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오늘 밤은 꽉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2021.09.29.
리아가 충격 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민훈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강 이사가 내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거, 눈치는 채고 있었어. 사실은 그래서 더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한 것도 있고.”
“……선배.”
“미안하다.”
민훈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강태호 이사가 알아낸 정보, 거의 다 맞을 거야. 지금까지 주원식품 신제품 정보를 빼돌려서 KJ푸드에게 넘겼어.”
희박한 가능성이긴 했지만, 리아는 민훈이 산업 스파이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인정하는데, 여기서 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리아는 참담한 심정에 울고만 싶었다.
“왜 그랬어? 돈 때문이었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꽤 많은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야. 내가 왜 그랬는지, 너도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과거의 악연 때문이었다고? 그렇다면…….
“선배 부모님과 우리 아빠와 얽힌 이야기, 얼마 전에 들었어. 그건 참 유감이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민훈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부러 접근한 걸까? 그가 진실을 말해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리아는 묻고 싶었다.
“언제부터였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어?”
그래서 친절하게 대해줬던 거야? 항상 주위에 맴돌면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리아를 바라보는 민훈의 얼굴에 더욱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는 차마 리아를 마주 볼 수 없는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야,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야. 모든 건 주원식품 입사하고 나서야.”
그렇다면 학창 시절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왔다는 건가? 민훈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사에 다니고 나서,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어. 왜 어머니가 징역을 사셨고, 왜 우리 집이 어렵게 되었는지…….”
“선배.”
“미안하다. 부모 일에 너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모든 게 오해였어. 하지만 모든 걸 알고 나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후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오해라니?”
그는 대답 대신 침통한 얼굴로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겉으로만 보기엔 그는 정말로 후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아는 이제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도 모두 그가 꾸민 함정이라면?
“그러면 그때 그 스캔들도 선배가 꾸민 짓이야?”
그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들켰으니까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거고?”
“그건 아니야. 내 죄는 달게 받을게.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 자수할게. 지금 부모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래서…….”
민훈의 부모님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알기에, 리아는 지금 당장 어떻게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나온 행동이 아닐까?
“선배는 정말 비겁한 사람이야.”
리아는 톡 쏘듯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은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흥분했다가 자칫 민훈에게 말려들어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자리를 뜨려고, 걸음을 옮기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에 흘러들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찾아왔는지 태호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태호야?”
그녀가 걱정돼, 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확실한 자신의 편이 앞에 있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정하게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서는 민훈을 바라보았다.
“정민훈 씨.”
민훈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리아를 사이에 두고 태호와 민훈, 두 남자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
“뭐라고?”
수현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야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온 태희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실을 전해 듣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오빠랑 새언니랑 오래전부터 사랑한 사이라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불꽃 튀게 싸우던 구미호들이 사실은 원래부터 사랑하던 사이였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태희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정 여사는 한심하다는 듯 쯧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네가 한 말 그대로 믿었다가, 큰일 날 뻔했잖니.”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태희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이렇게 들었다.
―혹시 네 속마음을 모르는 것 아닌가?”
―아니거든. 내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거든!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그건 누가 들어도, 새언니에게 딴 남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앞으론 입조심 해. 괜한 오해로 집안 시끄럽게 하지 말고.”
“엄마, 입조심 하라니. 난 단지…….”
“그만.”
정 여사는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앞으론 시누이 노릇 하지 말고, 새언니에게 더 잘해.”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잘해?”
항상 자신 편이었던 정 여사가 리아 편을 들자, 태희는 기분이 나빠졌다. 도대체 일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엄마가 이리도 새언니를 끼고 도실까. 태희가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내밀자, 정 여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딸의 등을 다독거렸다.
“넌, 새언니가 불쌍하지도 않아? 서로 좋아하는 거 티도 못 내고, 그 오랜 세월 숨기면서 얼마나 애가 탔겠니.”
“엄마, 잠깐만.”
정 여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태희 머릿속에 순간 느낌표가 떠올랐다. 정말 정 여사 말대로 두 사람이 예전부터 연인이었다면, 결혼하고 나서도 서로의 감정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겉으론 앙숙처럼 연기했는데, 결혼하자마자 바로 사이가 좋아지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그렇다면 집안에서 가장 눈치가 빠르고 두뇌가 명석한 내가 제일 부담스러웠겠네? 태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항상 그녀 앞에서 더 티를 내면서 싸웠다. 그때 그 이브닝드레스만 해도 그렇다. 정말 별거 아닌 걸로 태호는 버럭 짜증을 냈다. 리아도 마찬가지였고. 태희는 괜히 중간에서 두 사람을 눈치를 보던 자신을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면 리아와 태호는 일부러 태희 보라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내가 왔다는 걸 알고, 일부러 오해하게 그런 대화를 나눈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두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와아, 그럼 구미호 둘이서 호박씨 깐 거네?”
태희는 저도 모르게 벌떡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 여사를 거실에 놔둔 채,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자신을 깜빡 속인 두 사람이 너무 얄미워서, 도저히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뭐라도 골탕을 먹여야지! 태희는 속으로 씩씩거리며 힘차게 계단을 올라갔다.
*** 태호가 리아가 있는 레스토랑 예약 룸으로 들어온 건,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민훈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가 있으라며 리아에게 장소를 알려주었다. 리아도 원한다면 함께 있을 수 있었지만, 눈물이 터져버려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호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는 나중에 물어보면 되니까.
“먼저 주문해서 먹고 있지 않고. 배고프지 않아?”
룸에 들어선 태호는 물컵만 둔 채, 빈 테이블 앞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리아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괜찮아.”
지금 배고픈 게 문제인가? 입맛이 떨어져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지도 의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 됐든 말든 그냥 옆에 있을 것을. 요리를 주문하고 애피타이저가 나오자, 리아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제안이라는 게 뭐야?”
서두르는 그녀와 달리, 태호는 에스카르고를 포크로 찍어 느릿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파견 근무 형식으로 KJ푸드에서 1년 근무하라고 했어.”
“뭐? 선배를 KJ푸드에서 근무하게 하겠다고?”
산업 스파이였던 민훈을 신고하진 못할망정, KJ푸드에서 근무하게 하다니. 무슨 속셈인지, 리아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주원식품 정보를 빼 왔으니까, KJ푸드에겐 이익이라 이거야? 어떻게 선배를…….”
“주 회장님도 동의하신 거야.”
“아빠가? 아빠도 이 일을 아셔?”
“응. 아무래도 아버님과 연관된 일이라서.”
그렇긴 하다. 이 모든 악연의 시작은 부모 세대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아빠는 뭐라고 하셔?”
“정 대리가 알아낸 대로 모두 오해였어.”
“오해였다고?”
“응. 주 회장님보다는 오히려 한 사장 탓이 더 컸어. 그때 실질적인 관리자는 한 사장이었고, 일부러 서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도 한 사장으로 밝혀졌으니까.”
세상에. 리아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면 정 선배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한 사장에게 정보를 넘긴 거야?”
“응. 확실히 처음엔 그도 몰랐을 거야. 그러다가 의심이 들었겠지. 그래서 그 나름대로 뒷조사를 해봤을 테고. 최근 우리에게 사진 찍히던 시점부터는 아마도 정 대리가 확실하게 알아내려, 한 사장을 직접 만났던 것 같아.”
그러니까 민훈의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인물은 주 회장이 아니라 한 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훈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한 사장을 도왔던 거고. 순간 리아는 민훈이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그렇게 여위었던 걸까?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리아가 한입도 먹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음식 접시만 노려보자,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뒤로 다가가 리아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감싸 잡은 채, 에스카르고를 찍었다.
“그렇다고 정 대리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렇다. 산업 스파이 행위는 결코 경범죄가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주 회장님은 일을 크게 벌이지 않길 원하셨어. 정 대리의 처지도 이해해주셨고.”
“그러니까 선배에게 자신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자.”
“응.”
리아가 에스카르고를 입으로 가져가자, 그제야 태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파견 근무 형식으로 해서, 우리 쪽에서 근무하면서 한 사장의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캐는 거지.”
“선배를 믿을 수 있겠어?”
“내 밑에서 근무하는 거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다행이다. 민훈을 산업 스파이로 신고할 수도,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도 없어, 혼자 고민에 빠졌던 참이었다.
“선배 부모님 상태는?”
“한동안 안 좋았는데 다행히 저번 주부터 두 분 다 호전되고 있는 것 같아.”
그제야 리아는 걱정을 덜었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태호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불같이 화를 내도 모자를 텐데, 민훈의 부모 걱정을 해주다니……. 어찌 됐든 민훈은 그녀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니까, 그녀가 경멸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리아라서 사랑하는 거다. 남의 아픔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 마음 때문에…….
“그런데…….”
태호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계속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할 거야? 모처럼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 중인데.”
“응? 데이트?”
그러고 보니 그러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밖에서 식사하는 거다. 그때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라도 하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 리아는 재빨리 화면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 맞다. 수진이.”
전화해준다고 하고 깜빡했다. 리아가 전화를 받으려 하자, 태호는 황급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받지 마.”
“응? 나 아까도 선배랑 이야기하느라 수진이 전화 못 받았어.”
“괜찮아. 중요한 일이면 메시지 남기겠지.”
태호는 절대로 방해받지 않겠다는 듯 리아의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수진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사실 리아도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말을 따랐다. *** 식사를 끝내고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근처 밤거리를 거닐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리아는 태호와 팔짱만 끼고 걸어도 가슴 설레게 좋았다. 그가 데이트라고 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민훈의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풀려서일까? 부드럽게 뺨을 스쳐 가는 밤바람마저 상냥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더 걷고 싶었지만, 밤이 깊었으니 내일 출근하려면 이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응.”
리아는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때 태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어루만지듯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오늘 밤은 꽉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