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같이 샤워할래?2021.09.22.
“저, 아버님…….”
리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정 여사가 화난 목소리로 급히 끼어들었다.
“이제 갓 결혼한 애들에게 아이는 무슨 아이예요?”
정 여사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 회장을 쏘아보았다.
“우리 때문에 가슴 졸이느라, 쟤들이 지금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해봤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 와중에 손주 타령이 나와요? 아니, 왜 애들, 부담은 주고 그래요?”
“아니, 여보.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강 회장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정 여사는 매몰차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왜 매번 식사할 때마다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자꾸 그러면 애들이 밥이나 편하게 먹을 수 있겠어요?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강 회장님.”
자신을 ‘강 회장님’이라고 정 여사가 깍듯하게 호칭하자, 강 회장은 할 수 없이 패배를 인정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간 아까처럼 정 여사가 버럭 소리 지를지도 모른다.
“흠, 그나저나 태희는 아직도 안 들어오고 뭐 하는…….”
정 여사 덕분에 2세 계획 대화는 일방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강 회장은 이번엔 태희에게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쌀쌀한 정 여사의 표정 때문에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 어서 먹자꾸나.”
강 회장이 다시 수저를 들자, 모두 그를 따라 수저를 들었다. 태희가 빠진 저녁 자리에서 가족 모두는 정 여사 덕분에 평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리아와 태호가 신혼집에 돌아온 건, 밤이 깊어지고 나서였다. 원래 계획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돌아오는 거였다. 하지만 강 회장이 두 사람을 잡고, 정확히는 리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강 회장은 친근하게 리아를 대했다. 거실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리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이것저것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정 여사에게 한마디 들어서인지, 2세 계획에 관해선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리아는 강 회장이 잔에 손수 따라준 와인을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마시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마시고 말았다. 취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들뜬 듯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숙취가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행여라도 내일 아침에 입에서 술 냄새라도 나면 곤혹스러울 것이다. 리아는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재킷을 벗는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달리, 태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운전해야 한다고 핑계 대었지만, 사실은 아직은 경계를 확실히 풀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이 뭐라셔?”
아직 그는 그녀에게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분명 안 좋은 소리를 들었을 텐데……. 자신은 쏙 빠지고 태호 혼자만 당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별말 없으셨어.”
거짓말이 분명하다. 그렇게 오래 서재에 있다가 나왔으면서 별말 없었다니…….
“오빠,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리아는 콧소리를 내며 두 팔로 태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슬쩍 떠보려는 정 여사에게 넘어가서 사실을 말해 버린 것은 그녀이니까, 그녀의 잘못으로 들통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행히도 별 탈 없이 지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태호에게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많이 혼났어? 안 좋은 소리 하셔?”
그녀 딴에는 조금이라도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태호에게는 고통만 안겨주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애교를 부리는데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안 가겠느냐고. 심장이 쿵쿵 뛸 때마다, 갈비뼈에 은근히 압박을 가하며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예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상태가 좋아진 것 같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대로만 죽 회복된다면 곧 리아를 숨도 쉬지 못하게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끌어안기뿐인가?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그날을 위해서 쉽진 않겠지만 잠시만 인내하기로 하자. 태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야. 그러고 나서 별말 없으셨어.”
“그런데 왜 그렇게나 서재에 있었던 거야?”
“일 이야기지 뭐.”
“무슨 일?”
태호는 대답 대신 가볍게 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에 관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오늘 서재에서 태호는 지금까지 강 회장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왜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몰렸으며, 어쩌면 ㈜정직이 둘로 쪼개진 이유에 한 사장이 깊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강 회장은 리아와 태호의 사이를 알게 되었을 때만큼 매우 놀랐다. 그리고 곧 침통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왜 아니겠는가? 가족처럼 믿었던 오른팔 한 사장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강 회장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를 상의하느라,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리아에게 알려주긴 싫었다. 그녀에겐 꽤 피곤하고 긴 하루였을 것이다. 괜한 근심 없이, 편한 마음으로 잠들게 해주고 싶다.
“저번에 사고 난 일 뒤처리도 있고, 수출 건도 있고. 의논할 일이 많았어. 그동안 내가 병원에 있었으니까.”
“……음. 그래?”
그제야 리아는 더는 묻지 않고 그의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졸음이 몰려오는 눈을 힘겹게 깜빡거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알았어.”
태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술기운 때문인지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요 며칠 그녀는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다. 태호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아니 어쩌면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는 자신도 모르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태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지금까지 숨겼던 가족으로부터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받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모든 게 술술 풀리자, 겁이 날 정도로 기분이 들떴다. 그래서일까?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오빠, 나 잠깐만. 샤워하고 올게.”
“술 마셨는데 괜찮겠어?”
술 마시고 나서는 웬만하면 더운물로 샤워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잘못하면 뜨거운 열기에 구토하게 되거나, 심하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쯤 샤워 안 하고 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기에, 태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리아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같이 샤워할래?”
리아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호 역시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리아는 커다래진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원래대로라면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았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같이 샤워할래.”라고 말실수하고 말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물론 부부 사이에 함께 샤워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타의든 자의든 아직 완벽한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한 침대를 사용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함께 샤워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런데 태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럴까?”
그 말에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리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럼 그럴까?’라니! 리아는 재빨리 태호의 품에서 떨어져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주 잘생긴 남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마! 그런 얼굴로 그러면 반칙이라고. 덕분에 리아는 술에서 완전히 깨고 말았다.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빨리 샤워하고 올게.”
말을 마친 리아는 재빨리 욕실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붙잡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태호는 순순히 그녀를 혼자 보내주었다. 후다닥 욕실로 피신한 리아는 문을 걸어 잠그고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거울을 통해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아는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휴, 술이 원수지.”
리아는 작게 투덜거리며 서둘러 물을 틀었다. 아무래도 긴 샤워가 될 것 같다. *** 띠리리―. 띠리리―. 리아가 욕실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맡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이건?”
화면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밤늦은 시간에 전화질이라니. 그것도 신혼부부 집에…….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방해나 해보자는 심보일까? 몇 번 울리던 전화는 곧 끊어지고, 음성 메시지로 넘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할 수 없이 태호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태호니?]
휴대폰 건너편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태호라는 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 수진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태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수진 역시 그의 물음에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너에게 할 말은 아니고. 리아는 어디 있어?]
“지금 샤워 중이야.”
[그러면 샤워 끝나고 나에게 전화하라고 해 줘.]
“아니, 밤이 늦었어. 내일 통화해.”
그 말을 끝으로 태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대로 전원을 꺼버렸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평온한 주말을 보냈다. 그런 주말의 마지막을 리아가 수진과 대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한 사장이 적이라고 해서, 수진까지 적대시할 필요까진 없었겠지만, 태호는 수진에 관해 좋은 감정이 없었다. 리아의 친구라니까, 옆에서 얼쩡대는 것을 눈감아 주는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이 보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호는 침대맡에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물소리가 흘러나오는 욕실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그녀의 샤워가 꽤 길어지는 것 같다. ***
“후후.”
리아는 차에서 내리며 행복한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꿈같은 주말이었다. 엉클어져 속 썩이던 실타래가 한번 풀리기 시작하니까, 속 시원하게 모두 풀어지는 느낌에 기분이 이만저만 상쾌한 게 아니다. 어젯밤에도 두 사람은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물론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약간, 아주 약간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20대 호르몬과 30대 호르몬은 다른 걸까? 30대 호르몬이 더 강렬하게 작용하나? 태호의 탄탄한 몸이 느껴질 때마다, 리아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돌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그녀가 먼저 그를 덮칠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데 며칠 못 참고 일을 저지를 순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인내하자. 때가 되면 이 길고 긴 기다림이 끝을 볼 테니까. 아, 그러기 위해선 미리 야한 속옷이라도 준비해둬야 하나? 온갖 핑크빛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리아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과 마주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 맞다.”
리아는 탄성을 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