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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75/81)

75.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2021.11.17.

띠리리리―. 차에 올라, 막 시동을 걸려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리아는 왠지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 났어.]

역시나…….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민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말하는 큰일이라는 게 그녀가 우려하는 그 큰일이 아니길 바라며, 리아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큰일이라니?”

[한발 늦었어. 엄마도 다 알게 되셨어.]

“뭐?”

민수는 오늘 민 여사가 예정에 없던 모임에 참석한 것과 그곳에서 우연히 정 여사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사돈께선 당연히 다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셨나 봐. 엄마 손을 꽉 붙잡고 그동안 맘고생 심했겠다고, 몰라서 못 도와줘 미안하다고 하셨대.]

“그래서? 엄마는 뭐라고 하셨대?”

[엄마 자존심이 있지. 몰라도 모른 척하셨겠냐?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오셨나 봐. 하여간 지금 엄마 표정 엄청 안 좋아. 언제 폭발할지 모르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와라.]

아, 진짜! 일이 꼬이려니까. 전화를 끊은 리아는 서둘러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했다. 하고많은 날 중에 왜 하필 오늘이 모임이었을까? 정 여사가 미안하다고 말해준 건 정말 백번 천번 고마웠다. 하지만 내일 그래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루 먼저 말한 탓에 어마어마한 핵폭탄이 되고 말았다. 친정 청담동에 당도하니, 이미 도착한 태호는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이미 민수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굳은 표정이었다. 차에서 내린 리아는 급히 태호에게 걸어갔다.

“태호야, 어떡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비뚤어진 상황을 바로 잡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가 강 회장과 담판을 지었듯 그녀는 민 여사를 달래야 한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리아는 어른 놀이에 흠뻑 빠져, 중요한 걸 까먹은 자신이 몹시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댁에서 모든 걸 밝힌 후에 다음 날이라도 민 여사에게 비밀 연애에 관해 털어놓았어야 했다. 민 여사가 그녀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이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시댁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해도 내심 불안한 게 친정엄마 마음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러면서도 깜빡 잊다니. 에라이, 주리아. 너, 정말 무심한 딸이네.

“이리 와.”

리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태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따뜻하고 너른 가슴에 안기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안심시켜주려는 듯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그냥 무릎 꿇고 빌어야지.”

“무릎을 꿇어?”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리아는 커다래진 눈으로 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천하의 강태호가 지금 무릎을 꿇겠다고 한 거 맞지? 강 회장에게조차 절대로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나갔던 태호다. 그런 그가 자진해서 무릎을 꿇겠단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 그런 거니? 태호는 리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내 잘못이 가장 크잖아.”

“무슨 말이야, 지금 여기서 가장 잘못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내가 엄마한테…….”

“쉬.”

태호의 손가락이 입술을 내리누르는 바람에 나머지 말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지금은 잘잘못 따질 때가 아니야. 장모님 더 화나시기 전에 어서 들어가자.”

태호는 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대문으로 향했다.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무사히 집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대문을 열자, 민수가 두 사람을 맞으려 정원으로 튀어나왔다. 민수의 긴장한 얼굴만 봐도, 지금 민 여사의 기분이 어떤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리아야, 무조건 빌어. 알았지?”

“아빠는?”

리아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급히 주 회장을 찾았다. 따지고 보면 주 회장도 공범이므로. 결혼 전에 태호에게 모두 들었으면서도 민 여사에게는 비밀로 했으니까. 괘씸죄 무게를 따지자면 한 이불을 덮는 부부 사이에 침묵을 지킨 주 회장의 죄가 더 무거웠다. 그러니 주 회장이 제일 적극적으로 민 여사를 달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옅은 희망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아버지 급히 베트남으로 출장 가셨어. 한 일주일 있다 오실 거래.”

“갑자기 웬 출장?”

“왜겠어? 아까 보니까 엄마, 아버지랑 통화하시면서 한바탕하시더라.”

그렇다면 해외 출장은 핑계일 뿐이고, 아마도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지 잠시 피해 있으려는 목적일 것이다.

“하아.”

큰 아군을 잃은 리아는 한숨을 쉬며 민수를 따라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민 여사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쌀쌀한 얼굴로 리아를 맞이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니?”

“……엄마.”

“장모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리아가 망설이자, 옆에 있던 태호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드렸다. 민 여사는 차가운 눈으로 리아를 흘겨보고는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죄송한 건 줄은 아나?”

“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장모님께 바로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다 제 불찰입니다.”

다행히도 민 여사는 단골 레퍼토리인 “꼴 보기도 싫으니 당장 나가!”라고 외치진 않았다. 대신 거실을 향해 등을 돌렸다.

“자초지종 먼저 듣고, 용서할지 말지 결정할 테니, 들어오게.”

이상하네? 거실로 향하는 민 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아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성격에 저렇게 차분하게 나올 리가 없는데……. 리아가 불같이 화끈한 건, 모두 민성은 여사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이었다. 이런 큰일에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설명부터 듣겠다고 나오는 건 민 여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엄마가 화낼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실망한 건 아닐까? 딸내미 다 필요 없다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민 여사를 따라가는 리아의 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런 리아의 속마음을 눈치챈 듯, 태호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리아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태호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아무쪼록 제발 무사히 지나갔으면……. 엄마, 정말 미안해. ***

“너, 또 다이어트하니?”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태희를 정 여사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막내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3일도 지나지 못해 포기할 거면서, 뭘 또 저리 열심인지.

“이번엔 또 어떤 다이어트야?”

“그런 거 아니거든!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 여사의 핀잔에 태희는 투덜거리며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마음고생하고 있는데! 태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걱정이지만, 저번 일도 있고 해서, 태희는 섣불리 정 여사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끙끙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입맛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그녀 나름대로 정보통을 굴려, 태호 주변을 살피는 중이다. 확실해지면 그때 정 여사에게 알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다이어트 운운이라니……. 속 깊은 딸의 진심을 몰라주는 정 여사가 태희는 야속하기만 했다. 태희가 젓가락을 내려놓든지 말든지, 정 여사는 식사를 계속했다.

“그나저나 사돈, 정말 마음고생 많았나 보더라. 아까 만나서 태호랑 리아가 몰래 사귄 거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더라고.”

“사돈어른께서?”

“응.”

그 말에 태희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혹시?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민 여사는 행복한 얼굴로 태호와 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건……. 사돈어른도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신다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엄마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 계셨겠지. 흑, 정말 울 오빠 어디 아픈 거야?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희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묵묵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당장 나가라고!”

민 여사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거실 안에 울려 퍼졌다.

“엄마!”

“장모님.”

리아와 태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민 여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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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여사는 방금 리아와 태호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전해 들었다. 시댁엔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유년 시절부터 서로 좋아했다는 것까지 곁들여, 대학교 2학년 때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민수 대리출석 해주다 다시 만난 이야기, 어른들 눈을 속이며 몰래 사귄 이야기, 어떻게 헤어졌냐는 등등. 그리고 얼마 전에야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까지 모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민 여사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런데 분노의 화살이 날아간 대상은 리아와 태호가 아니었다. 민 여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는 그녀 옆에서 앉은 민수였다.

“나?”

민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민 여사와 리아, 태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은 엄연히 제삼자일 뿐인데 왜 난데없이 공격 대상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리아와 태호도 마찬가지였다. 무릎을 꿇어서라도 민 여사의 마음을 가라앉히게 할 계획이었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 너! 주민수.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나빠. 리아는 당연히 얘기 못 했겠지. 하지만 민수, 넌 아니었잖아.”

“어?”

아니, 그러면 고자질이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민수는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

“엄마, 그랬다가 나 때문에 쟤들 깨지면, 그 원망 내가 다 받을 텐데?”

“그럼, 두 사람 헤어지고 나선, 왜 내게 말 안 했어?”

“응?”

민 여사의 질문에 민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민 여사는 손으로 세차게 민수의 등을 내리쳤다.

“앗, 엄마!”

“허약하다고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키워서 저밖에 모르지. 넌 동생이 괴로워하는데 나 몰라라 해? 그때라도 나한테 얘기했어야지!”

처음엔 민 여사도 긴 세월 동안 감쪽같이 속인 리아가 괘씸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나중엔 막 서럽기까지 했다. 자신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엄마 마음 하나 몰라주는 리아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리아가 견뎌야 했던 고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 여사는 몇 년 전, 속은 망가졌지만, 겉으론 애써 밝은 척하던 리아를 떠올렸다. 바보 같은 계집애! 왜 그런 걸 말 안 하고 혼자 끙끙 앓은 거야. 그래서 리아에겐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이 화를 내지 않아도 그간 충분히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민수는 아니었다.

“엄마, 나만 속인 거 아니잖아. 아버지도…….”

“아빠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다며? 아빠도 얼마나 충격이 크셨겠어.”

사실 주 회장도 괘씸하긴 했다. 그래서 아까 전화하면서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 얼마나 살벌했으면 예정에 없던 베트남 출장까지 서둘러 떠났을까. 하지만 그는 민수만큼 그녀를 오래 속인 건 아니었다. 고작 몇 달인데……. 그사이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이니까.

“하여간 네가 제일 나빠!”

졸지에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 버린 민수는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리아와 태호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리아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민 여사는 결정을 내렸다.

“주민수, 앞으로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마.”

“엄마!”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이라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도 아니고,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왜 아예 쫓겨나고 싶어?”

어떤 항변에도 민 여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딱 30분을 짐 챙기는 시간으로 내주었다. 할 수 없이 민수는 당장 필요한 것만, 대충 슈트케이스에 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라도 그사이 민 여사 화가 풀리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그녀는 차디찬 얼굴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람 시켜서 보낼 테니까, 집엔 얼씬거리지도 마. 리아, 너도 마찬가지야. 네 사정 이해는 해.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괘씸해.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서로 보지 말자.”

말을 마친 민 여사는 쾅 소리 나게 현관문을 닫았다. 밖으로 쫓겨난 세 사람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떡한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리아였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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