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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정말 모르겠어? (74/81)

74. 정말 모르겠어?2021.11.14.

그가 느릿하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넌 나랑은 놀아주지 않고, 형이랑만 놀잖아. 그래서 책만 읽었던 거야.”

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태호야……?”

“아, 맞다. 그리고. 너 초콜릿 먹는 모습에도 반했어.”

필름 끊긴 것처럼 연기하려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되받아쳐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귀가 솔깃한 고백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했다는 거지? 대학교 때부터가 아니라? 참, 그게 뭐라고 가슴이 울컥했다.

“……태호야, 난…….”

도대체 너란 남자는 왜 이렇게 날 감동하게 하는 거니? 온종일 걱정했던 게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다니.

“쉬이, 아무 말도 하지 마.”

태호는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녀를 향하는 눈빛이 따뜻하게 반짝거렸다. 리아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야근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녀가 어젯밤 일을 기억해냈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어떤 성격인지 훤히 아는데……. 분명 술김에 한 고백으로 혼자 끙끙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먼저 움직였다. 너뿐만이 아니라고. 나도 그때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그녀가 얄미워서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고. 리아는 아무 말 없이 태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아는 활짝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랑해, 태호야. 아주 오래전부터 너밖에 없었어.”

그 말과 함께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고백이란 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미 여러 번 한 고백이지만, 언제나 새롭게 느껴졌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 입을 맞추지 않아도, 격렬하게 탐하지 않아도 서로를 가슴에 담은 것 같은 느낌으로. 평온하고 따뜻하게 서로를 온전히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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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희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서현의 말에 태희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시무룩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그래? 요새 태호 오빠가 못살게 안 굴어서 살판난다며?”

그랬지. 태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한동안은 그랬었지. 신혼 재미에 듬뿍 빠져서, 동생이 강의를 빼먹고 놀든 말든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처음엔 이게 무슨 행운인가! 하는 생각에 놀기 바빴다. 그런데 너무 자유로우면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고, 자꾸만 이상한 그림자가 슬금슬금 그녀를 갉아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사랑에 빠지고 그런 인물이 아닐 텐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된다면 변한다고 하던데, 혹시? 그날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 내용도 뭔가 찜찜했다.

―널 여기 혼자 두고 내가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태희가 아는 강태호는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에 오빠가 죽을병에 걸린 게 사실이라면?

“안 돼!”

태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희야, 왜 그래?”

놀란 서현이 따라서 일어났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태희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나, 하나 짚고 넘어갈수록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저번 공사장에서 일어난 사고만 해도 그렇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갈비뼈에 금이 간 건데 태호는 일주일이나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꼭꼭 숨겨놓았던 비밀 연애를 갑자기 가족에게 털어놓은 것도 그렇고.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나, 강태희가 누구인가! 눈치 하난 엄청나게 빠르지 않은가! 태호 밑에서 살면서 터득한 그녀만의 생존의 방법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우려하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호랑이 저리 가라 무섭게 혼만 내는 오빠였지만, 그래도 엄연한 가족이었다. 태호가 해외 출장을 떠나기라도 하게 되면 “자유다!”라고! 외쳤지만, 사실 출장에서 돌아온 오빠를 보는 것도 좋았다. 만약 태호에게 무슨 일이 생겨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핑 눈물이 돌았다.

“흑, 우리 오빠 죽으면 어떡해?”

“뭐? 죽어? 누가? 태문 오빠? 태호 오빠?”

그제야 태희는 옆에 서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현아, 흑흑흑.”

태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태희 딴에는 정말 심각했다. ***

“너, 무슨 일 있어?”

리아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연구실에 들어서자, 민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가는 일은 잦아도 그녀가 그의 연구실에 오는 일은 드물었고, 온다고 해도 항상 고민에 찬 얼굴로 왔기 때문이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민수야, 아, 아니다. 오늘은 기분 엄청 좋으니까 오빠라고 불러줄게. 오빠.”

갑자기 왜 이래? 민수는 찜찜한 느낌에 슬그머니 뒤로 몸을 피했다. 혹시 자신이 정민훈 대리의 뒷조사한 사실을 알게 돼서 따지러 온 건가? 리아가 친절하게 나올 때면 언제나 끝엔 반전이 있었다.

“기분이 왜 엄청 좋은데?”

“알고 보니까 말이지, 오빠가 우릴 한 번만 이어준 게 아니었더라고.”

“응?”

민수는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민수, 너 어렸을 때, 몸 안 좋아서 외가댁에 요양 갔었잖아.”

“그게 너랑 태호랑 이어준 거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니? 너랑 떨어져서 나 혼자 쓸쓸할 거라고, 어른들이 나 태호랑 놀게 했잖아.”

“그랬지. 하지만 넌 태호랑 안 놀고 태문이 형이랑 놀았잖아. 그리고 그게 뭐?”

“큭.”

그때부터 둘이 사랑에 빠졌다고 털어놓으면 민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 가지가지 한다고 투덜거릴까? 아니면…….

“그보다, 리아야.”

그녀의 상념은 다음에 이어지는 민수의 말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시댁에서 너희 비밀 연애한 거 알게 됐다며.”

“어? 어.”

“그 말은 사돈어른 다 알게 됐다는 거잖아.”

“그런데?”

리아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꼭꼭 숨겼던 비밀을 털어놓게 되어서 얼마나 가슴이 후련한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시댁 식구 모두 두 사람을 이해해 주었다. 처음에만 강 회장이 잠시 화를 냈을 뿐, 그래도 정 여사 덕분에 큰일 없이 지나갔다. 그뿐인가? 그 이후부턴 정 여사는 틈틈이 며느리 사랑을 확인시켜 주곤 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정 여사는 직접 전화를 걸어…….

“너, 정말 모르겠어? 감 전혀 안 와?”

이번에도 그녀의 상념은 민수의 말에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왜?”

리아는 어서 본론을 말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민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쉽게 말해줄게. 너희 비밀 연애한 거,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태호가 아버지에게 털어놓았고. 얼마 전에 시댁에서도 알게 되었고. 자, 여기서 너희 비밀 연애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어?”

“힌트 하나. 사실은 누구보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이야.”

헉! 순간 리아의 두 눈이 쏟아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어떡해, 어떡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엄마!”

리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사돈처녀인 태희까지 다 아는데, 친정엄마인 민 여사만 두 사람의 비밀 연애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이라며, 리아를 걱정하며 마음 졸이고 있는 민 여사인데…….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아니, 그보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을 본인만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아빠가 말 안 했을까?”

리아는 혹시나 하는 기대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민수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하셨을 거야. 그런 거에는 고지식할 정도로 입 무거우시잖아.”

“알았어.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할게.”

“그래, 서둘러. 그러다 엄마가 먼저 알게 되면……. 후.”

민수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엄마, 뒤끝 긴 거 알지?”

“당연히 알지 그럼.”

그나저나 뭐라고 하면서 털어놓지? 하아, 미치겠네. 리아도 민수를 따라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리아는 제일 먼저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중역 회의에 들어간 탓에 통화는 연결되지 못했다. 대신 리아는 남 비서에게 오늘 태호의 저녁 일정을 비워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그녀 혼자 가는 것보단 둘이 가서 털어놓는 게 좋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에라도 태호가 시간이 되지 않는다면 그녀 혼자라도 가서 민 여사를 만나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말하는 게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일 수 있으니까.

“아우, 바보같이.”

어떻게 이리 중요한 걸 깜빡 까먹을 수 있을까. 민 여사가 그녀 걱정으로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정말 불효녀가 따로 없네. 이러니 자식 다 필요 없다고 하는 거다. 하아, 죄송스러운 마음에 숨이 탁탁 막히는 것 같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퇴근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리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노려보았다. *** 예정에 없던 모임에 참석하게 된 민 여사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상대와 마주쳤다. 속으론 껄끄러워도 겉으론 환하게 웃으며 맞아야 하는 사돈 정숙희 여사였다. 대학 선후배 사이로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긴 했지만, 긴 세월 양가의 불화를 겪다 보니 어느새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마음 같아선 모른 척하고 지나치고 싶었지만, 민 여사는 리아를 생각해 먼저 정 여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돈.”

정 여사는 민 여사를 여기서 보게 될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 여사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정 여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예정에 없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정 여사 역시 형식적인 미소로 답했다. 잠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두 사람은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일 뿐, 모임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헤어졌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모임이 끝난 직후에 일어났다. 민 여사가 막 모임 장소를 빠져나가는데, 누군가가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그녀를 붙잡은 이는 정 여사였다. 정 여사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빠르게 말했다.

“성은아, 나랑 잠시 얘기 좀 해.”

정 여사는 결혼하기 전처럼 민 여사를 이름으로 불렀다. 민 여사도 정 여사를 따라서 예전에 부르던 호칭을 사용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우선 내 차로 가자.”

차 안으로 자리를 옮기고 정 여사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안타까운 눈으로 민 여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성은아, 미안하다. 네가 정말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마음고생? 하, 입 아프게 말해서 뭐 할까? 하나밖에 없는 딸을 호랑이 굴로 시집 보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민 여사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모호한 정 여사의 질문에 민 여사는 미간을 그러모았다. 답이 없자, 정 여사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리아가 너에겐 다 말했겠지. 주 회장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네? 무슨 사실이요?”

정 여사를 바라보는 민 여사의 미간에 좀 더 짙은 주름이 새겨졌다. ***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리아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호는 청담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태호 역시 민 여사에게만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괜찮아, 오늘 잘 말씀드리면 될 거야.”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반반이었다. 민 여사가 크게 화를 낼 가능성이 반, 정 여사처럼 쉽게 받아줄 가능성이 반. 민수는 일찍 퇴근 후, 먼저 집에 가 있기로 했다. 민 여사의 눈치를 살피며 리아와 태호를 돕기 위해서였다. 띠리리리―. 차에 올라, 막 시동을 걸려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리아는 왠지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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