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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초콜릿보다 찐득하고 훨씬 더 달콤한 (73/81)

73. 초콜릿보다 찐득하고 훨씬 더 달콤한2021.11.10.

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어, 무슨 일이지? 항상 생글거리며 출근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저기압일까?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그제야 리아는 가면을 쓰듯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회의는 점심시간 끝나고 하죠.”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팀장실로 들어간 리아는 의자에 앉자마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아…….”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이상하다. 섞어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숙취가 심한 거지?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고작 피처 한 잔, 해치웠을 뿐이다. 평소의 그녀 주량이라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양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이상하게도 피처 잔을 거의 비울 무렵, 확 취기가 올라왔다. 잠이 모자란 상태에서 마셔서 그런가? 리아는 숙취해소제를 꿀꺽 삼키며 곰곰이 어젯밤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하게도 군데군데 필름도 끊겨 있었다. 생각났다가, 생각나지 않았다가……. 아예 까맣게 모든 기억이 지워졌다면, 덜 찜찜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숭덩숭덩 가위질하듯 기억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밖에선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집에 오고 나서, 침대에 눕고 나서가 문제였다. 리아는 조각조각 난 어젯밤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으으으흥, 시러. ……땀 흘려서 찝찝하던 말이야.

으, 평소에 그녀라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말투였다. 미쳤나? ‘으으으흥, 시러.’라니!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같이 샤워할래? 오빠가 씻겨줘.

―……그 대신 옷은 내가 벗겨줄게.

리아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게 정말 내가 한 말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더라? 셔츠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푼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 갑자기 어두운 장벽이 내렸다. 결론은 자신이 진짜 태호의 옷을 벗겼는지, 그에게 씻겨달라고 몸을 맡겼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땐 그는 이미 집에 없었다. 조찬 모임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한다는 쪽지만이 남겨 있었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그래, 그게 뭐 어때서?”

리아는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부부끼리 그게 뭐 어때서. 더한 것도 하는 사이에 말이다. 맨날 남자가 여자 옷 벗기라는 법이라도 있나? 맨날 남자가 먼저 샤워하자고 유혹하란 법 있냐고.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숙취해소제가 듣기 시작했는지, 축 처진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리아는 활짝 웃으며 컴퓨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악!”

그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아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어젯밤 더 한 실수를 한 것 같다! 흑, 망했다……. ***

“어제 자선 행사에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커피를 내려놓으며 남 비서가 물었다. 조찬 모임에서 돌아온 태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뻘 되는 중역들과의 모임에서 좋은 일이 있을 리는 없을 테고, 남 비서는 자동으로 자선 행사를 떠올렸다. 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 비서는 그걸로 질문을 끝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태호의 환한 표정이 대신 답을 해주었으니까.

“성후야.”

집무실을 나서는 남 비서를 태호가 불렀다. 정말 기분 좋은가 보네. 남 비서가 아니라 성후라고 이름을 부르다니.

“커피 말고 핫 초콜릿 마실 수 있을까?”

“핫 초콜릿이요?”

남 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평소에 단 음료는 입에도 대지 않는 태호의 까다로운 식성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네, 알겠습니다.”

도로 커피잔을 가져나가며 남 비서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남 비서가 집무실을 나가고, 잠시 후.

“후후.”

태호는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부터 웃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조찬 모임에서도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밀어 넣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하라고. 태호는 한 손으로 입을 감싸며 다시금 짧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더니, 어제가 정말 그랬다. 어젯밤 그는 힘겹게 리아의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눈꼬리를 휘며, 셔츠를 벗기고 품에 안겨드는데, 신체 건강한 남자로서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참아냈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되뇌며……. 그래도 샤워까진 갈 수 없었다. 샤워하면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래, 솔직해지자. 도를 닦은 것도 아닌데 거기까진 무리다. 대신 태호는 아이에게 하듯 리아를 달래며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워냈다. 처음엔 샤워할 거라고 투정을 부리던 그녀가 어느새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화장이 다 지워질 때쯤…….

“……오빠.”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으응, 오빠, 그거 알아?”

살짝 혀가 꼬인 것으로 보아, 아직도 필름이 끊긴 상태가 분명했다. 남들이 보면 술주정이라고 하겠지만, 태호에겐 사랑스러운 애교였다.

“뭐?”

“흐응.”

뭐가 그리도 좋은지 리아는 콧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

“……나 사실은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처음 봤을 때? 클럽에서?”

“아니.”

리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처음 봤을 때…….”

정말로 처음 봤을 때라면 어렸을 때? 유년 시절 전혀 기억 안 난다며? 태호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눈을 감고 있는 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난 함께 놀고 싶었는데 오빤 맨날 책만 읽고.”

“보자마자 날 좋아한 거라고? 내가 초콜릿을 줘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에 감았던 리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말간 눈동자가 오롯이 그를 향했다.

“나, 먹는 거로 쉽게 넘어가지 않거든.”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술 깬 후에 리아는 지금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나름 진지했다.

“그래, 알았어.”

클렌징 티슈를 옆에 놓으며 태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정말 유년 시절을 기억하고 하는 말인지, 그저 술김에 하는 말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리아야.”

속삭이듯 그녀를 부른 태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한입 가득 머금었다. 초콜릿보다 찐득하고 훨씬 더 달콤한 맛이 입안에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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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과장은 불안한 얼굴로 한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이건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나도 알아.”

“자칫 잘못했다간 그 불똥, 다 저희에게로 튀게 됩니다.”

“왜? 겁먹었나?”

한 사장의 말에 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연히 겁먹지, 겁 안 먹을 수가 있나? 그룹 총수의 아들을 치자는 계획인데……. 아무리 교묘하게 덫을 놓는다고 해도, 강태호란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덫에서 빠져나온 호랑이에게 먹잇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장님, 이렇게 무모한 분 아니셨잖습니까?”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수가 있나? 강 이사가 칼을 빼 들면,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있었던가? 지금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조만간 꼬리를 잡힐 거야.”

‘수박 겉핥기식’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한 사장은 며칠 전, 안전 가옥 금고에 넣어둔 장부의 위치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CCTV를 돌려봐도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고, 금고의 비밀번호 역시 그 말곤 아무도 모르지만 뭔가 수상했다. 강태호가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불안감과 분노 때문에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태호가 그의 뒷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은 KJ 쇼핑 사장 자리는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이대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물론 강 회장이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자신을 대신해서 한 사장이 복역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강 회장은 거리낌 없이 그를 내칠 것이다. 제길, 몸을 바쳐 충성한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니. 이게 바로 토사구팽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빼돌린 회삿돈은 이미 아무도 추적할 수 없는 안전한 계좌에 넣어두었다. 기회를 봐서 수진을 데리고, 한국을 뜨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전에 폭탄 하나쯤은 터뜨리고 가야 덜 억울할 것 같다. 자신 혼자 당할 순 없었다.

“덫을 놓을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찾아봐.”

한 사장의 지시에 마지못해 표 과장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표 과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한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태호의 이미지에 아주 큰 흠집을 내줄 계획이다. 그렇게 한 번 흠집이 나게 되면, 태호가 하는 말엔 큰 힘이 실리지 못하고, 후에 후계자 승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갖지 못하면 부숴버리면 되는 거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한 사장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강태호, 기대하라고.”

  *** 현관을 열고 들어온 리아는 조심스럽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불 꺼진 적막한 실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 다행이다. 먼저 잠들었나? 오늘 리아는 일부러 늦게까지 회사에 남았다. 태호에겐 급한 일이라고 대충 둘러대었다. 이유는 도저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다. 리아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갔다. 제 집에 들어가면서 도둑놈처럼 걷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소리를 냈다가 태호가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물론 별거 아니라고 하면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아내가 남편 옷도 벗길 수 있는 거고, 술주정을 부릴 수도 있는 거다. 그게 뭐 어때서? 그렇지? 하지만…… 하지만.

“하아.”

리아는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서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유년 시절 같은 거, 하나도 생각 안 난다며 거짓말을 했는데, 어제 술김에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고 털어놓고 말았다. 아, 정말! 미치셨어요? 주리아 씨! 그녀가 먼저 키스했고, 그녀가 먼저 접근했지만 그래도 태호가 먼저 그녀를 좋아한 것으로 나름 정리된 관계였다. 그녀를 끌어안으며 먼저 ‘사귀자’라고 말한 사람은 태호였으므로. 별거 아닌 거 같으면서도 괜히 어깨가 으쓱거리고 그런 거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유년 시절 기억 따위, 생각나지 않는다고 입을 꾹 다물었었다. 그랬는데……. 아, 어디 쥐구멍이래도 확 들어가고만 싶다. 결국 리아는 술 때문에 필름이 끊긴 걸로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태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그러려면 며칠 동안은 그와 마주쳐선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어젯밤 일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하지만 거실을 다 지나치기도 전에,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이어서 순식간에 컴컴한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흐읍.”

리아는 침실에서 나오는 태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많이 늦었네. 피곤하지 않아?”

“어? 어. ……하던 일을 마저 하려고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는 너는 지금은 몇 신데 아직도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는데 안 자고 뭐 해?”

“너 안 들어왔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잠들어?”

“다음부턴 그냥 먼저 자.”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부터?”

“응, 내일도 야근할지 몰라. 이번 이벤트가 아주 중요해서…….”

무슨 이벤트라곤 묻지 마라, 제발. 급하게 꺼낸 거짓말이라 자세하게 물어온다면 해줄 말이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안 되는데……. 가까이서 눈 보고 이야기하면 바로 말려들 텐데……. 그가 다가올수록 리아는 살며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보폭의 차이 때문일까?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그의 손에 허리를 감기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살며시 올려다보는데…….

“나도 그랬어.”

그가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 얘 또 반칙하네. 리아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투덜거렸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웃으면 어떻게 반항할 수 있는가! 리아는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풀벌레처럼 느껴졌다. 그가 느릿하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넌 나랑은 놀아주지 않고, 형이랑만 놀잖아. 그래서 책만 읽었던 거야.”

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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