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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왜? ……싫어? (64/81)

64. 왜? ……싫어?2021.10.10.

“하아.”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낸, 리아는 양손으로 매달리듯 태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태호야, 내가 너 평생 책임질게.”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태호의 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는 너,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

무슨 소리야? 아프게 하지 않겠다니? 태호는 리아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아프게 한 적 없었으니까. 주리아는 그의 단조로운 인생에 유일한 기쁨이자, 행복한 미래였다. 헤어질 때조차도 사랑스러웠는데…….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날 아프게 해?

“리아야, 넌 한 번도…….”

하지만 태호는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리아가 다시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쳤기 때문이다. 한껏 감정이 고조된 탓일까? 평소와 다르게 리아는 꽤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한 치의 빈틈없이 격렬하게 파고들었다. 물기 어린 숨결이 부딪칠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마음 같아선 좀 더 깊게 좀 더 거칠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행위의 끝이 어디를 향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기에……. 태호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리아를 진정시켜야 한다. 그러나 반항은 잠시뿐, 말캉한 입술이 깊숙하게 파고들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뜨겁게 잦아드는 공격에 이성이 마비되었다고나 할까? 호흡이 진득하게 섞이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리려 입술을 떼는 순간, 태호는 재빨리 리아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만.”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시 입술이 겹치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요 며칠 얼마나 힘겹게 참았는데……. 처음이기에 더더욱 신경 써서, 좀 더 특별하고 근사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허무하게 유혹에 무너지면……. 하지만 이번에도 반항은 잠시뿐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아의 모습에 다시금 마음이 흔들렸다.

“왜? ……싫어?”

키스로 촉촉해진 입술과 의아함을 담은 커다란 눈동자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그녀 얼굴에 실망이 번지는 순간, 애써 잡아두었던 이성의 끈이 풀리고 말았다.

“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너무 좋아서 문제다. 이번에 그가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으며 깊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어쩔 수 없다. 이젠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멈출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러기에는 참고 참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한번 터져버린 욕망은 무서운 속도로 온몸을 잠식해 나갔다. 어떻게 침실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두 사람은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태호의 속삭임에 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유혹의 끝자락 바로 앞에까지 다다랐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리아는 슬쩍 뒷걸음치곤 했었다. 아직 학생 신분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나날이 나빠지는 양가의 관계도 그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땐 용기가 없었다.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완전하게 맺어질 용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리아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그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겨냈다. 그리고 불빛에 드러나는 탄탄한 어깨에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보여줄게. 내가 얼마나 널 원하는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넌 내 남자야.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부드럽게 상체를 쓰다듬던 손길이 아래로 향하자, 태호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 당황했는지,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침대에 누웠으면서도 어떻게든 열기를 식히려던 중이었는데, 그만 그녀가 불길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좋아, 그렇다면…….

“여기부턴 내가 할게.”

그녀의 손길을 거둔 태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스탠드에 손을 뻗었다. 어둠이 내린 침실에서 오로지 소리만 들리기 때문일까? 부스럭,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리아의 입에선 저절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준비를 끝낸 그가 다시 침대로 돌아오자, 리아는 활짝 팔을 벌려,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코끝에 훅, 느껴지는 짙은 살냄새와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촉촉한 입술. 모든 게 너무 좋았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쿵쿵,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리아는 태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널찍한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끈한 등 근육 감촉에 손끝이 저릿해지고,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찾자, 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달콤하고 뜨거운 불꽃이 화르르 온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아, 어떻게 그를 떠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나 좋은데……. 부딪치는 입술 사이로 진득하게 숨결이 흘러들었지만, 집어삼킬 것 같은 욕망에 끊임없이 목이 말랐다. 이 끝없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리아야,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듯 낮은 속삭임이 귓속에 흘러들었다. 조금 긴장은 했지만, 뒤로 물러설 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단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끝내고 싶었다.

“……계속해줘.”

이윽고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사랑의 행위는 끝을 향해 다가갔다. 어쩌면 조금은 격렬하게, 하지만 다치지 않게 소중히, 조심조심, 한 단계, 한 단계. 잔잔한 바다 위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파도에 흔들리듯 이리저리 감정이 뒤섞이며 열띤 흥분이 서로를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전율이 온몸에 퍼지자, 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넓고 단단한 등에 손톱을 세웠다.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하아,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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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진아, 무슨 일 있었니? 네가 웬일로 혼자 술을 다 마셔?”

밤늦게 귀가한 한 사장은 거실에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켜는 수진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수진은 여간해선 혼자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즐기는 술은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맥주나 와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마시는 술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위스키였다. 게다가 분위기가 왜 저래? 한 사장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처져 있는 수진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빠.”

한 사장이 다가오자, 수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수진아!”

눈물로 흠뻑 젖은 수진의 얼굴을 본 한 사장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와 수진 앞에 무릎을 굽히고 양손으로 수진의 얼굴을 감쌌다.

“너 지금 우는 거야?”

“흐흐흑, 아빠.”

한 사장의 물음과 동시에 소리 죽여 울던 수진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수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 사장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 장례식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수진은 이렇게까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한 사장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감히 누가 내 딸을 울려! 얼마나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왜 그래, 수진아? 무슨 일이야? 응?”

“……아빠, 흐흑.”

“울지만 말고 말을 해. 말을 해야지 아빠가 어떻게든 해주지.”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수진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서글프게 흐느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 사장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수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태호가……. 흐흐흑, 아빠. 태호가…….”

“응? 강 이사가 왜?”

태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한 사장은 크게 미간을 좁혔다. 사실 요새 태호 쪽의 동태가 평소와 달라,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혹여 이번에 발생한 사고 뒤처리 과정에서 태호가 한 사장이 저지른 비리를 알아낸 건 아닐까, 유의하며 주시하던 참이었다. 몇 번이나 울음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수진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태호랑 리아랑, 예전부터 연인 사이였대. 기사에 나온 거, 그게 모두 사실이래.”

“뭐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에 한 사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 리아는 태호의 품에 안긴 채 여명이 밝아오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 미쳤다! 어쩌다 보니, 밤을 새우고 말았다. 도중에 잠깐 눈을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밤을 새운 거나 다름없었다. 구미호라는 별명답게 태호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녀를 밀어붙였다. 한마디로 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포효하는 호랑이 같았다. 어찌나 격렬하게 다가오던지, 커다란 알래스카 킹사이즈 침대가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리아 역시 부끄러운 척, 좋으면서 아닌 척, 처음이라 서투른 척,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리아는 실전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이론엔 강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전혀 아닌가 보다. 태호는 밤새도록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형태로. 이러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참았는지 모르겠다.

“후우.”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나른하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 해도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와 달리, 태호는 고른 숨을 내쉬며 빠르게 단잠에 빠져들었다. 출근해서 제대로 일하려면 지금에라도 잠을 청해야 하는데……. 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태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생긴 남편을 끌어안고 어떻게 잠이 오겠어, 잠이? 어차피 잠들긴 글렀으니, 잘생긴 얼굴 감상이나 할까? 리아는 품에서 벗어나,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잠든 태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엔 한 마리 호랑이처럼 침대에선 날뛰던 남자가 지금은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처럼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숨결이 흘러나올 때마다 살며시 열리는 입술이 못 견디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자는 모습마저 이렇게 잘생겼을까! 아아,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리아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태호의 매끈한 콧날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 연한 숨결을 흘리는 입술에 손등을 가져가 보았다. 손등으로 닿는 더운 숨결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키스해버릴까?’라는 유혹과 ‘곤히 자는 사람, 귀찮게 하면 안 돼.’라는 바른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여기서 그를 다시 깨웠다간, 정말 밤을 하얗게 새우는 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자리에 누우려던 리아는 도로 몸을 일으켜 태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잘생긴 남편을 그냥 바라만 보는 건, 낭비가 아닐까? 그때였다. 감긴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며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까지 감상할 거야?”

갓 잠에서 깬 듯 잠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리아는 황급히 몸을 눕혔지만, 애석하게도 너무 늦고 말았다. 태호는 리아의 허리를 손으로 감은 채 옆으로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그의 아래로 빨려 들어간 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재우려고 했는데…….”

그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 위로 투덜거렸다.

“……아니, 나는…….”

몰래 키스하려던 것을 아는 것처럼 그는 리아의 턱을 잡고 베어 물듯 입을 맞추었다. 갓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짙고 깊은 키스였다. 입술을 떠난 열기는 서서히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리아는 그저 키스만 하려고 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목덜미를 거친 입술이 더 아래로 향하려 하자, 리아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저기, 잠깐만.”

하지만 정말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뜨거운 시선에 곧 마음이 흔들렸다.

“왜? ……싫어?”

보기 좋게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녀 눈에는 왜 이리도 멋져 보이는지……. 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는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숨결이 하나로 섞이며 빠르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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