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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슬기로운 신혼생활 (72/81)

72. 슬기로운 신혼생활2021.11.07.

“꺄아아악!”

컵케이크를 뒤집어쓴 연희의 입에서 연신 비명이 흘러나왔다. 악!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컵케이크를 뒤집어써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주리아’여야 했다. 작은 충격에도 기울어지게끔 케이크 지지대를 손본 후, 연희가 말을 건네고 리아가 뒤돌아보는 사이, 일행 중 한 명이 지나가는 척 지지대를 건드릴 계획이었다. 지지대가 무너지면 연희에게도 케이크 파편이 튈 수 있겠지만, 괜한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그녀도 조금은 케이크 세례를 받아야 했다. 당당한 리아가 무참하게 일그러지는 꼴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구경은 가까운 데서 해야 제맛 아니겠어? 그것이 리아 뒤에 바짝 서 있었던 이유다. 어차피 리아가 대부분 뒤집어쓸 테니까,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앞에 있던 리아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 어? 어?’ 하는 있는 사이, 리아에게 쏟아질 컵케이크가 연희에게로 쏟아졌다. 더욱더 기가 막힌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도대체 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쓰러진 리아를 품에 안은 태호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연희를 죽일 듯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그녀의 잘못으로 리아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처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지지대가 무너지게 손 본 것은 맞지만, 리아가 기절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왜 멀쩡하던 리아가 기절했는지 내가 알게 뭐냐고? 혹시 이 여자,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기절한 척하는 거 아냐?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살벌한 태호의 눈빛에 기가 죽은 연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급히 자리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악! 악! 악! 속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연희는 발목이 부서져라, 빠르게 문을 향해 내달렸다. ***

“……으응.”

두 눈을 감은 리아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두컴컴한 주위에 한 줄기 빛이 내리며 산처럼 쌓인 핑크빛 컵케이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리아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컵케이크를 집어 들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컵케이크가 입안에서 사르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아, 고소해! 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할짝할짝 핥았다. 그런데…… 잠깐? 왜 고소한 맛이지? 달콤해야 하는 거 아닌가? 리아가 이상한 것을 깨닫는 순간, 앞에 놓인 핑크빛 컵케이크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나 아직 다 안 먹었단 말이야! 당황한 리아는 사라지는 컵케이크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응?”

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했던 영상이 또렷해지며 서서히 눈앞의 물체가 형체를 찾아갔다. 우웅, 낮게 울리는 엔진 소음과 휙휙 지나가는 풍경으로 보아, 그녀는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운전대를 잡은 태호의 모습이 보였다.

“……태호?”

리아의 목소리에 태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시선이 부딪치자, 리아는 행사장에서 쓰러지며 태호의 품에 안겼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이었다. 그다음부턴 머릿속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깼어?”

리아를 잠시 바라본 후, 다시 차도로 시선을 돌리며 태호가 말했다. 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집에 가는 중이야.”

“집에?”

그 말에 리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분위기로 보아, 자선 행사는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행사 후, 할 일이 있었다. 소정은 도와줘서 고맙다며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고 리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정과 친해질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형님이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저녁은 다음에 먹어. 지금 네 상태가 어떤 줄이나 알아?”

“……아.”

그제야 리아는 잠시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호야, 나 기절한 거 아니야.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서 그런 거야.”

사실이다. 태호의 품에 안기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려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하지만 리아의 설명에도 태호는 아무 말 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왜? 그도 아는 사실이니까. 멀쩡한 지지대가 갑자기 무너지다니…….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태호는 속일 수 없었다. 누군가가 꾸민 짓궂은 장난임이 분명했다. 그것 때문에 리아가 기절한 것은 아닌지, 혹여 그 배경에 연희가 있는 건 아닌지, 태호는 알아야 했다. 그런데 연희를 마구 추궁하는 도중, 어디선가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들렸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코 고는 소리도 함께였다. 태호는 조심스레 품에 안긴 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평온하게 두 눈을 감은 리아의 모습이 마치 단잠에 빠진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보였다. 뭐야? 잠에 곯아떨어진 거야? 하지만 안도하는 것은 잠시, 얼마나 피곤했으면 기절한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요 며칠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서로를 불태웠으니까. 아무리 참기 어렵다고 해도, 오늘 새벽엔 편히 잠자게 내버려 둬야 했다. 그녀가 원했다고 해도 말이다. 후, 실망이다. 강태호. 태호는 리아를 한계까지 밀어붙인 자신이 짐승처럼 느껴졌다. 뜨겁고 거칠게 침범하고, 모든 것이 녹아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깟 욕망 하나 어쩌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힘들게 하다니…….

“태호야.”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태호의 팔을 쓸어내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리아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만 있자, 어디라도 아픈 건 아닌가 걱정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나, 아주 멀쩡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새 잠시 눈 좀 붙였다고 리아는 마구 힘이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수면 시간은 짧았지만, 아주 깊게 푹 잠들어서였다. 역시 수면의 질은 중요한 거다. 리아는 태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녁 먹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형님이랑 같이 먹자. 나, 이렇게 집에 가버리면 형님이 자신 때문에 내가 너무 무리해서 탈 난 거 아닌가 걱정하실 거야.”

그 말에 태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형수 걱정할 때야?”

이런, 밝은 목소리만 가지곤 안 되나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물러날 리아도 아니었다. 이젠 아니까. 어떻게 하면 태호를 움직일 수 있는지……. 리아는 태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콧소리를 냈다.

“오빠아, 나 진짜 가고 싶어……. 정말 안 될까?”

순간 흠칫하며 태호의 어깨가 자잘하게 떨렸다. 오빠아? 그냥 오빠가 아니라,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오빠아?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이렇게 불러준 적 있었던가? 그 어떤 유혹보다도 강렬하게 태호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가 사르르 녹아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려 하자, 태호는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흐응, 오빠아.”

리아가 다시 콧소리를 냈다. 제길, 태호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운전 중이 아니었다면 바로 입술을 겹쳐, 미치도록 달콤한 소리를 흔적도 없이 빨아들였을 것이다.

“좋아.”

결국 태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술은 안 돼.”

“딱 한 잔만 마실게.”

“안 돼.”

“오빠아, 딱 한 잔만, 응?”

또다시 그녀 입에서 ‘오빠아’라는 말이 나오자, 태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는데, 넘어가면 안 되는데……. 그러나 이번에도 오래 버틸 순 없었다. 그는 그녀에겐 약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잠시 후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딱 한 잔.”

“와, 고마워. 태호야!”

리아는 신이 난 목소리로 태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재빨리 소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예요. 저녁 어디서 먹을까요? 네……. 전 괜찮아요. ……네.”

저리도 좋을까? 태호는 소정과 통화하는 리아를 힐끗 쳐다보며 픽 웃고 말았다. 그래, 리아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줘야지. 어떻게 반대할 수 있을까? 딱 한 잔만이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다. 리아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성격이니까……. 그러나 그의 안일한 생각은 저녁 장소에 도착하고 얼마 후,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태문이 저녁 장소로 결정한 곳은 격식을 차리는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수제 맥주를 파는 격식 없는 팝 레스토랑이었다.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 웬 술집이야?”

태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자, 태문이 재빨리 대답했다.

“소정이가 시원하게 맥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여기 음식도 맛있는 편이야. 나름 맛집이라고. 제수씨, 괜찮죠?”

“그럼요, 저 완전 괜찮아요. 저도 맥주 마시고 싶었거든요.”

딱 한 잔만 마실 거라고 하고선, 리아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수제 맥주를 골랐다. 그리고 식사 내내, 홀짝홀짝 맥주를 마셨다. 물론 약속한 대로 한 잔만 마셨다. 보통 맥주잔이 아닌, 커다란 피처 잔을 한 잔으로 쳐서……. 피곤한 상태로 마셔서인지 술에 강한 리아였지만, 식당을 떠날 무렵엔 혀가 살짝 꼬여 있었다. 리아는 기분 좋은 듯 연신 미소를 흘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한 번도 술 취한 모습을 보여준 적는 리아였다. 그랬던 그녀가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은 건가?

“태호야, 나 너무 행복해.”

“그래?”

“응. 너무 좋아.”

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미치겠다. 헤헤헤, 웃는 모습이 왜 이리 예쁜 거야! 식당에서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이리 와.”

태호는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 술기운에 경계가 풀린 리아는 지금 이곳이 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태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뜨겁고도 깊은 키스였다. 서서히 그의 탄탄한 몸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지며, 조수석 쪽으로 그녀 몸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가고 동시에 심장 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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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맞닿은 것처럼 강렬한 쾌감이 몰려왔다.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던 입술은 한참 후에야 떨어져 나갔다. 태호는 조수석에 기댄 리아를 바라보며 거친 호흡을 달랬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간다면 도저히 멈출 수 없을 거라는 것을. 태호는 손으로 그녀의 젖은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단순한 접촉임에도 다시금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안을 순 없었다. 아니, 오늘은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된다.

“집에 가자.”

태호는 낮게 중얼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집에 도착하자, 다행히도 욕망은 통제가 가능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집에 오는 동안 잠이 든 리아는 살며시 입술을 벌린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태호는 리아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그때까지 세상 모르게 자던 그녀가 침대에 몸을 눕히자, 살며시 눈을 떴다.

“으응?”

리아는 아까 차 안에서 행동한 것처럼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야.”

“……아, 벌써?”

어눌한 발음이 아까보다 조금 더 혀가 꼬인 것 같았다. 술에 취하고, 잠에 취하고. 그녀는 지금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리아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크게 휘청거렸다. 태호는 재빨리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뭐 하는 거야?”

“……나, 화장 지워야 해.”

“내가 지워줄게. 넌 여기 있어.”

“……아니, 샤워도 해야 해.”

“너 취했어. 샤워는 무슨. 이따 술 깨면 해.”

그러자 리아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으으으흥, 시러. ……땀 흘려서 찝찝하던 말이야.”

리아야, 너 오늘 정말 왜 이러니? 태호는 리아를 품에 끌어안은 채,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건 엄연한 반칙이다. 오늘은 얌전하게 잠만 재워야 하는데, 이리 애간장이 녹게 애교를 부리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런 태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는 그의 가슴에 묻고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그럼, 우리……. 같이 샤워할래? 오빠가 씻겨줘.”

뭐? 오빠가 씻겨줘? 욱! 그녀의 말이 둔기가 되어 그의 심장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어서 그녀의 손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셔츠 버튼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그 대신 옷은 내가 벗겨줄게.”

“……리, 리아야, 제발.”

버튼을 풀 수 없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하지만 반항은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휙 그의 손을 물리치고 다시금 버튼을 열기 시작했다. 태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신의 셔츠를 벗기는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니었는데……. 그는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착한 남편이 되고 싶었다. 화끈하게 할 건 다 하면서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슬기로운 신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리아에게 강태호는 언제나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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