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말해줘서 고마워2021.09.26.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 맞다.”
리아는 탄성을 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텅 빈 민훈의 자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리아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출근 시간까진 아직 조금 남았지만 민훈은 항상 30분쯤 먼저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결정 내리지 못한 상태이니까. 그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어느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민훈의 자리를 지나친 리아는 팀원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곧장 팀장실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민훈이 오지 않자, 팀원 모두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정 대리님 출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연락 좀 해봐.”
결국 리아는 책상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신호음 없이 바로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거로 보아, 전원을 꺼둔 것 같았다. 민훈에게서 연락이 온 건,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였다. 막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오자, 리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접니다, 팀장님. 정민훈 대리. 죄송합니다만, 잠시 밖에서 뵐 수 있을까요? 지금 회사 앞 커피숍에 있습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호에게 민훈의 사정을 듣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알았어요. 내가 그리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리아는 곧장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회사 앞 커피숍이지만, 태호에게 민훈과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알았어. 말해줘서 고마워.]
태호는 민훈을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민훈의 정체를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이젠 모두 알기에……. 정체가 드러난 적은 훨씬 대처하기가 수월하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대화 녹음해둬.]
“알았어.”
리아는 전화를 끊고, 먼저 퇴근한다며 사무실을 나섰다. 커피숍에 도착하니, 민훈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보다 더 야윈 모습이었다. 순간 부모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리아는 그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아가 자리에 앉자, 민훈은 재킷 안쪽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단결근한 주제에 팀장님을 여기로 나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죠?”
회사 밖인데도 민훈이 사무적으로 나오자, 리아 역시 사무적으로 대했다. 민훈은 말 대신 하얀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내려다 본 리아는 봉투 위에 적힌 글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직서?”
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회사를 그만둬버리면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그녀가 선뜻 사직서를 집어 들지 않고 노려만 보자, 민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 내가 요즘 개인 사정으로 회사 일에 통 집중을 못 하니까.”
사직서를 냈으니, 이제는 회사 상하 관계가 아니라고 느껴서일까? 민훈은 평소대로 말을 놓았다.
“선배, 휴가 좀 몰아서 냈다고,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어차피 써야 할 휴가였잖아.”
“훗, 그런 거 아니야.”
민훈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내빼려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산업 스파이였던 거야? 민훈의 부모와 리아의 아버지, 주 회장과의 과거의 악연을 돌이키자면, 민훈의 그런 행동이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주 회장 때문에 화목하던 가정이 무너진 게 사실이라면, 복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범법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부모님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두 분 모두 이제 나이가 드셔서, 예전 같지 않으시거든.”
“정말 그것뿐이야?”
“응.”
솔직히 그가 순순히 모든 것을 실토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뒤에서 일을 꾸민 사람이라면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거짓말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리아는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했다. 신입생 파티에서 선후배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조금 지나서? 주원식품에 입사해서? 오랫동안 믿고 지냈던 이에게 배신당한다는 건, 매우 씁쓸한 일이다. 그리고 상대가 끝까지 진실을 숨기려고 한다면 씁쓸한 맛은 배가 된다.
“그동안 고마웠어. 조만간 사무실에 들러서, 책상 정리할게.”
민훈은 미안한 얼굴로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도 전에 리아의 목소리가 발을 잡아당겼다.
“그게 다야?”
어느새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게 정말 할 말 없어, 선배?”
순간 민훈은 ‘이런!’을 외치는 것 같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자리에 선 채로 침묵을 지켰다.
“……사실 할 말은 많은데…….”
이윽고 굳게 닫혔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니! 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장난 같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
띠리리―. 띠리리―. 한마디 하려는 찰나, 테이블에 놓아둔 리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히 수진과 통화할 때가 아니었다. 리아는 그대로 휴대폰을 내버려 둔 채, 심각한 얼굴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선배.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나에게 할 말 없어?”
그녀는 진심으로 지금에라도 그가 진실을 말해주길 바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질렀던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민훈과 끝을 보고 싶진 않았다.
***
“아아아아악!”
죽일 듯이 휴대폰을 노려보던 수진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어젯밤엔 태호의 방해로 리아와 통화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당사자가 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침 일찍 전화하려다 출근 시간은 피해야 할 것 같아서 뒤로 미뤘는데……. 그러나 오늘따라 업무가 너무 많아서 통 전화할 틈이 생기지 않았다. 겨우 한숨 돌리고 통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리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나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몇 번 울리던 신호음이 결국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리자, 결국 수진은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이건 분명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혹시 유정이나 민훈 선배가 귀띔해 준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리아가 먼저 연락해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감쪽같이 태호와의 관계를 속인 건데 말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수진은 리아를 좋아했던 것만큼 배신감이 크게 느껴졌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결국 사무실을 나선 수진은 강태호 이사실로 걸음을 돌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태호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수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남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약속은 하셨습니까?”
“아뇨. 하지만 잠깐이면 돼요.”
한 사장의 딸인 수진의 앞을 함부로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남 비서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평소였다면, 좋게 이야기했겠지만 지금 수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요 며칠 전부터 꾹꾹 눌러왔던 인내심이 어느새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건 비서 나부랭이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남 비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태호가 집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수진을 보고도 못 본 척, 남 비서에만 말을 건넸다.
“남 비서, 난 이만 퇴근할게.”
태호가 그대로 옆을 지나쳐, 이사실을 걸어 나가자, 수진은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하아, 하아. 야, 강태호.”
수진은 거의 뛰듯이 태호를 따라오며 벅찬 숨을 골랐다. 회사 내에선 이사님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지금 수진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너, 어제 리아에게 나한테 전화하라는 말 안 했어?”
“안 했어.”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태호가 차갑게 말했다.
“뭐? 야, 내가 어제…….”
“난 너의 비서 나부랭이가 아니라서 말이지. 일일이 네 말 들어줄 의무 없어.”
비서 나부랭이? 그녀가 남 비서에게 한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게 뭐? 태호가 자신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수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한 말이 조금 심했다고도 느껴졌지만, 하여간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 그러면 너에게 물어볼게.”
리아에게서 듣나, 태호에게서 듣나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닐 테니까, 수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너랑 리아, 너희 정말 예전부터 사랑한 사이 맞아?”
“하.”
수진의 질문에 태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뭐?”
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발끈한 수진은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상관있지. 친구라면서 어떻게 그런 중요한 걸 속여? 적어도 절친이라면 솔직하게 털어놨어야 하는 거 아냐?”
눈물까지 글썽거렸지만, 아쉽게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태호는 수진을 향해 상체를 숙이더니, 그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한수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두자. 내가 너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네가 리아의 친구이기 때문이야. 만약 네가 리아의 친구가 아니라면 난 너와 말도 섞지 않았을 거야. 알아?”
말을 마친 태호는 수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동시에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하아.”
그는 언제나 차가웠으니까, 저런 태도에 크게 상처받을 건 없었다. 하지만 리아의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수진에게는 크나큰 모멸감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내가 리아의 친구야! 난 리아보다 너를 먼저 만났다고! 중학교 때 태호를 보자마자, 좋아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막연히 그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태호야, 네가 어떻게…… 나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지자, 수진은 얼굴을 감싸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자리에 앉은 민훈이 다시금 입을 열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 너에게 못 할 짓 했어.”
결국 털어놓는 건가? 리아는 숨을 죽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안하다는 말로 용서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 건데?”
그녀의 질문에 민훈는 슬픈 얼굴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리아야, 너, 내가 지금까지 한 짓 모두 알고 있잖아. 아니야?”
뭐야? 정체가 발각 난 거, 알고 있었어? 순간 말문이 막힌 리아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언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