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2021.10.03.
“오늘 밤은 꽉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리아에겐 커다란 폭발음같이 쾅쾅 고막을 때렸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어놓고선, 리아는 미처 못 들은 것처럼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꽉 안아준다니……. 아직은 주치의가 조심하라고 한 기간인데, 그래도 되나? 말 그대로 꽉 안아주기만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음, 그러니까 그게…….
“……!”
혼자 머리를 굴리던 리아의 얼굴이 순간 발갛게 확 달아올랐다. 소꿉놀이도 아니고, 부부 사이에서 꽉 안아준다는 말이 그냥 그 뜻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어머! 생각지도 못한 급 상황 전환에 리아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오랜 세월 연인으로 지내면서 넘지 못했던 마지막 선을 오늘 밤 드디어 넘게 되는 건가?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날뛰자, 리아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10대 소녀도 아닌 성인이 괜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느니, 부끄럽다느니 하면서 얼굴 붉히며 내숭을 떨고 싶진 않았다. 속으론 은근히 기대하면서 겉으론 아닌 척 상대를 밀어내는 건, 21세기를 사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그래, 오늘로 진짜 부부가 되는 거야! 생각을 정리한 리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태호의 팔에 기대듯 몸을 밀착시켰다.
“그래, 빨리 집에 가자.”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리아는 운전 중인 태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상 마음을 굳히고 나니까, 더욱더 떨리고 긴장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인지 그의 입매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사이드미러와 전방만 번갈아 주시하며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 혼자만 긴장한 게 아닌 것 같아, 은근히 위로가 되었다. 그래, 처음인데 다 그런 거지 뭐. 어느새 마음의 안정을 찾은 리아는 밤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게 되자 다시금 불안해졌다.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마음의 준비야 그렇다 치고, 다른 건 준비되었나? 집 안으로 들어서며 리아는 이것저것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내가 오늘 속옷 뭐 입었더라? 이런, 첫 번째 질문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오늘 그녀가 착용한 속옷은 무난한 흰색에 완전 밋밋한 디자인이었으니까. 훤히 비치는 망사까진 아니더라도 색이라도 좀 자극적이면 좋으련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을 써서 고르는 건데……. 하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리아는 짧게 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곧 걱정을 떨쳐냈다. 우선은 샤워부터 할 테니까, 상관없을 거다.
“나, 먼저 샤워할게.”
리아는 태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급히 욕실로 향했다. 괜히 어물쩍거리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샤워하고 나오면 얼굴이 붉어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빠르게 샤워를 마친 리아는 욕실과 연결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리곤 속옷 중에서 제일 자극적인 속옷을 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훤히 비치는 망사 재질이라거나 화려한 색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흰색 평범한 것보다는 낫겠지. 리아는 재빨리 파자마를 걸치고 드레스 룸을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침실에는 부부가 각각 따로 사용할 수 있는 드레스 룸과 욕실이 있었기에 그녀보다 먼저 샤워를 끝낸 태호는 이미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인지, 불은 끄지 않고 환하게 켜둔 상태였다. “불 끌까?”라고 물어보려던 리아는 순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묻지 않고 그녀 마음대로 꺼버렸으면서 오늘은 뭐가 다르다고 시시콜콜하게 물어볼까. 불을 끈 리아는 조심스럽게 침대 안으로 들어가 태호 쪽으로 다가갔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릴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오늘따라 알래스카 킹사이즈 침대가 어찌나 넓게 느껴지는지……. 리아가 옆으로 다가오자, 태호는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 와.”
그리고 그녀를 자연스럽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나, 어떡해! 맹세코 내숭 떠는 것도 아니고, 내외하는 것도 아닌데……. 태호의 품에 갇히는 순간, 리아는 숨이 탁 막히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루 이틀 한 침대에서 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는 거야! 키스하는 중에 침대로 쓰러지는 건 괜찮아도, 준비하고 침대에 누워 키스하려니 뭔가 어색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도 모르는 사이 눈꺼풀과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다행히 불을 껐으니까 망정이지, 이상하게 보일 뻔했다.
“……리아야.”
태호는 속삭이듯 그녀를 부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 위로 따뜻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 같은 섬세한 입맞춤이었다.
“하아.”
공기가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파고든 달콤함은 서서히 깊고 뜨겁게 여린 점막을 자극했다. 예전과 비교해서 크게 다를 것 없는 키스인데도 이상하다. 기분 탓일까?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깊고 진하게 느껴졌다. 리아는 더욱더 깊게 숨결을 받아들이려 살며시 옆으로 고개를 틀고 그의 목 뒤로 손을 감았다. 그러자 입안으로 뜨겁게 밀려들던 숨결이 뒤로 물러났다. 다음으로 숨결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리아는 두 눈을 꼭 감으며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래로 향할 거라고 예상한 숨결은 그녀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부드러운 속삭임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잘 자.”
그는 마치 아이를 재우듯 리아의 등을 다독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아까 말한 것처럼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뭐지? 리아는 태호의 품에 안긴 채로 캄캄한 천장을 노려보았다.
***
“후.”
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어젯밤, 제대로 못 자고 잠을 설쳤더니 자꾸만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려 했다. 밤을 불태우느라 하얀 밤을 보냈으면 억울하지는 않지. 정말 이대로 꽉 안고만 자는 거야? 라고 혼자 황당해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처음엔 기가 막히고 헷갈리게 말한 그에게 화도 조금 나고 그랬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아직 환자인 사람을 가지고 혼자 망상에 빠졌던 거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 몸매 관리도 하고, 좀 더 야한 속옷도 장만하고 등등,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완벽하게 준비해서 좀 더 특별한 첫날밤을 보내는 거다. 그러려면 이론 공부도 하고. 흠……, 친구들에게 경험담도 물어봐야 하나? 아, 맞다!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그제야 어제 수진이 전화 걸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전화해본다고 하고선, 어젯밤 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둘러 수진에게 전화했지만, 이번엔 수진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리아는 몇 번 더 시도한 후, 음성 사서함에 전화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넘도록 수진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어제 전화 안 받았다고 토라졌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수진은 받지 않았고, 리아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대신 문자를 보냈다.
[수진아, 어젠 미안했어. 시간 나면 연락해.]
수진에게서 연락이 온 건, 팀원 미팅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퇴근하고 만나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수진답지 않게 아주 간단한 문자였다. 문자를 확인한 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퇴근 후에 수진을 만난다는 건,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이니까.
[알았어. 퇴근하고 만나.]
수진에게 문자를 보낸 리아는 바로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밖에서 저녁 먹을 것 같다고 알리기 위해서다.
“오늘 몇 시에 퇴근해?”
그러자 태호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나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 먼저 저녁 먹어.]
“그래? 알았어.”
혼자 저녁 먹으라고 말하기 미안했었는데 잘됐다. 전화를 끊은 리아는 수진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를 정했다. *** 퇴근 후, 리아는 회사 앞 커피숍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수진이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수진아. 어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
하지만 수진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수진은 아무 말 없이 리아를 노려보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수진의 날카로운 시선에 리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전화 통화 좀 안 됐다고,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닐 텐데…….
“주리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수진이 입을 열었다.
“너, 태호랑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라니?”
이번에도 리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수진이 던진 질문 중에서, 제일 황당하고 엉뚱한 질문이었다.
“무슨 관계는 무슨 관계야? 부부 관계지. 나, 태호랑 결혼했잖아.”
“얘가 지금 농담하나?”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던진 대답은 아주 묵직한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면 너희, 같이 잤어?”
“어?”
“너희 같이 잤냐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
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친구끼리 더한 질문도 할 수 있겠지만, 수진은 대놓고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한 적은 없었다. 상대가 태호라서 그런가? 수진은 리아와 태호는 앙숙 중의 앙숙으로 서로 사이가 나쁘다고 알고 있었다. 사실 얼마 전까진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리아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수진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희, 잠자리했어? 부부 관계 맺었어?”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건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수진아,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너, 지금 몰라서 묻니?”
수진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쌀쌀맞게 맞받아쳤다.
“수진아, 너 갑자기 왜 이래?”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처럼 두 사람 정말 사귀는 사이였다며? 그거 진짜야?”
“……아.”
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진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되었나 보다. 기회를 봐서 유정과 수진에게도 말하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 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사 그대로야.”
그러자 수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너, 너 그러면 대학교 때부터 숨긴 거였어?”
떨리는 목소리로 수진이 물었다. 이번에도 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감쪽같이 친구를 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은 억울한 점도 있었다. 대학 시절엔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수진과 가깝지 않았다. 부모님 눈을 피해 태호와 연애하느라, 과 친구들과는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강의가 끝나는 대로 태호를 만나러 달려가기에 바빴으니까.
“어떻게 그래? 어떻게 친구인 나에게까지 숨겨? 너 지금까지, 내가 태호 욕하는 거 보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 했니?”
리아는 그제야 왜 수진이 이토록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너, 나 속으로 비웃었을 거 아냐. 내가 태호 욕하는 거 듣다가, 바로 태호 만났을 거 아냐. 태호에게 내가 뒤에서 욕한다고 다 일러바쳤니?”
“아니야, 수진아.”
리아는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를 느꼈다.
“태호랑 대학교 때부터 사귄 건 맞지만, 우리 졸업하고 바로 헤어졌어. 그 이후로 서로 앙숙으로 지낸 것도 맞고. 네가 태호 안 좋게 이야기할 때, 나도 정말로 태호와 사이 안 좋았어.”
그 말에 수진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뭐? 태호랑 헤어졌었다고?”
“응. 대학교 때 너한테 숨긴 건 미안하지만, 그 이후엔 정말 태호와 사이 나빴던 거 맞아. 이번에 결혼하면서, 우리 재결합한 거야.”
리아는 간략하게 헤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 태호가 해외 지사를 지원한 것도 너와 헤어졌기 때문이었어?”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태호가 해외 지사에 근무할 당시, 수진은 어학연수 핑계를 대고 그를 따라갔었다. 회사로 찾아갈 순 없었지만, 멀리서나마 그를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수진의 눈에도 그 당시 태호는 뭔가 달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던 눈빛과 마치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허무한 표정.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었는데……. 수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다 리아 때문이었단 말이지.
“너, 태호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 알고 보니, 그거 다 너 때문이었네.”
“뭐?”
태호가 죽으려고 했었다니.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었다고? 강한 충격에 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