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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눈치가 없는 건가? (70/81)

70. 눈치가 없는 건가?2021.10.31.

“네, 일찍 퇴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죠?”

[아, 그러니까 말이다…….]

정 여사의 설명을 들은 리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정 여사의 부탁은 ‘불우 아동 돕기’ 자선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정이 꼬여 다른 행사와 겹쳐는 바람에 정 여사는 우선 소정을 자선 행사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곧 불안감이 밀려왔다. 소정이 모임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항의할 순 없기에 정 여사는 항상 소정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며느리를 도와왔다. 자신이 옆에 있다면 그 누구도 소정을 함부로 대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둘째 며느리인 리아였다. 리아가 함께 가준다면 소정에게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고……. 그래도 난데없는 부탁이라, 물어보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도 안다, 별로 내키지 않는 부탁이라는 걸.]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듯 정 여사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그래도 가줄 수 있겠니?]

일요일 이후, 리아를 대하는 정 여사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단단한 벽이 무너졌다고 해야 하나?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이제야 리아를 진정한 며느리로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걸까?

“내키지 않는다니요. 당연히 가야죠.”

일부러 리아는 더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정 여사가 누구인가? 사랑해 마지않는 강태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어머니가 아니던가! 요 며칠 사랑을 불태우느라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리아는 정 여사의 부탁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갈게요. 어머님.”

[그래, 고맙구나. 네가 가주면 큰 애에게 도움이 될 거다.]

“네.”

그러나 정 여사와 전화를 끊은 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흠.”

과연 자신이 정 여사만큼 소정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번 행사에 ‘빙쌍 무리’도 참석하는 건 아니겠지? 리아는 LS 그룹 창립 파티에서 만났던 채연희 일행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게 KJ 스타일인가 봐. 그 집 첫째는 완전 흙수저 집에서 데려왔잖아.

―진짜 수준 안 맞아.

―돈 없어서 쩔쩔매는 거 맞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쪽도 그러네.

  그날 일을 돌이키던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다. 그땐 태호가 나서는 바람에 꾹 참았지만, 또다시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번엔 참지 않을 거야.”

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씩씩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 역시, 아니라 다를까.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반갑지 않은 무리가 리아의 시야에 확 들어왔다. 그날도 핑크빛 드레스로 눈에 확 띄더니, 채연희는 오늘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핑크빛 일색이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불타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관성 하난 확실하다.

“하.”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 큰 어른이 싫어하는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다니……. 그래도 됐으니까 그런 거겠지? 아무도 제지하는 이가 없었을 테니까. 결국은 진정으로 그녀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인물이 주위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면에선 연희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리아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마주 보자, 연희는 흠칫 놀란 듯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받아치면 바로 꼬리를 내릴 거면서……. 리아는 연희를 무시하기로 하고 소정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게도 소정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신호음만 가고 연결되지 않았다.

“소정 씨 찾아요?”

그런 리아에게 연희가 일행을 이끌고 다가왔다. 연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내뱉었다.

“아까 주최 측에서 소책자 나르는데 손이 모자란다고 했더니, 그거 도우러 갔나 봐요. 저쪽으로 가보세요.”

연희는 핑크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긴 손톱으로 행사장 뒤쪽을 가리켰다.

“소정 씨, 아마 거기 있을 거예요.”

‘노려볼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친절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알려준 건 고마운 거니까 리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러나 막 연희를 지나친 순간,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흘러나왔다.

“격 떨어지게 그런 일을 왜 한다고 나서?”

누구? 형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뭐…… 평소에 하던 일이니까 남들보다 잘한다고 생각했겠지. 안 그래?”

“아, 맞다. 부모도 없이 이모 손에 컸다며? 알바란 알바는 다 해가면서…….”

“어머, 말로만 듣던 불우 아동이 바로 옆에 있었네?”

예상한 대로 소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막말을 내뱉는 채연희 일행에게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것들이 정말! 발끈한 리아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연희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형이 어쩐 일이야?”

태문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태호는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문은 일어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본사에서 계열사로 근무환경 조사 나가더라고. 그래서 나도 따라왔어. 내 눈으로 직접 둘러도 볼 겸해서.”

그 말에 태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시간이 남아도나 보군.”

괜한 비아냥거림은 아니었다. KJ그룹의 전무인 태문이 직접 나설 업무는 아니니까. 하지만 태문은 거래처 중역과 골프 할 여유가 있으면 그 시간에 작업 현장이나 한 번 더 둘러보겠다는 주의였다. 강 회장은 그런 태문을 보며 기업인이 아니라, 사회복지가가 되었으면 더 어울렸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장남인 태문 대신 태호를 후계자로 내심 결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무슨 소리야? 계열사 직원 복지를 챙기는 것도 내 업무인 거 몰라?”

자리에서 일어난 태호가 소파 맞은편에 앉자, 태문은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옥이 참 오래되긴 했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본사 건물과 비교하면 지상 10층인 KJ푸드 건물은 초라할 정도로 수수했다. 집무실 내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에 새로 실내 공사를 했다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순 없었다.

“넌 언제나 본사로 들어올 거야?”

태문이 생각하기에 이곳은 태호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동생에게는 KJ푸드가 아닌 그룹 본사처럼 더 넓고 높은 곳이 필요하다. 전무란 직함 역시 자신보다는 태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글쎄. 하던 일은 끝내고 가야지.”

그러나 태호에겐 그 어떤 것보다 한 사장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리아와 결혼에 성공하긴 했지만, 양가의 오해가 완전히 풀린 게 아니기에 아직은 불안한 상태였다.

“기어코 끝을 볼 거야?”

“당연하지.”

태호의 대답에 태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쉽진 않을 거야. 한 사장이 당하고만 있겠어? 틈틈이 인맥을 쌓아놓았더라고. 주주 중에도 한 사장 라인이 꽤 있어.”

“그래도 한 사장의 가장 큰 인맥은 아버지지.”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태호가 말했다. 그렇다. 한 사장을 뒤에서 단단히 받치고 있는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강대호 회장이었다. 그러니까 그 무엇보다도 과연 강 회장이 한 사장을 내칠 결심을 하는가가 우선이었다.

“아버진 아직도 반신반의 하시지?”

“반신반의한다기보다는…….”

태호의 물음에 태문은 정확한 대답을 찾기 위해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수십 년 동안 오른팔로 지냈던 사람인데, 아무리 비리가 있다고 해도 웬만하면 덮고 지나가고 싶으신 것 같아. 여기서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아버지답지 않게 약한 모습인데?”

“한 사장이 아버지 대신 감방에 간 일로 마음의 빚이 있으시겠지. 사실 그때 그 일로 한 사장 부인도 일찍 돌아가시게 됐고…….”

태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강 회장은 한 사장이 자신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고 복역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가공 육류에 불법 성분을 첨가하게 지시한 이는 한 사장이었다. 회사 몰래 원자재 대금을 빼돌리다, 발각할 위기에 몰리자, 그걸 덮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 와중에 공장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민훈의 아버지인 정창식이 다쳤다. 자신의 비리가 탄로 날 게 두려운 한 사장은 윗선에 보고하지 않았고 결국 정창식은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한 사장이 강 회장 대신 죄를 뒤집어쓴 게 아니라는 사실을 태호가 알아낸 건 얼마 전의 일이다. 기회를 봐서 강 회장에게 알릴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강 회장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보다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대화가 무거운 주제로 흘러가게 되자, 태문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끝날 때쯤이면 딱 퇴근 시간이니까, 이따 함께 퇴근하자.”

“내가 왜?”

함께 퇴근하자는 말에 태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형제끼리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낯간지럽게 함께 퇴근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 또한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조차 둘은 한 번도 나란히 하교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땐 태호가 리아의 정혼자인 태문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응, 우린 정혼한 사이래.

  태문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꽤 오랫동안 태호를 괴롭혔다. 리아와 관련된 일에선 어째서인지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태호가 태문과 거리를 두는 일은 그가 소정을 만나 사랑에 빠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태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문은 싱글벙글 웃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왜긴 왜야? 자선 행사 같이 가야지. 오늘 소정이가 어머니 대신해서 행사에 참석했잖아. 우리 소정이 고생 많았을 텐데 가서 맛있는 거 사줘야지.”

“뭐?”

태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 아내 고생했다고 마련한 자리에 왜 나를 끌어들여?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없는 척, 하는 건가? 한창 신혼의 단꿈에 빠진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리아를 봐야 한다. 그런데 자선 행사라니! 소정을 아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수로서 일 뿐이다. 리아와 함께 하기에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는데, 소정까지 챙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형수는 형수, 아내는 아내다.

“됐어. 난 바로 집에 가야 해.”

태호는 쌀쌀맞게 거절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태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 가서 뭐 하게?”

정말 몰라서 묻나? 자신이 신혼 때 어땠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태호는 눈치 하나도 없는 태문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태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태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뭐 하게? 제수씨도 오늘 소정이랑 자선 행사 함께 참석했는데…….”

“뭐?”

자리로 돌아가던 태호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리아도 자선 행사에 참석했다고? 순간 태호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에 나서는 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 며칠 회사 일이 바쁜지 그녀는 몹시도 피곤해 보였다. 음…… 정확히는 회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체력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집에서 푹 쉬게 하려 했는데……. 정말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아, 그래도 신혼인데 손끝은 건드려야지. 하여간 웬만하면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자선 행사 참석이라니. 왜 거길 보낸 거야!

“그게 정말이야?”

태문을 향한 태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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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금 그 소리, 우리 형님을 두고 말한 거예요?”

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연희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머, 들었어요?”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말한 주제에 연희는 딴청을 부렸다. 격 떨어지는 건 소정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는 걸 왜 모를까? 연희에게 뭐라고 해보았자, 쇠귀에 경 읽기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아니고, 소정의 일인데……. 가족을 건드리는데 어떻게 참고만 있을까!

“이봐요, 채연희 씨.”

연희를 노려보는 리아의 눈빛이 오싹할 만큼 엄격하고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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