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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울어도 좋아. (65/81)

65. 울어도 좋아.2021.10.13.

“이럴 줄 알았어.”

점심시간에 회사로 찾아온 유정은 리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밤잠을 설친 것처럼 리아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수진이 때문에 잠 못 잤구나.”

못 잔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지만, 리아는 아무 말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유정은 안쓰럽다는 얼굴로 리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너, 울었니?”

빨개진 눈도 눈이지만, 눈덩이가 부어 있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해만은 아니다. 새벽녘에 거세게 몰아붙인 태호를 끌어안고 결국엔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감당할 수 없게 자극 받게 되면 눈물샘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어제서야 알게 되었다.

―괜찮아. 울어도 좋아.

환희에 휩싸여 흐느끼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며 그가 속삭였었다. 어쩌면 그리도 잘하는지. 물론 태호 말고는 경험이 없었기에 정확하게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러나 꼭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울긴…….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내젓던 리아는 목에 통증을 느끼고 일순 표정을 굳혔다. 흑, 여기저기 안 쑤신 곳이 없었다. 어젯밤 등산한 것처럼 체력을 소모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에 충분히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운동할 때와는 다른 근육을 사용했거나……. 리아의 굳은 표정에 유정은 말 안 해도 안 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수진이가 너보고도 절교하자고 했구나. 맞지?”

“유정아, 너에게도 그랬어?”

“응.”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모네이드를 쭉 들이켰다.

“갑자기 한밤중에 전화해선, 리아, 네가 어떻게 자기에게 그럴 수 있냐고 하소연을 하더라고. 한잔했는지 완전 술에 취한 목소리였어.”

리아는 잠자코 유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 했던 소리 하고, 또 해서 내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너랑도 이젠 끝이야!’하고 빽 소리 지르더니 끊더라.”

생각보다 수진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지만 수진이 친구 간의 신뢰가 깨졌다고 여긴다면 리아로선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하긴 했지. 너희를 감쪽같이 속인 게 됐으니까. 유정아, 너한테도 미안해.”

그 말에 유정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수진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야,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유정은 전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막말로 수진이랑 너는, 학교 다닐 땐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친하지 않았잖아. 사실 너, 대학 다닐 때 친한 애가 있긴 했었니? 태호랑 연애하느라 정신없었지.”

그렇긴 하다. 과 친구들과 친해진 건, 오히려 졸업하고 나서다. 친구 챙기기에 열심인 유정 혼자서만 먼저 리아에게 연락하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유정아, 솔직히 그때 너랑 친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비밀로 했을 거야.”

“알아, 알아. 괜히 나한테 말했다가 수진이가 알게 되면 안 되잖아. 수진이 아버지, KJ 사람인데……. 너무 위험하지.”

“수진이도 너처럼 이해해주면 좋은데…….”

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유정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리아는 수진이 태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살짝 귀띔해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게 아니기에 유정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정이 생각하기엔 수진은 태호를 좋아하는 게 맞았다. 리아를 만나기 전, 이미 수진은 태호를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말했다. 말로는 재수 없다면서, 기회만 있으면 태호 흉을 보기 바빴지만……. 그건 다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려는 연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히려 좋아하면 못살게 구는 초등학생처럼 말이다. 입으로는 안 좋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태호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 수진의 눈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가끔은 발그레하게 뺨을 물들이기도 했었다.

“자, 그만하고. 어서 먹자.”

유정은 처진 분위기를 바꾸려 활짝 웃으며 포크를 집었다. 리아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포크로 토마토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유정과 헤어지고 회사로 들어온 리아는 말없이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친구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유정에게도 절교 선언을 한 것을 보니, 심각한 것 같긴 한데……. 수진에게 전화하려던 리아는 끝내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와 연락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더욱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우선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금은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겠지만, 진정한 친구라면 결국엔 리아의 처지를 이해해 줄 테니까. 휴대폰을 내려놓은 리아는 회의에 참석하려 파일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이사님, 무슨 일 있으시죠.”

남 비서는 무서울 정도 업무에 집중하는 태호를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일은 무슨 일?”

태호는 남 비서를 쳐다볼 시간도 없다는 듯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호는 휴식도 없이 빠른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점심도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그러니 남 비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커피라도 드시고 천천히 하십시오.”

“고마워.”

이번에도 태호는 남 비서을 쳐다보지 않은 채, 앞에 내려놓은 커피 잔에 손을 뻗었다. 서류와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며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갔다. 오늘 태호는 피곤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분명 뭔가 있는데……. 하지만 태호가 아무 일 없다고 한다면 아무 일 없는 거다. 다시 묻는다고 대답해 줄 태호도 아니기에 남 비서는 빈 잔을 챙기고 얌전히 물러났다. 남 비서가 집무실을 나가자, 태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오늘은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선 리아의 향이 가득한 집으로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는 집에 없겠지만, 그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을 테니까. 순간 갑자기 눈처럼 하얗고 부드럽던 피부의 감촉이 떠오르자, 태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손끝에 닿던 살결이 얼마나 매끄럽게 감기던지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붉게 물들이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느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결점 하나 없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매우 무례한 짓이다. 어떻게 보면 범죄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자꾸만 하얀 살결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태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면 일을 할 수 없는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번 떠오른 영상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결국 태호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햇살이 흘러드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오후의 햇살임에도 왠지 모르게 몸이 노곤하지는 건, 분명 어젯밤 때문일 것이다.

“후우.”

태호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길! 단순한 상상만으로 잠자고 있던 욕구가 꿈틀거리며 자잘한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걸,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니……. 우습지만, 태호는 그런 자신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20대 혈기 왕성한 시절, 손끝만 닿아도 숨이 탁탁 막히게 감각이 폭발하던 시절. 꽤 큰 인내심이 요구됐었다. 하지만 모두 리아를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는 인내할 필요가 없으니, 폭주한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어젠 너무 무리하게 몰아붙였으니까, 오늘은 쉬게 해줘야겠지? 어쩌면 지금 리아는 근육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밤은 대신 마사지해줄까? 크림을 듬뿍 바르고 구석구석 뭉친 근육을 풀어주다 보면……. 이런! 분명 건전한 장면을 상상했는데, 저도 모르게 근육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제길.”

태호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앞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제시간에 퇴근하려면, 잠시라도 리아를 머릿속에서 밀어내야겠다.

  ***

“에에? 엄마,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태희는 원망스럽다는 얼굴로 정 여사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엊그제만 해도 막내딸이 최고라던 정 여사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싹 바뀌어버렸다. 정 여사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 올 것 같은 싸늘한 얼굴이었다.

“네가 한 실수를 알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정 여사는 말끝마다 태희가 저지른 실수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그 실수 덕분에 태호와 리아의 관계가 밝혀진 건데, 정 여사는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렇다고…… 흑.”

태희는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이면 정 여사는 대부분 못 이기는 척, 한걸음 물러서 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영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엄살 부리지 말고, 어서.”

정 여사의 태도가 쉽게 변하지 않자, 결국 태희는 빽 소리를 질렀다.

“싫어. 직원들 시켜. 나, 바쁘다고.”

“바쁘긴 뭐가 바빠. 예전엔 네가 자청해서 가곤 했잖아.”

태희가 거절하든 말든, 정 여사는 음식이 든 가방을 억지로 태희에게 안겼다.

“가서, 둘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와.”

오늘 정 여사는 특별히 리아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했다. 저번 일요일에 리아를 돌려보내고 통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따로 만나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자신은 시어머니, 리아는 며느리였다. 괜히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편한 관계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다. 리아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정 여사는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차갑게 대할 땐 언제고, 태호와 연인이었다고 갑자기 다정하게 구는 것도 좀 우습다. 그래도 챙겨주고 싶은 건 있어서, 최고의 셰프를 불러 이것저것 요리를 만들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면, 며느리 사랑은 시어머니가 되지 말란 법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음식을 가지고 가면 부담스러울 테고, 그렇다고 직원을 시키자니 성의 없이 느껴질 것 같고. 그렇다면 음식을 가져다줄 상대로 태희가 딱 좋았다.

“좋은 말 할 때, 가져가. 안 그러면 태호에게 다 말해버릴 거야.”

“엄마!”

태희는 정 여사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엄마가 이렇게 배신을 때려?”

“됐어. 어서 가.”

정 여사는 황당하다는 바라보는 태희의 등을 세게 떠밀었다. *** 두 눈이 감길 정도로 피곤했지만, 리아는 모든 업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가했다. 오늘은 얌전히 잠만 잘 것. 현관문을 열기 직전, 리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먼저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침실 문이 열리며 갓 샤워를 마친 태호가 걸어 나왔다.

“왔어?”

그는 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 고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편을 어떻게 그만 놔둬! 그가 앞에 다가선 순간, 리아는 뛰어오르듯 태호의 품에 뛰어들었다. 반나절 보지 못했다고, 이렇게 반가울 수 있는 건가? 그저 끌어안기만 해도 눈물 나게 좋았다. 태호는 허리에 팔을 감아 번쩍 안아 들고는, 그녀를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게 했다.

“오늘 괜찮았어?”

그가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뭐가?”

“아프지 않았어?”

“아…….”

물론 아프다. 현관문을 열면서도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를 보는 순간, 모든 통증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근육 뭉쳤을 거야. 내가 풀어줄게.”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아.”

슬쩍 쓸어내렸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통증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샤워부터 같이할까?”

샤워부터? 정말 순순히 샤워만 같이하자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전날 마신 술은 다시 술로 해장해야 한다는,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오늘은 얌전히 잠만 잘 거라고 계획하고 다짐했는데……. 하지만 단단한 품에 안긴 순간, 이미 그녀의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간 상태였다. 리아는 다가오는 태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뭐 중요할까. 계획은 바뀌기도 하는 거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다가온 입술이 뜨겁게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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