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동시에 태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어어엉, 오빠.”

어떡하면 좋아! 우리 오빠, 정말 어디 아픈가 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 이게 지금 변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허어엉.”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태희는 목 놓아 울고 말았다.  

  ***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는데……. 리아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방금 날아온 문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수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뒤로 호박씨 까는 애, 친구로 둘 생각 없다면서, 인제 그만 보자더니, 그새 화가 풀렸나? 그렇다면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내 우정이 겨우 여기까지였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날 수진과 싸우면서 적잖이 상처받았나 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수진과 얼굴을 맞대야 하기에, 리아는 수진이 말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수진은 회사 앞, 커피숍에서 그녀를 기다린다고 했다. 커피숍에 들어간 리아는 어렵지 않게 구석에 앉아 있는 수진을 발견했다.

“수진아.”

혼자 골똘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수진은 리아가 앞에 다가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리아가 자신을 부르고서야 수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올려다보았다. 리아가 맞은편에 앉길 기다린 수진은 먼저 말을 꺼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그래서 화 좀 풀렸어?”

“아니.”

수진의 단호한 대답에 리아는 순간 머쓱해지고 말았다. 아직도 화났는데 만나자는 건,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리아의 궁금증은 수진이 입을 열면서 바로 풀렸다.

“나, 얼마 전에 별장에서 강수미 만났어. 단둘이 만난 건 처음이야.”

수진이 강수미를 단둘이 만났다는 이야기를 왜 자신이 들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아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진의 눈빛이 활기를 띠며 반짝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어. 태호랑 잤냐고. 두 사람 어디까지 갔던 사이냐고.”

“뭐? 수진아!”

리아가 당혹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수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 못 물어볼 것도 없잖아. 태호랑 강수미, 세상 사람 다 아는 떠들썩한 스캔들이었는데…….”

수진은 강수미가 그녀의 아버지, 한 사장과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수미에게 그런 질문을 할 리 없었다. 리아는 난처한 눈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강수미가 뭐래?”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하더라.”

“당연히 아무 말도 못 하지. 넌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생각…….”

“리아, 넌 아무렇지 않아?”

수진은 리아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빠르게 물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너, 태호가 강수미랑 잤다고 해도 받아줄 수 있어?”

“후우, 수진아.”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수진은 어떻게 해서라도 태호와 리아의 사이에 흠집을 내고 싶은 것 같았다. 왜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때 난 태호랑 헤어져 있는 상태였어. 그러니까 태호와 강수미가 어떤 관계였다고 해도 난 상관 안 해.”

“거짓말. 어떻게 상관 안 해?”

솔직히 수진의 말이 맞긴 하다. 어떻게 상관 안 할 수 있을까. 어딜 가나, 한류스타 강수미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는데…….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상관 안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아는 수진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지금 수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강수미는 네 아빠와 그런 사이였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수진아, 너, 이거 이야기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아니.”

“그럼 무슨 이야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건대?”

수진은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물컵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었다.

“리아야.”

잠시 뜸을 들인 수진은 리아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태호 좋아해. 사실 널 대학에서 만나기 전부터 태호를 좋아했어. 처음 본 순간부터…….”

깜짝 놀라야 정상인데, 리아는 아주 담담히 수진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느 순간부터 ‘혹시 수진이 태호를?’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나 보다. 요즈음 수진이 보인 태도는 태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쉽게 설명되지 못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 태호는 아니?”

“아니, 전혀 모를 거야. 나에겐 관심조차 없으니까. 오늘 내가 한 말, 태호에게 해도 좋아. 아마 깜짝 놀랄걸?”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수진은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게 여겨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야. 너도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으니까.”

“그래, 수진아. 우리 서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자.”

수진이 태호를 좋아한다고 털어놓는다는 것은 몹시도 확실한 절교 선언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다고 해도 자신의 남편을 좋아한다는 여자를 어떻게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리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꽤 오래된 우정이었는데, 이렇게 깨지고 마는구나.

“안 믿겠지만……. 리아야, 나, 너도 꽤 좋아했어. 하지만 난 너 없인 살아도, 태호 없인 못 살아.”

수진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목소리는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태호를 좋아한다는 걸 밝히는 순간, 다시는 예전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리아에게 털어놓았다. 완전히 선을 긋고 남남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토록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도 리아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화가 난 만큼,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했다. 기가 막힌 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리아와 즐거웠던 시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거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크고 작은 수많은 추억이 켜켜이 쌓여버린 탓이다. 그렇게 보면 정작 태호와는 추억이랄 것도 없는데…….

“수진아, 그 말은 우린 다시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이야.”

“나도 알아.”

그래, 알겠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한 말이겠지. 마음은 아프지만, 이젠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네가 불편하다면 되도록 유정이 만나지 않도록 노력할게. 너랑 유정이랑 먼저 친한 사이였고, 난 나중에 낀 거니까.”

그 말에 수진은 화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나 동정하니? 태호는 네가 가져가니까, 난 유정이나 가져라?”

“수진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두 사람이 이렇게 되면 유정은 가운데서 난처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리아가 알아서 먼저 물러나는 거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 그냥 모든 게 싫었다. 지금 처한 상황에 진저리가 났다.

“흑.”

결국 수진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수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리아는 옆으로 다가가서 수진을 달래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수진이 흐느낌을 그칠 때까지 앞에 앉아 있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진과의 우정은 씁쓸한 끝을 맺었다. *** 수진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니 텅 빈 실내가 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태호와 민수, 두 사람 모두 퇴근이 늦나 보다. 이럴 땐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답답한 마음에 리아는 테라스로 나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별이 뜨기엔 아직 이르고, 노을이 졌다고 하기엔 어두운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단순한 기분 탓일까? 모호한 하늘이 오늘 그녀가 처한 상황처럼 느껴졌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막 집에 돌아온 태호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이리로 오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여기 나와 있어?”

옆으로 다가온 태호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냥 좀 답답해서…….”

“답답해서?”

“응.”

오늘 수진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한다면, 왜 답답해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태호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느라, 리아는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가 봐도 근심 어린 표정인데…….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뒤에서부터 그녀를 끌어안았다.

“……리아야.”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리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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