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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평생 책임질게. (63/81)

63. 평생 책임질게.2021.10.06.

“너, 태호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 알고 보니, 그거 다 너 때문이었네.”

“뭐?”

태호가 죽으려고 했었다니.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었다고? 강한 충격에 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구나.”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하게 설명해봐.”

리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수진은 쉽게 대답해 줄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아픈 만큼 리아도 아팠으면 좋겠으니까. 하고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주리아일까?

“수진아, 제발…….”

애원하는 것 같은 리아의 말투가 더욱더 화를 불러일으켰다. 태호가 어떻게 되든 말든 헤어질 땐 언제고. 그리고 헤어졌으면 끝까지 헤어졌어야지, 왜 다시 합치고 난리냐고!

“태호, 해외 지사에서 근무할 때 별명이 뭐였는지 아니?”

물론 리아는 모를 것이다. 그 당시 태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수진뿐이었으니까.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호를 잡았어야 했는데……. 왜 언젠가는 태호가 나를 바라볼 거라고 마음을 놓고 있었을까. 수진은 안일한 자신을 꾸짖었다.

“유령이었어. 마치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이었거든. 끼니도 챙기지도 않고 일에만 매달려서, 지사장이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간 적도 있었대.”

몰랐다. 정말 몰랐다. 리아는 태호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후, 해외 지사로 나간 줄 알았다. 먼 타국에서 그런 모습으로 지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태호와 헤어진 후, 힘든 기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옆에는 민수도 있었고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자, 리아는 두 손을 꽉 잡으며 수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사고가 났어. 태호가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해서 강 회장님 빼곤 가족 아무도 모르더라.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었지.”

“사고라니, 무슨 사고?”

“교통사고였어. 한밤중에 태호가 몰던 차가 절벽 안전대를 들이받고 추락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췄어. 당시엔 경찰이 급발진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닌가, 주위에서 수군거렸었어.”

리아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질 때마다, 수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아파해. 너도 아파해야 해. 내가 아픈 것만큼.

“꽤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겉은 멀쩡했어. 뇌출혈만 있었던 모양이야.”

“뇌출혈?”

“응. 그래서 저번 공장에서 사고 났을 때, 어느 곳보다 뇌를 중점적으로 검사한 거야. 뇌출혈 경험이 있으니까.”

“아!”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하자, 리아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였나? 갈비뼈가 다쳤다고 하면서 일주일이나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이것저것 검사하기에 뭔가 이상하다 했다.

“너도 참 이기적이다. 그렇게 세상 끝난 것처럼 시끄럽게 헤어져 놓고선, 어떻게 다시 합칠 생각을 하니? 예전엔 부도나서 헤어진다더니, 이번엔 부도나서 결혼한다고?”

속이 문드러진 수진은 한껏 비아냥거렸다.

“아, 맞다. 너, 태호가 강수미와 스캔들 일으키는 것도 보고 있었잖아. 역시 재벌들 세계는 그런 건가? 아내 있는 남자가 옆에 애인 끼고 두는 거 괜찮아?”

“그런 거 아냐.”라고 말하려던 리아는 혀끝을 깨물었다. 수진이 아버지 한 사장과 강수미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나중에 곤란한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수진은 자신의 공격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승리의 미소를 떠올렸다.

“미안하다. 여느 친구처럼 너희 둘, 축복해주지 못해서. 유정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릴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너희 둘 어차피 얼마 못 가서 깨질 거야. 넌 다시금 태호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할 말을 모두 끝낸 수진은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인제 그만 보자.”

태호가 사랑하는 여자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리아 앞에서 웃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태호와 헤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수진아.”

“나, 뒤로 호박씨 까는 애, 친구로 둘 생각 없어. 네가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언젠가는 갈라질 사이였다. 사랑하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 관계라니……. 하, 코미디가 따로 없다. 수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피숍을 걸어 나갔다. 리아는 자리에 앉은 채, 창밖으로 멀어지는 수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 사장의 비리가 폭로되면 한번은 수진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 수진은 정말로 절교할 생각일까? 수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 관계를 끝낸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어 천천히 물을 마셨다. 하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

“표정 좀 푸세요.”

태호 앞으로 서류를 내려놓으며 남 비서가 낮게 투덜거렸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어보던 태호가 고개를 들어, 남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자, 남 비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사님이 꼭 직접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내가 해야지, 이걸 누구 손에 맡겨?”

될 수 있으면 빨리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싶지만, 쌓인 업무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녁도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때우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데도 말이다.

“후우.”

태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서류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자꾸만 리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일을 방해했다. 온종일 그랬다. 그러니 제대로 업무가 진행될 리 없었다. 그러다 결국 회사에 남아, 밀린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어젯밤, 리아는 여느 때와 달랐다. 작은 손길에도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고 겹쳐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은 곧 해답을 찾았다. “꽉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말 때문에 긴장한 게 분명했다. 말할 땐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어영부영 첫날밤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월요일 밤에……. 아무래도 주말이 나을 것이다. 주치의는 회복 경과가 빠르다며, 이젠 평소와 같이 행동해도 문제없을 거라고 진단을 내렸다. 마음 같아선 그 말을 듣는 순간, 당장 집으로 달려가 리아를 침대로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참았는데, 그 며칠을 못 기다릴까. 곧 리아와 함께 보낼 특별한 밤을 생각하자, 숨이 막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태호는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며 한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긴장되냐고? 물론이다. 쉽게 믿지 못하겠지만, 그의 인생에 여자라곤 리아밖에 없었다. 첫 키스도 그녀였고, 첫사랑도 그녀였다. 그의 모든 처음은 리아와 함께했다.

“제길.”

태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거칠게 서류 파일을 옆으로 밀쳐냈다. 그녀와 나눈 첫 키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주치의에게 완치 판정을 받은 다음부턴 하루에도 몇 번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주말엔 어느 별장으로 갈까? 바닷가가 좋을까? 아니면 산이나 계곡? 호숫가도 괜찮긴 한데……. 촛불과 와인, 장미꽃잎 등등, 로맨틱 분위기를 살릴 소품은 많았지만, 리아는 분명 21세기에 이 무슨 촌스러운 짓이냐며 한 소리 할 게 뻔했다. 드디어 검토할 마지막 서류를 끝낸 태호는 파일을 덮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 비서, 이만 퇴근하지.”

남 비서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태호는 그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흔들어 보이곤, 급히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리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을 꺼두었는지 곧바로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차에 올라탄 태호는 계기판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어쩌면 리아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잠든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예전엔 멀리서나마 리아의 모습을 보겠다고, 참석할 필요 없는 세미나에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과 다름없었다. 급히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하니, 어두운 실내가 그를 맞이했다. 역시 먼저 잠든 게 모양이다. 하지만 불을 켜는 순간,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소파에서 잠이 든 줄로만 알았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리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으로 다가간 태호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리아야?”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움찔하더니,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태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두 눈은 빨개져 있었고, 촉촉한 눈물 자국으로 물든 뺨은 전등 빛에 반짝거렸다.

“너……?”

리아가 울고 있었다. 덜컹, 태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리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의 등 뒤로 팔을 두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태호야. 나, 너무 이기적이지, 그렇지?”

집에 돌아온 리아는 수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태호가 먼 타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속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더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고 있었다니. 리아는 자신이 정말 나쁜 여자가 된 것만 같아……. 아니, 사실은 정말로 이기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리아가 운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은데, 그녀의 입에서 자꾸만 기가 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죽고 싶을 만큼?”

그녀도 그랬다. 많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죽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알았다면,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그때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더라면……?

“아!”

리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태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리아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너, 죽으려고 절벽으로 차 몰았었다며. 미국에 있을 때. 아니야?”

그제야 태호는 리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해외 지사 근무 시절에 일어난 교통사고에 관해 알게 되었나 보다. 그때 일은 강 회장밖에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리아에게 말해준 걸까? 그리고 죽으려고 절벽으로 차를 몰았다니.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그건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다. 분명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만, 리아를 혼자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주원식품 부도 위기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캐긴 바쁘던 시기이기도 했다.

“리아야,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읍.”

하지만 다음 말은 입술을 겹쳐오는 리아 때문에 다시 입 안으로 묻히고 말았다. 리아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부드럽게 얽히는 것 같으면서도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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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낸, 리아는 양손으로 매달리듯 태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태호야, 내가 너 평생 책임질게.”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태호의 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는 너,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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