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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이제 보니 집착이 심하네. (66/81)

66. 이제 보니 집착이 심하네.2021.10.17.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거친 물줄기가 욕실 안을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채웠다.

―넌 이미 샤워했으니까 나 그냥 혼자 할게.

함께 샤워하자는 태호를 물리치고, 혼자 욕실로 들어선 리아는 샤워볼에 보디샴푸를 덜어 몸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아야.”

거품을 문지르던 손이 어깨 부근에서 멈췄다. 어젯밤 무리한 탓에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 있었다. 그래서인지 손을 뒤로하자, 뭉친 근육이 땅기며 아팠다. ‘함께 샤워했으면 태호가 시원하게 주물러주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드는 동시에, 기이하게도 어깨를 누르는 그의 손길이 살갗에 느껴졌다. 그리고…….

“앗!”

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태호의 손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방금까지 아팠던 부분에 고통 대신 쾌감이 번졌으니까. 얼굴은 또 왜 이리도 빨개지는지……. 높은 온도 때문인지, 불순한 상상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아후, 주리아, 너 왜 이러니!”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불끈불끈 불타오르는 자신을 탓하며 다시금 샤워볼을 문질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욕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태호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리 와. 머리 말려줄게.”

그는 리아의 팔을 잡아 화장대로 이끌고 의자에 앉혔다. 마른 타월로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위이잉―. 리아는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과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아, 너무 좋아. 머리카락과 얼굴에 닿는 손길이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머리카락이 다 마르자, 그는 브러시를 들고 조심스럽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럭셔리 스파에서 전문인에게 풀 서비스를 받는 느낌이랄까?

“너무 무리하지 마.”

가운 밖으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살며시 입술이 닿는 정도의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리아의 몸은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직도 샤워로 인한 열기가 몸에 남은 탓일 것이다.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 있어. 특히 여기…….”

브러쉬를 내려놓은 태호는 리아의 어깨와 목 사이 부분을 꾹 눌렀다.

“아앗……!”

리아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손을 치우기는커녕, 더욱더 힘을 주어 아픈 부분을 압박했다.

“뭉친 거 풀어줄게. 조그만 참아.”

“……응.”

리아는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서 비명 지른 게 아닌데……. 너무 좋아서 지른 건데……. 하지만 리아는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깨와 목 사이를 누르던 손길은 어느새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하, 어쩌면 좋아? 근육을 풀어주는 손놀림이란 걸 알면서도 리아는 머리가 핑 돌며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화장대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태호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보이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가슴이 뛰었으니까. 분명 처음엔 머리카락만 말려주고 끝낼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계획된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리아의 어깨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있는 걸 보자,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마사지를 해주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렇게 좋은 걸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다니! 오랜 시간, 연인으로 지냈어도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앗, 잠깐만……. 거긴 안 돼. 간지러워. 큭큭.”

어쩌다 간지럼 타는 부분을 건드렸는지, 리아는 몸을 비틀었다. 그 탓에 그녀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태호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헉, 이런……!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태호는 크게 미간을 찌푸려졌다. 그녀를 껴안는 순간, 지금까지 꼭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오늘은 그녀를 쉬게 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태호는 리아의 어깨를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돌렸다. 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기로 가득한 짙은 태호의 눈빛이 뚫어지듯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지금 여기서? 걷잡을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리아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살며시 뺨을 만지는 것뿐인데도 그의 간절한 욕구가 그녀에게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리아는 태호를 향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입술이 깊숙이 맞물렸다. 화장대에 몸을 기대어 중심을 잡은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더는 가깝게 닿을 수 없을 때까지. 온종일 떨어져 있던 시간을 만회라도 하듯 뜨겁고 아주 격렬하게.  

  *** 한참 후에야 후끈거리던 열기가 가라앉았다. 말할 기운도 남지 않은 리아는 인형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 태호에게 몸을 맡겼다.

“배고프지? 저녁 먹자.”

“응.”

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일랜드 앞에 리아를 내려놓은 태호는 저녁을 준비하려는지 찬장으로 걸어갔다. 리아는 바 스툴에 앉아 태호의 널찍한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찬장을 열 때마다 가운 밑에서 근육이 불끈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쩜 뒷모습마저 저리도 예술일까? 리아는 아일랜드에 팔꿈치를 올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로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호는 찬장에서 식자재를 꺼내, 조리대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조리대에 쌓여가는 식자재를 보니, 절대로 라면을 끓이거나 즉석식품을 데워먹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그냥 간단하게 먹자.”

“간단하게?”

“응.”

아무리 그가 체력이 좋다곤 하지만, 방금 그렇게 무리하고선 다시 거창하게 저녁상을 차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주말도 아니고 주중인데……. 그럴 힘이 있으면 다른 곳에 쏟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배는 고팠지만, 가운 차림의 남편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다른 충동이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하, 정말 답이 없다. 리아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축 처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으면서, 그새 기운 좀 차렸다고 딴생각을 한다니…….

“글쎄…….”

간단하게 먹자는 말에 태호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운이 벌어지며 태호의 매끄러운 근육이 힐끗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살짝살짝 드러나는 모습이 더 야하고 자극적인 걸까? 리아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런데 말이야.”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태호가 무심한 말투로 지나가듯 물었다.

“교통사고 이야기, 누구에게 들었어? 언제 알게 된 거야?”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아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가 미국에서 교통사고 당한 거, 누구에게 들었지? 그거 아버지 빼곤 가족도 모르는 일이거든.”

“아, 그거?”

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어. 엊그제…….”

“수진이 만났다가 들었어.”라고 말하려던 리아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듯 물어봐서 그대로 말해버릴 뻔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호는 냉장고에서 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리아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태호를 빤히 바라보면서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진이라고 고자질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해줬든 간에,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리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사실이다. 누구에게 들었건, 그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보단 네가 죽을 만큼 괴로워했다는 거, 깊게 상처받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리아야.”

“난 그때!”

태호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리아는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내 아픔만 보고 너의 아픔은 보지 못했어. 바보처럼 눈이 멀었던 거야.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내가 얼마나 너에게 상처를 줬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난 내 사정만 살피느라…….”

그 순간을 떠올리려니, 다시금 울컥해졌다. 리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태호는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헤어지던 그 날은 달랐다. 그녀를 보낼 수 없다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었다.

―태호야, 제발 현실을 깨달아. 우리는 결코 맺어질 수 없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어야 끝이 난다고.

그때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리아는 벌떡, 바 스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태호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 반동으로 태호는 뒤로 밀리며 냉장고 문에 등이 닿았다.

“리아야?”

그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리아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등 뒤로 손을 둘렀다.

“……미안해. 태호야.”

작은 속삭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헤어지는 게 아니었어. 다 내 잘못이야.”

조금만 더 견디었어야 했다. 조금만 더 강했어야 했는데…….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두 사람을 갈라놓은 아픔의 시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후.”

말없이 리아를 내려다보던 태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리아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땐 그게 맞는 거였어. 그때 헤어졌기 때문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랬을까? 그때의 아픔은 지금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을까? 리아는 고개를 뒤로 젖혀 태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태호야. 그때도 지금도.”

“알아.”

다정한 그의 눈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물론 말로 하지 않아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이다. 그녀도 이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듯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었다.

“그때 정말로 죽으려고 했던 거 아니지?”

“아니라고 했잖아.”

태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리아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힌 다음, 그녀의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게 했다.

“내가 널 두고 죽긴 왜 죽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뺨에 닿은 입술은 미끄러지듯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앞으로 끌어당기자, 두 사람의 몸이 더욱더 가깝게 밀착되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하나로 연결되기라도 하듯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그녀를 껴안은 채 태호가 입을 열었다.

“널 여기 혼자 두고 내가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천국에 간다고 해도 그에겐 지옥이 될 것이다. 그녀가 없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천국이니까.

“……흥, 그러기만 해봐.”

투덜거리듯 리아가 되받아쳤다.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널 다시 여기로 끌고 올 거니까.”

“이런…… 주리아, 이제 보니 집착이 심하네.”

그가 약 올리듯 속삭이며 살며시 입술을 겹쳤다. 리아는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목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키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운이 벌어지며 뜨거운 가슴이 맞닿았다. 마치 심장이 닿은 것처럼, 서로의 심장박동이 같은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서서히 거세게 출렁이는 감정의 물결이 다시금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문득 ‘이러다 저녁은 언제 먹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떨쳐버렸다. 한 끼 굶는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문제는 한 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게 문제다. 그래도 지금의 이 한껏 고조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잠깐, 거기까지!”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두 사람은 입술을 떼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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