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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불꽃이 팡팡 튀는데 어쩌란 말인가! (69/81)

69. 불꽃이 팡팡 튀는데 어쩌란 말인가!2021.10.27.

다짐하듯 입으로 소리 내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던 리아는…….

“……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눈앞으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리아는 천천히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태호 위로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침대 위에서 잠든 모습은 많이 봤지만,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치 빈틈도 없는 남자가 경계를 허물고 소파에서 졸고 있다니. 그런 모습마저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한다면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겠지? 하지만 엄연히 사실인걸!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아, 저 프레임 안에 있는 조각상 같은 남자가 내 남편이란다! 정말 눈물 핑 돌게 행복하다. 리아는 마냥 흘러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한 채, 살금살금 태호가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태호의 옆에 앉은 리아는 살며시 기대듯 그를 끌어안았다. 하아, 품에 안기는 순간 스며드는 익숙한 체취와 체온이 미치도록 좋다. 그녀가 느낀 것처럼 잠결이지만, 그도 리아를 느꼈는지 가만히 있던 몸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어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왔어?”

“응.”

고개를 들자,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그래.”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서로 마음이 통하고 몸이 따뜻해지는걸! 아, 너무 좋다. 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태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태호는 고개를 숙여 리아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먼저 집에 돌아온 태호는 오늘 수진과 있었던 일을 ‘리아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수진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리아에게 알려주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리아는 수진을 절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수진이 그녀 뒤에서 험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기분이 나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태호는 조금이라도 리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깊게 생각에 잠겼던 탓일까? 태호는 리아가 옆으로 올 때까지 그녀가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를 끌어안는 부드러운 손길과 그녀만의 달콤한 향이 느껴지자, 태호의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순간,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수진은 아무 존재도 아니니까. 쓸데없는 이야기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진 않았다.

“흠.”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눈을 감았다. 붉게 물든 노을이 서서히 어둠으로 변할 때까지 리아와 태호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이 넓은 거실을 잔잔하게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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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뭐 특별히 알아낸 거 있나?”

“죄송합니다. 사장님.”

호출을 받고, 급히 부산에서 올라온 표 과장은 한 사장만큼이나 굳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완벽하게 종적을 감췄습니다.”

“후우, 그래?”

그 말에 한 사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요 며칠 정민훈 대리에게 통 연락이 없자, 한 사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 대리 부모가 머무는 요양원에 연락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정 대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 정 대리의 부모가 요양원을 퇴소했다는 것이다. 놀란 한 사장은 급히 표 과장을 부산으로 보냈다. 하지만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정 대리의 부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정 대리는 아직도 연락되지 않습니까?”

표 과장의 물음에 한 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돼. 오늘 아침에 녀석이 먼저 전화했더군.”

그런데 그래서 더 수상했다.

“아예 연락이 안 되는 거면 녀석이 눈치채고 튀었나? 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야.”

도무지 정 대리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가 진실을 알고 일부러 접근해 온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요양원에서 부모를 퇴소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응, 없었어.”

씁쓸한 얼굴로 한 사장이 대답했다. 분명 뒤에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감이 안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정 대리 부모가 사라진 것을 보면 누군가가 정 대리를 뒤에서 돕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님, 그리고 이건…….”

생각에 잠긴 한 사장에게 표 과장이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우리 뒤를 캐는 이가 있는 것 같다고, 예전에 보고드린 적 있었죠. 그게 누군지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그게…….”

“누군데 그렇게 뜸을 들여?”

표 과장이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한 사장은 그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챘다.

“확실한 거야?”

얼마 후, 서류를 훑어보던 한 사장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강태호 이사 쪽 사람이라고?”

“네.”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낸 것 같아?”

표 과장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한 사장이 짧게 물었다.

“워낙 철저하게 처리해놓아서, 우리 뒤를 캔다고 해도, 그쪽에서 알아낼 건 별로 없을 겁니다. 모든 건, 안전 가옥 금고에 있으니까요.”

안전 가옥은 청평에 있는 한 사장의 별장을 말한다. 금고는 한 사장이 사용하는 침실에 있었다. 침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장과 가끔 밀회를 즐기러 찾아오는 강수미뿐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강태호가 그의 뒤를 캔다고 해도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훗, 태호 녀석, 제법이군. 감히 내 뒤를 캐고 있었단 말이지.”

언제나 깍듯하게 ‘강 이사’라고 부르던 한 사장 입에서 ‘태호 녀석’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표 과장은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차마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할 것 같군. 쓸 만한 미끼 좀 찾아와 봐.”

먼저 선수를 치다니? 지금 그룹 총수 아들을 상대하자는 말인가? 표 과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게 어디 있나? 어차피 모든 게 도박이야.”

그렇다. 지금까지 모두 것을 잃게 되거나, 모두 것을 차지하거나의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하곤 했다. 그것 때문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지만, 절대로 후회하진 않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한 사장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수진에게 상처를 준 주리아와 강태호에게 어떻게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그래, 함정을 파는 김에 아예 두 사람을 이혼시키는 것도 좋겠군. 그건 아마도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울 것이다. 굳건하게 맺어진 ㈜정직도 쉽게 둘로 쪼개놓지 않았던가.

“후후.”

한 사장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할 말 있으면 해.”

미팅이 끝나고도 채영이 회의실에 남아 머뭇거리자,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리아가 말했다.

“저, 팀장님……. 정 대리님 말이에요.”

그날 이후로 정 대리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식품 사원인 정 대리를 파견근무 형식으로 1년 동안 KJ푸드로 데려가려면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적당한 구실을 찾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공백이 길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슬그머니 주위에 소문도 흘렸다.

“KJ푸드로 파견근무 가신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채영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것을 보니, 제대로 흘린 모양이다.

“응. 아마도. 다음 달부터 그쪽으로 출근하게 될 거야.”

“정말이요? 흑, 서운해요.”

정 대리가 산업 스파이긴 했지만, 팀원들에게 꽤 괜찮은 동료였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막내 사원인 채영을 잘 챙겨주곤 했었다. 리아에게도 민훈은 좋은 학교 선배였다. 어쩌다 그와의 관계가 이리 꼬여버린 건지, 참으로 속상할 뿐이다.

“그런데 정 대리님, 우리에겐 한마디도 없으시고. 아예 출근을 안 하시잖아요.”

“갑자기 결정 난 거라서 처리할 게 많아서 그래. 다 정리되면 KJ로 가기 전에 와서 인사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제야 환하게 웃은 채영은 회의실을 나서던 중,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팀장님, 요새 너무 피곤해 보이세요.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시려고. 오늘은 반차내고 일찍 퇴근하세요.”

채영은 정말로 리아가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어……? 어, 그러지 뭐. 이것만 정리하고.”

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황급히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나 피곤해 보였나? 어젯밤 두 사람은 어두워질 때까지 소파에 앉아있다가, 전날 정 여사가 보낸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굳게 다짐한 대로 얌전히 잠만 잤다. 문제는 새벽녘에 잠시 눈을 뜨고 나서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와 함께 눈도 맞아버렸다. 서로 바라만 봐도 불꽃이 팡팡 튀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멈출 수 없는 선까지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침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침잠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물론 밥 먹다가도, 설거지하다가도 눈 맞는다는 신혼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길고 긴 연애 기간과 비교해, 늦게 시작한 이유도 있을 테고. 그래도 리아는 회사에서만큼은 티 내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온몸이 쑤시는 탓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잠이 모자라, 끊임없이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고……. 하, 정말 이러다 채영이 걱정한 대로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신혼 때 쓰러졌다는 친구 얘기를 듣고 ‘왜?’ 하고 의아해했었는데 이젠 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함.”

작업을 끝낸 리아는 하품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정말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눈 좀 붙여야겠다. 띠리리―.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

아무 생각 없이 발신자를 확인한 리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머님?”

[그래, 나다.]

휴대폰 너머로 정 여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어머니의 전화에 리아는 긴장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시지?

[내가 바쁜데 전화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네, 어머님.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한데, 급한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구나. 리아야, 너 오늘 반차 내고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니?]

강요하는 말투가 아닌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하지만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말투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 여사는 그녀를 ‘새아가’가 아닌 ‘리아’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어떡하지? 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업무가 바빠서 곤란하다고 정중히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하려던 참이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할 자신은 없었다.

“네, 일찍 퇴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죠?”

[아, 그러니까 말이다…….]

정 여사의 설명을 들은 리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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