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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오늘 밤 기대되지 않아? (77/81)

77. 오늘 밤 기대되지 않아?2021.11.24.

민수의 안락한 거주를 돕기 위해, 태호는 가능한 한 빨리 별채에 가구를 놓기로 했다. 그를 본채에서 밀어내고자 함은 절대로 아니다. 오로지 민수를 위해서였다.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겠는데요.”

별채를 둘러본 디자이너는 분위기에 맞는 가구를 구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고 했다. 고작 일주일 정도야, 뭐. 문제는 일주일 후, 별채에 가구가 도착하고 나서 발생했다. 가구를 옮긴 직원 중 한 명이 수도 배관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발견했다. 배관 공사는 이틀이면 끝나지만, 바닥과 벽을 뜯고 다시 손 봐야 해서 또다시 시간을 잡아먹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모든 보수 공사가 끝나려면 일주일쯤 걸린단다. 태호는 치솟는 짜증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니……. 얌전히 잠만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민수가 그들 집에 온 날,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리아는 그날 이후로 키스보다 수위가 높은 애정 행위를 철저히 거부했다. 드레스 룸에서조차도 말이다.

“태호야, 일주일만 더 참으면 되잖아, 응?”

말이 쉽지, 또 어떻게 일주일을 기다리라는 건지. 다행히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아주 전형적인 입술 키스만 허용되었다. 제자리를 벗어난 입술이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이동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리아는 황급히 몸을 빼며 뒤로 물러나곤 했다.

“안 돼, 태호야!”

그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기에……. 이제 겨우 신혼의 참맛을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공백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리아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진행할 순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이 견뎌내야 한다. 민수를 원망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는 첫날 노크 사건을 빼고는 되도록 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욕구 불만 상태라서 그런지, 가만히 있어도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이유로 KJ푸드 본사로 출근한 민훈이 인사차 들렸을 때도 태호의 표정은 한껏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아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민훈은 다른 쪽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사님이 저를 불편하게 여기신다는 거, 잘 압니다. 정 내키지 않으면서 저는 이대로…….”

“아, 아닙니다. 잠깐 고민할 게 있어서.”

태호는 급히 표정을 풀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태호가 소파 맞은편에 앉자, 민훈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한정안 사장이란 공통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두 사람은 손을 잡아야만 했다. 태호는 간략하게 KJ푸드의 마케팅 전략에 관해 설명하자, 민훈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파견 근무 형식으로 온 거니까, 우선은 마케팅 3팀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변 팀장에게 지시해두었으니까, 정 대리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대화가 끝나고 민훈이 소파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사내에선 웬만하면 한 사장과 아는 척, 하지 말아요. 한 사장도 그걸 원할 테고.”

“네. 그럼 전 이만.”

민훈이 나가고 잠시 후, 남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곧장 책상으로 다가온 그는 태호 앞에 서류 파일을 내려놓았다.

“전 아직도 반반입니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남 비서는 민훈을 100% 믿을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사장에게 주원식품의 기밀을 빼돌렸던 사람이 지금은 반대가 되었으니까.

“알아. 남 비서는 강수미도 완전히 믿지 못하잖아.”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남 비서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걸 모르고 지나칠 태호가 아니었다. 빤히 쳐다보던 태호가 입꼬리를 비틀자, 남 비서는 당황한 듯 급히 서류 파일을 펼쳤다.

“이 건, 오늘 중으로 처리해주셔야 합니다.”

“그래?”

태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 비서가 내민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훗, 녀석. 남 비서가 과장되게 강수미를 밀어낼 때부터 알아채긴 했었다. 쉽게 감정 표현이라는 걸 하지 않는 녀석이 강수미 일이라면 심하다 할 정도로 싫은 티를 냈으니까. 혹시나? 했는데 결국 역시나? 인가?

“강수미랑 연락 잘되고?”

남 비서에게 서류 파일을 돌려주며 태호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뇨. 요새 새로 들어간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쁘답니다.”

“그래?”

당분간은 강수미가 해줄 일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녀는 이미 안전 가옥 금고에 있는 장부를 카메라에 담아 남 비서에게 건넸다. 비밀 장부를 손에 넣은 태호는 언제 터뜨릴지,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강수미를 따로 만날 일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물론 태호 본인이 아닌, 남 비서가 강수미를 만나는 거지만.

“……성후야.”

“네, 선배.”

태호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남 비서는 긴장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 길게 안 할게.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상사로서 부하 직원에게 하는 충고가 아닌, 선배로서 아끼는 후배에게 하는 조언. 그걸 알아채지 못할 남 비서 또한 아니었다. 남 비서는 태호를 마주 보며 입가에 여린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집무실을 걸어 나가는 남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태호는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후.”

얼음 심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녀석, 알고 보니 피가 들끓고 있었네. 강수미의 과거를 모두 알면서도 마음에 품다니, 쉽지 않은 사랑일 것이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본인의 사랑 역시, 만만치는 않았지만. 띠리리―. 때마침 울린 전화벨 소리가 태호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가자.]

통화버튼을 누르자, 밝은 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나 말고 민수. 민수 아무래도 입맛이 없는 것 같아서……. 요새 통 안 먹잖아.]

“집에서 쫓겨났는데 입맛이 있겠어.”

[그렇긴 한데……. 민수가 식성이 좀 까다롭잖아.]

별말 아니지만, 태호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식성 까다롭기라면 그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리아가 혹시라도 신경 쓸까 싶어, 입맛에 맞지 않아도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내가 민수 좋아할 만한 곳 알아볼게.]

“……그렇게 해.”

리아와 전화를 끊은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의 한가운데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말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

이제 정확히 알 것 같다. 왜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지……. 욕구 불만도 욕구 불만이지만, 그보다는 민수에게 리아의 관심을 빼앗긴 것 같아서다. 민수가 오고 난 후로는 태호를 ‘오빠’라고 부르며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자기가 오빠라고 부르면 민수랑 헷갈릴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리아는 민수를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으니까. 백번 양보해 그게 이유라고 해도, 단둘이 있을 땐 오빠라고 불러줘도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내의 쌍둥이 형제를 질투한다는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태호는 난생처음으로 오랜 친구인 민수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 태호에게 직접 지시를 받았지만, 변 팀장은 경쟁업체에서 온 민훈이 달갑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주원식품과의 협업을 위해서라는데, 정확한 시기는 확정된 게 없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마케팅팀에 넣기도 그렇고, 뭔가 애매했다.

“솔직히 정 대리에게 맡길만한 작업은 아직 없습니다. 주원식품과 협업하게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는 걸로 하고, 우선은 천천히 팀 분위기를 익히세요.”

“알겠습니다.”

민훈의 책상은 마케팅 3팀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였다. 서로 마주 보며 근무할 수 있는 확 트인 자리와는 다르게, 그의 자리는 칸막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방해받지 않고 집중이 요구되는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급히 자리를 만드느라 그렇습니다.”

빤히 보이는 변 팀장의 변명을 민훈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변 팀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민훈은 커피를 뽑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누구도 휴게실이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진한 커피 향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훈은 뽑은 커피를 손에 들고 주원식품 마케팅 1팀을 떠올렸다. 문득 가족 같은 분위기였던 팀원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도 안다. 다시는 그곳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가족 같은 그들을 배신하고 회사 기밀을 빼돌렸으니까. 이유야 어찌 됐든 그는 팀원의 믿음을 져버렸고, 그들의 친절을 사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신자를 확인하던 민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급히 통화버튼을 누르자,

[첫날 출근한 감상은 어때?]

휴대폰 너머로 한 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민훈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휴게실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사내에선 아는 척 안 하실 줄 알았습니다.”

[왜? 내가 뭐가 무서워서 아는 척을 못 하나?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지. 사장실로 올라와.]

뭐? 사장실로 올라와? 민훈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뭐라고 되묻기도 전에 한 사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는 민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밤 9시.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 태호는 호텔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리아가 저녁 장소로 고른 곳은 요즘 들어 가장 화젯거리인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시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호텔 꼭대기 층에 문을 연 레스토랑은 적어도 한 달은 기다려야 예약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 리아는 무슨 재주로 당일 예약을 따냈다. 그것도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VVIP 룸으로. 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야경을 즐기는 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옆으로 다가오자,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미안, 좀 늦었어.”

“아냐, 나도 방금 도착했어.”

태호는 리아 옆에 앉으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여기 어떻게 예약한 거야? 남 비서가 깜짝 놀라던데…….”

“아, 내가 예약한 거 아니야. 민수가 했어. 민수가 여기 오너랑 친하거든.”

그런데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인 민수는 보이지 않았다.

“민수는?”

“그러게. 나보고 먼저 가 있으라고 했는데……. 전화해 볼게.”

리아가 막 휴대폰을 집어 들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트레이를 든 웨이터가 들어왔다. 웨이터는 곧장 태호에게로 다가오더니 트레이 위에 놓인 봉투를 태호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시면 압니다. 이걸 강 이사님께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봉투 안에는 짤막한 메모와 함께 호텔 카드 키가 들어 있었다. 메모에 적힌 글씨는 눈에 익은 필체였다. 이건? 필체를 알아본 태호가 눈을 가늘게 모았다. <태호야, 본의 아니게 민폐 끼쳐서 미안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리아와 둘이서 근사한 시간 보내. 스위트룸 잡아놨으니까, 외박도 좀 하고.> ……녀석. 메모를 모두 읽은 태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잠시 잊은 게 있다. 그의 오래된 친구인 주민수는 쌍둥이 형제인 리아와 달리 눈치가 빠르다는 것. 태호는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재킷 주머니에 메모를 집어넣었다. 그런 그를 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뭔데?”

태호는 대답 대신 리아의 손에 호텔 카드 키를 쥐여 주었다. 다른 한 손으론 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잠시 후, 나른한 속삭임이 간질이듯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오늘 밤 기대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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