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우리의 사랑을 알아?2021.10.24.
“그게 무슨 뜻이지?”
수진을 노려보는 태호의 눈빛엔 소름 돋을 정도로 냉기가 어려 있었다. 알고 지낸 지 오랫동안, 태호는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보긴 했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숨기지 않는 적대감에 수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도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어쩌면 무관심보단 증오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감정이란 게 담겨 있는 거니까. 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태호의 날 선 시선을 견디어냈다. 고백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끝내야 하는 사랑이라니.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란 희망에 참고 또 참았는데……. 그런데 그게 다 헛수고라잖아! 이미 리아와 태호는 예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잖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수진은 한순간 지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긴 세월 동안 애절히 태호를 바라보며 기다렸던 자신이 너무나 가여웠다. 좋아, 그렇다면……. 태호를 가질 수 없다면 흠집이라도 내야 덜 속상할 것 같다. 수진은 리아와 태호, 두 사람 사이에 불신을 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진은 태호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나와 리아, 우리, 대학교 다닐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야. 그런데 난 너희가 사귀는 거 전혀 몰랐어. 날 감쪽같이 속이고 너를 만났더라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 대학 재학 시절엔 함께 클럽도 가고 종종 밥을 먹긴 했지만, 시시콜콜 사생활을 털어 넣을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리아가 주말에 뭐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엔 관심 없었다. 정확히 리아와 수진이 가까워진 것은, 리아가 태호와 헤어진 이후다. 이별의 상처로 괴로웠던 리아는 유정을 불러내 술을 마셨고 그러다 수진과도 함께 어울리게 되었고 서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태호에게 밝힐 마음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상황을 놓고 따지자면 리아는 가해자였고, 자신은 피해자였다. 수진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성인이 된 리아와 태호가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냐는 것이다.
―너희, 둘 정확히 언제부터 사귄 거야?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클럽에 갔다가 그곳에서 생일 파티하던 태호를 보게 됐어.
―뭐?
리아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진은 속으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날이라면 너무나도 잘 기억한다. 태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고 싶어, 여기저기 부탁해 보았지만, 남자끼리 놀 거라는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진은 멀리서나마 태호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유정과 리아를 끌고 클럽으로 향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진은 태호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리아는 루프톱에서 태호를 만나게 되었단다. 만약에 그때 자신이 리아와 함께 클럽에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두 사람을 맺어 준 거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진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아악! 두 사람이 미운 만큼 멍청한 자신도 미웠다. 어떻게 해야 엉망진창 된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릴까? 모두 다 부숴버릴까? 가질 수 없는 장난감을 망가뜨려야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라……. 훗,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태호가 물었다. 그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수진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태호야, 리아가 내 친구라지만 너도 내 친구야. 아니, 네가 더 오래된 친구지. 그러니까 나는 리아보다 네가 더 걱정돼. 그래서 하는 말이야. 리아는…….”
“잠깐만.”
태호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수진의 말을 막았다. 한동안 수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곧 치아를 드러내며 크게 미소 지었다.
“태호야?”
수진은 한 번도 태호가 이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수진은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소는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고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내가 너를 상대하는 이유는 오로지 네가 리아의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내가 네 친구라고? ”
그 말에 수진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미 한 번 들은 말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상처받는 건 마찬가지였다.
“태호야, 내가 어떻게 리아의 친구이기만 해? 나는 리아보다 널 먼저 만났어. 리아는 대학에 들어가서 만났고, 난 너를 중학교 때 만났다고!”
“그래서? 오래 알고 지내면 다 친구가 되는 건가? 넌 그래?”
“……태호야.”
“난 아니야. 널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너를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흐흑, 어떻게 그런 말을…….”
결국 수진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태호의 차가운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으로 수진을 응시했다. 도대체 난데없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도무지 수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수진에게 틈을 보인 적 있었던가?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준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또래끼리 놀라는 어른 말에도 태호는 수진을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었다. 리아가 아니라면, 그 누구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랬는데……. 그런데 수진은 자신을 친구라 여기고 있었다니……. 정말 황당할 따름이었다. 태호는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정보만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가지만 묻자. 내가 미국에서 교통사고 당한 거, 그걸 리아에게 말해준 게, 너야?”
순간 수진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누……누가 그래? 리아가 그래? 내가 말해줬다고?”
“지금 여기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다, 아니다.’만 말해.”
거역할 수 없는 명령조의 말투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수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리아에게 말했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그때 네가 왜 그리 힘들어하는지 몰랐어. 너, 미국에 있을 때 완전 유령 같은 모습이었잖아.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모두 리아에게 버림받아서였더라고.”
버림받은 게 아니라, 잠시 헤어진 거였지만 태호는 잠자코 수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너 그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리아는 어떻게 지냈는지 아니?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냈어.”
물론 그도 아는 사실이다. 헤어지고 난 후, 리아는 민 여사 손에 끌려 선을 보러 나가기도 했고, 지인 소개로 만난 상대와 가볍게 데이트도 했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아픔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을 뿐. 대부분은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함께 영화 보는 선에서 끝났다. 하지만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었다고 해도 태호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리아가 이별의 아픔에서 헤어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자신이 해주지 못한 위로를 다른 이가 해줄 수 있다면, 질투로 속은 타들어 가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태호는 수진의 도발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따위가 우리의 사랑을 알아?
“태호, 너 혼자 아파할 동안, 리아는 남자들이랑 재미 볼 거 다 보면서…….”
그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다.
“닥쳐.”
수진을 노려보며 태호는 짧게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험한 말에 수진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지만 듣겠어. 거기서 한마디 더 나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태, 태호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네가 리아의 친구라곤 하지만, 앞으론 나에게 그 어떤 예의도 기대하지 마. 마음 같아선 리아와 못 만나게 하고 싶지만, 그건 리아가 결정할 일이고.”
“흐흑.”
수진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다른 여자의 눈물은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호는 그대로 수진을 지나쳐 빠르게 옥상 정원을 빠져나갔다.
“흐흐흑, 태호야.”
수진은 시야에서 멀어지는 태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었는데……. 처음엔 작은 흠집이라도 차차 균열이 커져서 언젠가는 깨지고 말 테니까. 자신이 아픈 만큼 리아와 태호의 관계에 흠집을 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리아를 향한 태호의 믿음은 너무나 견고했다. 불신의 화살은 두 사람 사이에 흠집을 내긴커녕, 그대로 퉁겨 다시 수진에게 날아왔다.
“……왜? 왜?”
목이 아프게 크게 울부짖고 싶었다. 왜 리아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는데! 도대체 왜? 수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오늘 일정, 다 취소해.”
한 사장은 사무실로 들어오며 굳은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당황한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한 사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들을 것 없어. 모두 내일로 연기해.”
말을 마친 한 사장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한걸음에 책상으로 다가갔지만, 그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책상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결국 붉으락푸르락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나쁜 자식.”
한 사장은 방금 옥상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요 며칠 수진의 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가 본의 아니게 태호와 수진의 대화를 모두 듣고 말았다. 감히 내 딸을 울리다니! 아무리 태호가 그룹 총수 강 회장의 아들이라도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에겐 수진밖에 없었다. 더욱더 높고 강한 자리에 앉으려는 이유도 수진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자신의 위치가 더 높아지면 수진에게 좀 더 나은 짝을 구해줄 수 있을 테니까. 태호가 수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그는 더는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오늘 태호가 수진에게 보인 태도를 보자면 오히려 적에 가까웠다.
“어디 두고 보자.”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수진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말 거다. 책상으로 돌아간 한 사장은 재빨리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지금 당장 표 과장 올라오라고 해.”
한 사장의 얼굴에 어둡고 음침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
“정말 오늘은 얌전히 잠만 잘 거야.”
리아는 룸미러에 비친 퀭해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어젯밤은 해도 해도 너무 했었다. 저녁도 건너뛰고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를 탐색했으니까. 무리도 그런 무리가 없었다.
“하, 전날에도 무리했는데…….”
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차에서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근육이 땅겨서 비명을 지를 테니까. 아침에도 출근 준비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몇 번이나 제자리에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태호는 그녀를 품에 껴안아 조심스럽게 일으켜줬다. 만약 태호가 옆에 없었다면, “아이고.” 하며 앓는 소리를 냈을 게 분명하다. 회사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이 행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대로 침대로 직행해서…….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 뜨겁고 거칠게 자신을 끌어안던 태호가 떠올랐다. 헐! 당황한 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 그런 침대 직행이 아니라, 잠만 자는 침대 직행을 말하는 거야! 틈만 나면 자꾸만 야한 쪽으로 흘러가려는 자신의 상상력을 탓하며 리아는 탁 소리가 나게 차 문을 닫았다. 동시에 차 키를 꽉 움켜쥐었다. 오늘 밤, 얌전히 잠만 자지 않으면 난 이제부터 ‘주리아’가 아니라 조리아’야.
“조. 리. 아.”
다짐하듯 입으로 소리 내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던 리아는…….
“……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