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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그가 왔다. 내 남자가……. (71/81)

71. 그가 왔다. 내 남자가…….2021.11.03.

“이봐요, 채연희 씨.”

연희를 노려보는 리아의 눈빛이 오싹할 만큼 엄격하고 매서웠다.

“연희 씨는 자선 행사에 놀러 왔어요? 봉사하러 왔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나 지금 봉사하고 있는데요?”

연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연희를 위해 나섰다.

“눈멀었어요? 우리 지금 봉사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네. 안 보이는데요. 정확히 뭘 하고 있었죠?”

“정확히요? 어, 그러니까…….”

모여서 수다 떠는 것 외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터라, 일행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연희가 나섰다.

“아무리 봉사하러 왔어도 소책자 나르는 허드렛일을 왜 우리가 해요? 그러다 손톱이라도 망가지면 어쩌려고? 난 제대로 거절도 못 하고 끌려간 소정 씨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예요.”

연희의 말에 일행이 연이어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래서 그런 거지.”

“소정 씨, 너무 애쓰더라.”

참으로 안쓰러워서 그렇겠다. 어쩌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저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리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 이해는 해요. 소정 씨는 오늘 행사가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졌겠죠.”

연희는 소정도 불우 아동이었다는 사실을 한 바퀴 돌려서 비아냥거렸다. 부모를 여의고 이모네에서 자란 소정의 과거를 비꼰 것이다. 자기 의지로 부모를 택해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라고 굳게 믿는 불쌍한 존재들. 부모란 바람막이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도 잘났는지…….

“우리 형님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에요. 봉사하러 왔으면 제대로 해야지, 그쪽처럼 설렁설렁할 순 없죠.”

“뭐요? ‘설렁설렁’?”

리아의 말에 연희는 과장되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렁’은 평소에 연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형제 중 유일하게 딸로 태어난 연희는 ‘외동딸’이란 타이틀을 달고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연희는 매사에 설렁설렁, 무슨 일이든 가족 누군가가 대신해주길 바랐다. 그런 연희를 보고 가족들은 ‘설렁이’라고 불렀다. 그랬는데 ‘설렁설렁’이란 단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주리아 입에서 나오다니! 마음 같아선 “야! 너, 지금 말, 다 했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러면 리아가 놓은 덫에 걸리는 꼴이 된다. 연희는 욱하는 감정을 참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 여유죠. 우리는 삶의 여유가 있는 거예요. 빠듯하게 사는 거랑은 차원이 틀린 거라고요.”

“차원이 틀려요? 하.”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답이 없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연희 같은 부류엔 어떤 설교도 통하지 않을 거다. 그저 똑같이 갚아줘 할 뿐.

“이런, 어쩌나? 삶의 여유가 있다는 사람이 공부할 시간은 좀 모자랐나 봐요.”

“……네?”

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희의 얼굴이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실제로도 공부한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한 모든 대학에 불합격한 그녀는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해외 사립대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학 후에도 개인 비서에게 모든 과제를 맡긴 채 놀러 다니기에 바빴었다.

“‘차원이 틀리다’라는 건 잘못된 표현이에요. ‘차원이 다르다’라고 해야죠. ‘틀리다’라는 표현은 옳고 그름을 가릴 때나 사용하는 거라고요.”

“그, 그게 뭐……?”

자세한 설명에도 연희는 리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 연희를 이번엔 리아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뭐. 손톱 망가지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인데, 표현 틀린 게 뭐라고. 그렇죠? 계속해서 쭉 여유 있게 사세요.”

할 말을 끝마친 리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행사장 뒤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희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지금 나보고 보라고 한 거야?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희는 일행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나, 가방끈 길어. 나 유학도 갔다 왔다고.”

“알아, 연희야. 진정해.”

“아니, 뭐 저런 게, 다 있어?”

연희가 씩씩거리며 리아에게 가려고 하자, 양쪽에서 일행이 그녀를 말렸다. 봉사하러 와서 괜한 일에 말려들을 순 없으니까.

“참아, 연희야. 여기서 싸울 순 없잖아.”

“그래,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니?”

그러자 잡힌 팔을 뿌리치며 연희가 외쳤다.

“누가 저런 거랑 싸운대? 격 떨어지게.”

리아를 노려보는 연희의 두 눈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너 어디 오늘, 망신 한번 당해봐라.”

  *** 밖으로 나간 리아는 한눈에 소책자를 나르는 소정을 발견했다. 소정의 양손에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소책자 묶음이 들려있었다. 리아는 재빨리 소정에게 걸어가 손에서 소책자 묶음을 받아들었다.

“형님, 저 왔어요.”

“동서!”

리아를 본 소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동안 그녀 혼자 나르고 있었는지, 빨개진 소정의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왜 이걸 혼자 이걸 나르고 계세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아냐, 다른 사람들도 다 바쁜 걸 뭐.”

소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리아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리아가 기분 상했다는 것을 알아챈 소정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 동서. 난 괜찮아. 내가 한다고 했어. 사실은 이게 더 편하거든…….”

저 안에서 소정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얼마나 가시방석이었는지 안 봐도 훤하다.

“이 여자들이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연희 일행 머리끄덩이를 확 잡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 여사 체면에 흠집이 가게 되니까, 분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리아는 소정의 어깨를 확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형님, 쟤들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거잖아요. 머릿속이 텅텅 비어서 그런 거라고요.”

“동서.”

그 말에 위로가 되었는지, 소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 자. 저도 도울게요. 얼마나 더 날라야 해요?”

리아는 씩씩하게 말하며 소정을 도와 소책자를 날랐다. 소책자를 모두 나른 후에도 소정은 다른 일을 맡았고, 리아는 옆에서 성심껏 도왔다. 두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삐 일하자, 멀뚱하니 서 있는 연희 일행에게 의아해하는 시선이 몰렸다. 봉사하러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결국 연희 일행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행사를 돕기 시작했다. 불쾌한 얼굴로 리아와 소정을 노려보면서…….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길 서너 시간. 자선 행사를 마칠 무렵엔 리아와 소정 모두 하나같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

“어머니 대신 참석한 거야. 말이 자선 행사지, 얼굴만 들이대면 되는 자리라고.”

태문의 설명에도 태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내내, 못마땅한 눈으로 태문을 노려보았다. 녀석, 누가 자기 아내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자선 행사 참석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저리도 화가 났을까 싶다. 결국 태문은 살벌한 태호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선 행사 참석해서, 형수가 뒷짐 지고 가만히 있었던 적 있어?”

답이 필요해서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대답을 알고 있으니까. 태문이 창밖에서 고개를 돌려, 태호를 바라보았다.

“형수, 자선 행사 참석하기만 하면, 일주일 동안 앓아누울 정도로 무리하잖아. 저번에도 ‘독거노인을 위한 김치 담그기 행사’에 갔다가 손목 인대에 이상이 생겼었지.”

“그랬지. 소정이 성격에…….”

“그러면.”

태문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태호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어머니도 없이 형수만 행사에 참석했는데, 리아 성격에 형수 혼자만 고생하는 거 옆에서 보고만 있을까?

“어?”

그제야 태문은 왜 태호가 이리도 기분 나쁜 표정인지 깨달았다. 아니, 이 녀석. 어쩌다 벌써 팔불출이 돼버렸지? 그러니까 제 아내 고생하는 꼴을 절대로 못 보겠다는 거잖아! 태문은 자신 옆에 앉은 이가 자신이 알고 있던 강태호가 맞나? 잠시 의심해 보았다. 아무리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지만……. 와, 까칠한 내 동생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에라도 소정에게 전화해, 오늘은 대충대충 하라고 말려야 하나? 태문은 몹시도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

“아아.”

리아는 산처럼 쌓인 컵케이크 타워를 바라보며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근육이 많이 뭉쳤는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소정을 따라다니며 이일 저일 돕다 보니,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다. 리아는 어머니 민 여사를 따라 자선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지만, 땀이 날 정도로 강도 높게 일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으음.”

순간 아찔하며 눈앞이 흐려지려고 하자, 리아는 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너무 무리했나? 잠이 모자라는데 땀까지 흘려가며 정신없이 일해서 더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모두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겠지. 리아는 양손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가자 대부분은 단상에 선 진행자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주최 측의 감사 인사가 끝나고 참가자들에게 컵케이크를 답례로 하나씩 나누어주면 오늘의 행사는 모두 끝이 난다. 총 8단으로 구성된 컵케이크 타워에는 백 개가 넘는 컵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원래는 연희 일행이 원하는 이들에게 개별 포장해서 나누어주는 건데,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침 할 일을 끝낸 리아는 연희 일행이 올 때까지 개별 포장을 돕기로 했다. 과연 도우러 올지 모르겠지만…….

“어머, 미안해요.”

귀신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뒤쪽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지 연희가 미안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리아 씨는 인제 그만 쉬어요. 개별 포장은 내가 할게요.”

웬일이라니? 그새 철들진 않았을 텐데……. 그때였다. 리아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알렸다. 이상한 낌새에 뒤를 돌아보니, 무슨 일인지 컵케이크 타워가 휘청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워 뒤편에 있는 누군가를 본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았다. 크게 휘청거리던 컵케이크 타워는 8단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리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리아가 누구인가! 왕년에 태권도 검은 띠까지 땄던 그녀이다. 17 대 1로 싸우진 못해도, 위기 순간에 휙 몸을 날려 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무너진 컵케이크 타워가 덮치기 직전, 리아는 재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꺄아아악.”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이 행사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몰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컵케이크로 뒤집어쓴 연희가 빨개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컵케이크로 엉망진창이 된 연희의 모습이 리아의 흐릿해진 시선에 잡혔다. 아마도 리아가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뒤에 있던 연희에게로 컵케이크 타워가 쏟아져 내린 모양이다. 연희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갑자기 몰려온 어지러움에 리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으려는데.

“……!”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하아.”

따뜻한 품 안에서 그리운 체취를 느끼는 순간, 리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왔다. 내 남자가……. 이 와중에 입가에 미소가 번지다니.

“도대체 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화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가에 흘러들었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인데……. 그런데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한다. 리아는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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