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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계획에 없던 뜻밖의 동거라……. (76/81)

76. 계획에 없던 뜻밖의 동거라…….2021.11.21.

이제 어떡한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리아였다.

“아무래도…….”

태호와 민수의 시선이 동시에 리아에게로 모였다. 그녀에게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는 걸까?

“지금은 아무 소리 말고 엄마 말 들어야 할 것 같아. 엄마가 저렇게 기간을 정해버리면 하늘이 무너져도 그 전엔 화 안 푸시잖아.”

“후우, 그야 그렇지.”

누구보다도 민 여사를 잘 아는 민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쫓아낼 정도라면 지금 민 여사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크다는 뜻이다. 앞에서 얼쩡거리는 꼴조차 보기 싫다는 거겠지. 오늘 아침에만 해도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며 하트를 발사하던 민 여사였는데……. 반나절 만에 ‘웬수덩어리’가 돼버렸다. 어쩌다 이리도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지. 민수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리아는 민수가 안쓰럽다는 듯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할 수 없잖아. 한 달 지나면 엄마, 화 풀릴 거야.”

“한 달 지나도 안 풀리면?”

“그럼 기간이 연장되겠지?”

“하, 그러면 안 되는데…….”

리아와 민수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대문으로 향했다. 태호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 여사의 화를 풀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가라는 소리에 별 반항 없이 짐을 챙기는 민수나, 한 달 동안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리아나……. 태호의 가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정 여사가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제 발로 걸어 나간다면 모를까. 하지만 리아와 민수가 고분고분 민 여사의 결정을 받아들이는데, 그가 중간에서 뭐라고 할 순 없었다. 태호는 잠자코 두 사람을 따라 대문을 나섰다. 슈트케이스를 넣으려는지, 리아가 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태호는 그런 그녀를 말리며 민수의 슈트케이스에 손을 뻗었다.

“내 차에 실어. KJ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총지배인에게 말해서 스위트룸 준비해 놓으라고 하면 되니까.”

“호텔?”

호텔이라는 말에 리아는 난처한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 역시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뭐 잘못됐어?”

미묘한 분위기에 태호가 미간을 찌푸리자, 리아가 민수 대신 대답했다.

“태호야, 민수 예민한 거, 너도 잘 알잖아. 한 달 동안 호텔에서 못 지내.”

“……아.”

그러고 보니, 민수는 낯선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남들 다 가는 여행도 안 가고, 제주도 출장을 가게 되더라도 호텔이 아닌 별장에 묵곤 했다. 군대도 허약체질로 인해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다녀온 터라, 지금까지 밖에서 오래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그래서 민 여사가 더 민수를 집에서 쫓아낸 듯싶다. 어디 한번 밖에서 고생해보라는 의미로 말이다.

“걱정하지 마. 그동안 우리 집에 와 있어.”

민수의 표정이 어두워지려 하자, 리아는 재빨리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호텔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냥 형제도 아니고 쌍둥이 형제인데, 이럴 때 끈끈한 형제애를 발휘하지, 언제 발휘해 보겠는가!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그렇지, 태호야?”

그 말에 이번엔 태호가 난처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신혼인데, 한 달 동안이나 함께 지내자니. 흠, 곤란한데……. 그러나 자신들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민수를 매정하게 대할 순 없었다. 솔직히 민수 덕분에 두 사람 인연이 맺어진 것도 사실이고 계속해서 민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 그렇게 해. 이리 줘. 내 차, 타고 가.”

태호는 민수의 슈트케이스를 건네받아 몰고 온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리아가 먼저 출발하고, 민수가 옆 좌석에 올라탔다.

“신세 좀 지자.”

민수의 말에 태호는 피식 웃어 보이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계획에 없던 뜻밖의 동거라……. 정말 한 달이나 민수와 지내야 하는 건가? 그 말은 앞으로 아일랜드 식탁에서도, 거실 소파에서도, 테라스에서도 둘만의 애정 행각을 펼칠 수 없다는 뜻이다. 침실 안에서도 되도록 큰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방음에 좀 더 신경 써서 집수리하는 건데……. 태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옆 좌석에 앉은 민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대로 호텔로 가버릴까? “친구야, 희생하는 김에 조금만 더 희생하자.”라고 한다면 어쩌면 민수는 순순히 들어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문제는 리아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이다. 민수가 호텔에서 지내게 된다면 그녀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태호는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 청평 별장에 도착한 수진은 집 앞에 세워진 자동차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왔는데, 누구지? 한 사장 없이 그녀 혼자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수진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장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기도 지쳤고, 그렇다고 태호와 있었던 일을 한 사장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한 사장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았기에……. 태호가 밉다고 해도 아직은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엔 태호를 사랑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별장에 들어선 리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강수미?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강수미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한 사장 외엔 이곳에 올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진과 마주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말 안 들려요? 당신이 왜 여기 있냐고?”

“……아, 한 사장님이…….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이곳을 쓰라고 하셔서요.”

“아빠가요?”

께름칙하긴 했지만, 강수미가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 한류 스타인 그녀가 남의 별장에 몰래 숨어들었을 리는 없고, 더구나 그녀는 KJ푸드 전속모델이었다. 보너스 차원에서 한 사장이 강수미에게 별장 사용을 허락했을 수도 있다. 평소라면 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겠지만, 지금 수진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전 마침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강수미는 재빨리 차 키와 핸드백을 들더니, 현관문으로 향했다. 수진은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강수미가 막 지나치는 순간, 한 가지 의문점이 수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진은 반사적으로 강수미의 팔을 움켜잡았다. 놀란 강수미가 고개를 돌리자, 수진은 뚫어지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태호랑 어디까지 간 사이예요? 정말 아무 사이 아닌데, 괜한 스캔들 난 거 아니죠?”

따지듯 묻는 수진에게 강수미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이 지금 상황을 모면하게 할 수 있을까?

“둘이 잤어요? 그래요?”

“네?”

너무나도 단도직입적인 수진의 질문에 강수미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손님이 지낼 수 있는 별채가 따로 있었지만, 아직 가구를 들여놓지 않은 탓에 민수는 리아와 태호의 침실 맞은편에 있는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좀 더 멀찍이 떨어진 곳이 좋겠지만, 그 방엔 침대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짐 정리하고 있어. 저녁 먹어야지.”

“아니. 저녁 생각 없어. 짐 정리하고, 그냥 잘게.”

민수는 힘없이 웃고는 슈트케이스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아는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침실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는 동시에 리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민수가 쫓겨난 게 그녀의 잘못인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닌가 보다. 태호는 조용히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리아는 입을 다문 채,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감싸는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그에게 안겨 있으면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걱정이 사라지니까.

“태호야, 나 좀 꼭 안아줘.”

그 말에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리아는 좀 더 깊숙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입술이 살갗에 닿자,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리아는 흠칫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태호가 작게 속삭였다. 위로라고……? 아, 어떤 형식의 위로인지 알 것 같다. 그렇다. 지금 그녀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뜨겁고 달콤하고 아주 많이 설레는 위로. 리아는 발끝을 들어 태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하아, 태호야.”

말캉한 입술이 닿자, 리아의 입에서 한숨 섞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스르르 두 눈을 감자,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먼저 다가간 건 리아였지만, 주도권을 잡은 이는 태호였다. 좀 더 깊숙이 다가가기 위해 그가 얼굴을 기울이며 다른 손으로는 리아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밀착된 가슴으로 열기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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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결이 섞이고, 감정이 하나로 녹아들고. 촉촉하고 향기롭고 또는 끈적끈적 질척거리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이 전달되는……. 그래서 더욱더 효과적인 위로.

“……기분 좀 나아졌어?”

한참 후에야, 머금었던 입술을 놓아주며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하아.”

호흡을 가다듬는 리아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충분한 위로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물론이다. 저 밑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리아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아?”

그 말에 태호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이마를 맞대었다. 지금 밥이 문제인가? 단지 위로해 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활활 타오르는 신혼이니까. 지금 여긴 두 사람만의 공간이니 애써 참을 필요는 없었다.

“난 저녁보다는 다른 게 배고픈데…….”

그 말에 리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갯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민수가 문에 귀를 대고 엿들을 리는 없겠지만, 그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이 마주 보고 있어, 자칫 소리가 새어 나갈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태호는 리아를 안심시키며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욕실을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그는 중앙에 놓인 소파 위로 리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욕실과 연결된 유리문을 닫았다.

“여기라면 안전해.”

이중으로 문이 닫히고, 복도에서 멀리 떨어진 욕실 안쪽에 있는 드레스룸이니 웬만해선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항상 옷만 갈아입었지,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리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소파로 다가오는 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엔 드레스룸에 웬 소파야? 이게 왜 여기 필요해? 했었는데……. 와, 인제 보니 완전 신의 한 수였네! 강태호, 괜히 천재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구나. 그가 소파에 무릎을 꿇으며 상체를 기울이자, 리아는 화답하듯 그의 목을 휘감았다. 다시금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맞물렸다. *** 짐 정리를 끝낸 민수는 갈증이 밀려오자, 물을 마시려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어두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주방을 찾을 수 있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 민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 식사한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서 먹기로 했나? 방으로 돌아가던 민수는 확인해 볼 생각으로 두 사람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두 사람을 불러보았다.

“리아야, 태호야? 안에 없어?”

그래도 대답이 없자, 저녁 먹으러 나갔나 보다 하며, 자신의 방으로 등을 돌렸다. 그때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휙 뒤를 돌아보자, 태호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태호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처럼 음산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음, 아닌가? 진짜 음산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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