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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어흥’과 ‘야옹’의 차이 (67/81)

67. ‘어흥’과 ‘야옹’의 차이2021.10.20.

“내가 지금 남 끼니 걱정해줄 때냐고!”

모든 게 못마땅한 태희는 크게 소리 내어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에이.”

음식이 가득 담긴 종이 가방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저절로 신경질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무거운 거, 들면 팔 굵어지는데……. 태희는 진심을 담아, 태호의 신혼집을 쫙 노려보았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심부름을 해야 해?”

태희는 도무지 정 여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새언니를 떨떠름하게 여길 땐 언제고, 왜 이젠 못 챙겨줘서 안달이야! 이건 그녀가 까탈스러운 시누이라서가 아니다. 누구라도 이런 경우라면 똑같이 반응할 거로 믿는다. 태희는 씩씩거리며 종이 가방을 들고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문 앞에 놓고 가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우선 벨을 눌렀다. 집 안에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가긴 싫었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면 될 테니까. 그런데 몇 번이나 벨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직 퇴근 전인가? 태희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은 지나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회사 일에 열심이니까 어쩌면 야근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녀가 집 안까지 들어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와야 한다는 소리다.

“에이 귀찮아.”

태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문 옆에 설치된 패드에 비밀코드를 눌렀다. 그러자 덜컹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밖에서 보니, 집 안쪽으로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뭐야, 집에 아무도 없는데 훤하게 불을 켜놓은 거야?

“아니, 자기가 뭐 재벌인 줄 아나?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아껴 써야지!”

태호는 무서워서 찍소리 못하지만, 그래도 리아는 나중에 만나면 한 소리 해야겠다.

‘새언니, 그렇게 안 보였는데 사람이 참 헤퍼요. 전기 아껴야 하는 거 몰라요?’

“히힛.”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게 좋았다. 태희는 혼자 킥킥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훤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거실에 두고 갈까도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두 사람이 언제 올지도 모르니 번거로워도 냉장고에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괜히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면 억울하니까.

“……!”

주방 안으로 들어서던 태희는 앞에 펼쳐진 장면에 그만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손에 든 종이가방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혹시 헛것이라도 보았나? 태희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운만 입은 두 남녀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서로를 으스러지듯 꽉 끌어안고 있었다. 하, 이러느라 벨 눌러도 반응이 없었던 거야? 태희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실소를 내뱉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 입을 여는 순간 태호의 말소리가 들렸다.

“널 여기 혼자 두고 내가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어라? 이게 무슨 말? 태희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후끈 달아오른 신혼 커플 입에서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 정상은 아니니까.

“……흥, 그러기만 해봐.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널 다시 여기로 끌고 올 거니까.”

“이런…… 주리아, 이제 보니 집착이 심하네.”

심각했던 분위기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180도 바뀌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하나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어어? 아니, 왜 저래? 19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 연출되려고 하자, 태희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외쳤다.

“잠깐, 거기까지!”

  ***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태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네 목소리가 왜 여기서 나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서 있는 태희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잘못 본 게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는데 아니다. 정말로 말썽꾸러기 막내가 두 사람의 보금자리에 쳐들어와 있었다. 순식간에 태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벌어진 가운을 도로 여미며 험상궂은 얼굴로 태희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단 왜 남의 집에 막 들어와?”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면 그냥 돌아가면 될 것 아냐?”

“놓고 갈 게 있었다고!”

평소였다면, 태희는 ‘나 죽었소.’ 하고 꼬리를 내렸겠지만, 태호의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해서일까? 태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당당히 맞섰다. 호랑이 오빠가 새언니 앞에서 얌전한 고양이로 전락했으니까 말이다. ‘어흥’과 ‘야옹’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어머, 아가씨 왔어요?”

태희를 발견한 리아는 얼굴색 하나 붉히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가운을 여몄다. 역시 그녀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사실 21세기에 부부가 키스하는 모습 좀 들켰다고, 크게 당황할 것까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키스 다음에 어떤 단계로 넘어갈지는 누구나 아는 거니까.

“그래서 놓고 갈 게 뭐야?”

태호의 질문에 태희는 들고 온 종이가방을 건넸다.

“엄마가 새언니 챙겨주라고 음식 보냈어. 이번 일요일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거라고. 이것저것 새언니 좋아하는 거, 만드셨대.”

“정말요? 어머, 고마워라.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가방 안을 들여다보며 리아가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리아가 용기를 꺼내려 하자, 태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태희가 냉장고에 집어넣을 거야. 우린 침실로 가자.”

리아의 어깨를 감싼 태호는 매서운 눈으로 태희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태희가 분위기를 망쳤다는 것에 화가 난 표정이었다.

“아가씨 왔는데…….”

“괜찮아. 쟤가 우리랑 차를 마시겠어? 같이 저녁을 먹겠어. 그렇지?”

태호의 질문에 태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런 분위기에 다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기도 함께 저녁을 먹기도 그렇긴 하지.

“음식 다 냉장고에 넣고, 문 잘 닫고 가.”

말을 마친 태호는 그대로 리아의 어깨를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와!”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태희는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태희는 리아보다 태호가 백 배, 천 배는 더 얄미웠다. 여기까지 가져다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 해? 물론 리아는 정 여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겼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정 여사가 요리한 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까지 음식을 날라준 그녀가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엄연히 손님인데, 물 한 잔 얻어 마시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손해 보는 건 그녀였다. 태희는 빛의 속도로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핸드백과 재킷을 챙겨 집을 빠져나갔다.

“아우, 왕짜증.”

태희는 툴툴거리며 빠르게 차 문을 열었다. 그때 그녀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널 여기 혼자 두고 내가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태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별안간 죽는다는 말은 왜 나온 거지? 설마, 오빠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순간 덜컹 심장이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뭔가 그럴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그래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거였나? 태희는 걱정된 얼굴로 태호의 신혼집을 바라보았다. ***

“남 비서, 잠시 나 좀 봐.”

오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태호가 남 비서를 집무실로 불렀다.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오자, 태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리아가 나 미국 지사에 있을 때 지사장이었던 정 대표님과 연락하는지 알고 있나?”

“갑자기 그건 왜요?”

“아,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일을 리아가 알더라고. 지사장님 밖에 모르는 일인데…….”

“글쎄요. 식품 박람회에서 안면을 튼 건 같긴 한데, 따로 연락할 사이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태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아닐 텐데…….”

어제 리아의 태도로 봐선, 쉽게 알려주지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리아 말대로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무실을 나가던 남 비서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등을 돌려 태호를 바라보았다.

“저 그때 한수진 씨, 미국에서 어학연수 하지 않았습니까? 유학 갈 것도 아니면서 대학 다 졸업하고 무슨 어학연수냐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나?”

태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혀 관심이 없으니, 수진이 미국에 언제 어학연수를 갔는지 알리도 없었고, 알았다고 해도 기억할 리 없었다.

“음, 제가 알기론 그때 지사장님과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그런 걸로 아는데요. 한 사장님이 수진 씨 부탁한다고 지사장님께 계속 연락하고 그랬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수진은 사고 소식을 지사장을 통해서 우연히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가 왜 난데없이 리아에게 말한 걸까? 당사자를 만나서 물어볼까? 하지만 수진이 이야기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불필요하게 그녀를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때 책상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든 태호는 발신자 이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수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평상시라면 수진의 전화를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긴 태호는 말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강태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잠깐 볼 수 있을까?]

건너편에서 착 가라앉은 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수진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나길 원했지만, 태호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사내 옥상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와 음료수를 앞에 놓고 한가하게 앉아서 이야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세상 어떤 여자와도 그럴 마음은 없었다. 리아를 제외하곤 말이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먼저 도착한 수진이 태호를 보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태호는 수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설치된 유리 난간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함께 벤치에 앉을 일은 없으니까.

“할 이야기란 게 뭐야?”

수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가 차갑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수진에게선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태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긴장했는지, 수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수진을 바라보는 태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꾸준히 상대는 바뀌었지만, 잊을만하면 마주하게 되던 모습이었다. 대부분은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여자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어쩌다 가끔, 비리가 탄로 난 간부 직원에게서도 나타났다. 다짜고짜 수진이 사랑 고백을 할 리는 없고, 한 사장의 비리가 탄로 났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했나? 이유야 어찌 됐듯 태호에겐 성가신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수진이 말을 꺼내지 못하자, 태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유리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볼게.”

“……태호야.”

태호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제야 굳게 닫힌 수진의 입이 열렸다.

“말해.”

“……너, 리아를 믿니?”

“뭐?”

태호는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닌가 보다. 수진은 태호를 빤히 바라보며 또박또박 힘을 주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 리아를 믿니? 리아를 믿을 수 있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태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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