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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가슴에 대못 박을 일 생길 거라고 (58/81)

58. 가슴에 대못 박을 일 생길 거라고2021.09.19.

갑작스러운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

목소리의 주인공은 믿기 어렵게도 정 여사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정 여사의 입에서 큰소리가 나온 적이 없었기에 가족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나더라도 언제나 차분하게 나직한 목소리로만 말하던 정 여사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목덜미까지 붉어진 얼굴로 강 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당신들 싸움 때문에, 언젠가 애들 가슴에 대못 박을 일 생길 거라고.”

“……아니, 여보.”

갑자기 돌변한 아내의 태도에 강 회장은 난처한 얼굴로 정 여사에게 다가갔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아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아내가 화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부모를 속이고 몰래 연애한 태호이어야 하는데……. 강 회장은 왜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당신, 별안간 왜 이러는 거요?”

“몰라서 물어요?”

분을 이기지 못한 정 여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애들이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지 모르겠느냐고요.”

처음엔 정 여사는 태호의 고백을 듣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서로 좋아했다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린가? 잠시 넋을 놓았던 정 여사는 곧 자신이 엄청난 오해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현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그녀도 오랜 세월 부모를 속인 아들이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하지만 배신감은 잠시일 뿐,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동안 얼마나 속이 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인 강 회장이 정 여사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거야…….”

강 회장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정 여사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하, ‘그거야’는 무슨 그거야! 첫째 연애할 때도 그렇게 안 된다고 반대해서 애 가슴에 피멍 들게 하더니, 당신, 태호 가슴에도 대못을 박은 거잖아. 태호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속으로 얼마나 혼자 아파했겠어요.”

이제야 정 여사는 의아했던 일들이 하나둘 이해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무표정이던 태호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 피식 웃으며 혼자 행복해하던 모습이라거나, 생전 관심 없던 쇼핑에 흥미를 보인 거라든가. 다 연애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다. 리아와 몰래 사귀느라……. 왜 그걸 모르고 지나쳤을까? 그랬던 태호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한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어두운 얼굴로 지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로 회사 전체가 휘청거릴 때와 시기가 맞물렸다. 모두 KJ그룹 때문에 주원식품이 그렇게 되었다고 떠들썩거렸으니,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꽤 큰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잠시 헤어졌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갑자기 해외 지사를 지원했던 걸까? 바보 같은 녀석, 나에게라도 말을 하지. 털어놓았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었을 텐데……. 정 여사는 집안끼리 사이가 나빠도, 자식이 상처 입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여보, 부모를 속이는 건 아니지.”

그래도 할 말이 있는지 강 회장이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자, 정 여사는 남편의 팔을 내리쳤다.

“속일 만하니까 속였겠죠! 그때 태호가 리아와 사귄다고 했으면 당신이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억지로 떼어놨겠지. 아니에요?”

“……그건.”

결국 강 회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 여사의 말이 사실이니까……. 아무리 괘씸해도 지금 뭐라고 화를 낼 자격은 그에게 없는 것 같았다. 강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서재로 자리를 피해 있는 게 나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강 회장이 홀로 쓸쓸히 서재로 향하자, 그 뒤를 태호가 가만히 따랐다. ***

“태희야, 전화 안 받을 거야?”

아까부터 계속해서 벨이 울렸지만, 태희는 휴대폰을 뚫어지게 노려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서현이 그녀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엄마에게서 온 전화네?”

“받지 마.”

서현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 하자, 태희는 잽싸게 서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잠시 후, 서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서현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태희를 바라보았다.

“너희 엄만데? 받아, 말아?”

“안 돼, 받지 마!”

태희는 이번엔 서현의 휴대폰마저 황급히 빼앗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몰라, 몰라. 난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꼬였어.”

태희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그래, 서현이 어머니에게 다 들었어.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내가 왜 서현이 어머니를 통해서 들어야 하니?

리아가 바람피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정 여사는 말없이 주 회장 집에 간 일을 탓하는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태희는 나불나불 정 여사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충격에 일그러지던 정 여사의 표정을 떠올리니, 다시금 태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나저나 새언니, 어쩌지? 지금쯤 한바탕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오는 거겠지? 왜? 아니라고 오리발이라도 내미나? 그래서 삼자 통화하자고 전화가 오는 걸까? 아이 씨, 바람피운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시달려야 하는 거야! 태희는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깨물며 빠르게 머리를 회전했다. 그러다 서현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최고의 대책이 떠올랐다.

“서현아!”

그녀는 서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빠르게 말했다.

“우리 어디론가 멀리 떠나자. 몰디브 어때? 우리 몰디브 가서 모히토 한잔하고 올까?”

“몰디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내부 고발자라도 되니?”

서현으로부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오자, 태희는 애원하듯 매달렸다.

“응, 내부 고발자 맞아. 내가 엄마에게 고자질한 거 알면 나, 작은오빠 손에 죽을 거야.”

그 말에 서현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태희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랑이 오빠이긴 하지만, 같이 피를 나눈 형제인데 설마 그러겠니…….”

“그,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이나마 안도하던 태희는 서현의 다음 말로 다시금 지옥으로 떨어졌다.

“본인이 직접 안 죽이고 전문가를 쓰겠지.”

서현은 태희를 빤히 바라보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쓱, 한 번에 깔끔하게.”

  *** 태호가 강 회장과 대화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온 건 한참이 지나고서였다. 그때까지 홀로 남겨진 리아는 거실에 앉아, 소정과 태문의 질문 공세를 받아야만 했다. 소정과 태문은 진심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해 주었다. 태문은 조금은 눈치챘었지만,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의심했었고, 소정은 사실은 조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소정아!”

그 말에 태문은 깜짝 놀랐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속인 것까진 아니지만, 아내가 자신에게 비밀로 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내 일도 아닌데, 본인이 밝힐 때까지 비밀로 해야죠. 자칫 잘못했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형님은 저희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거네요?”

“응.”

그제야 리아는 왜 소정이 친근하게 먼저 다가왔는지 깨달았다. 소정은 태호가 리아와 연인 사이였고,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호는 소정이 다시 태문과 맺어질 수 있게 손을 쓰면서 그때 그녀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았단다. 자신이 소정을 도와주는 이유는 물론 두 사람을 위한 것도 있지만, 태문이 빨리 유부남이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리아의 정혼 상대가 태문이 아니라 태호로 바뀌니까.

“하, 녀석. 난 진짜 나를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줄 알았지.”

이번에도 태문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자 소정은 웃으며 남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도와준 거예요.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결혼할 수 있었잖아요.”

“소정아.”

그 말에 태문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리아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태문과 후계자 경쟁, 어쩌고저쩌고한 것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항상 느낀 건데, 그러기에는 태호와 태문의 사이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태호가 그린 큰 그림이었던 걸까? 그때 정 여사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표정을 찡그리며 거실에 들어섰다.

“태희, 얘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중요한 일이 있는지, 계속해서 버튼을 눌렀지만 애석하게도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정 여사가 통화를 포기할 때쯤, 태호가 거실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태호의 표정은 그리 어두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태호는 곧장 정 여사에게 다가갔다.

“어머니는 우리 사이에 관해서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응?”

순간 정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을 등 뒤로 숨겼다. 화면에 뜬 태희의 이름이, “범인은 강태희다.”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정확하게 말하면 정 여사는 리아와 태호가 예전부터 사랑한 사이라는 걸 안 게 아니라, 태희의 말을 듣고, 리아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오해한 거니까. 정 여사도 궁금했다. 도대체 태희는 어떻게 그리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걸까? 태희가 종종 엉뚱한 상상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믿어버리다니. 한 번이라도 의심해 봐야 했는데……. 하여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태희의 말을 덜컥 믿은 건 그녀의 잘못이다. 정 여사는 태호의 시선을 피하려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래도 태호에게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태희는 당분간 외국으로 피신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도 호랑이가 자기를 산 채로 잡아먹을 거라며, 난리를 치며 도망쳤는데…….

“그건 말이다.”

거짓말하긴 싫었지만, 가족의 평화를 위해선 할 수 없었다. 정 여사는 태호 대신 리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들보다는 며늘아기를 공략하는 게 쉬울 테니까.

“리아가 너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반찬 챙기는 거 보면서……. 혹시 예전부터 좋아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늘 그냥 떠보았던 건데…….”

정 여사는 자상한 얼굴로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새아기가 그만 깜빡 넘어왔지 뭐니.”

“……어머, 어머니.”

다행스럽게도 리아는 정 여사의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았다. 리아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자신과 태호를 번갈아 바라보자, 정 여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찌 됐든 이제 모두 알았으니 됐다.”

정 여사는 더욱더 환하게 웃으며 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리아야, 온 김에 푹 쉬다가 저녁도 먹고 가렴.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말만 하려무나.”

‘새아가’가 아닌 ‘리아’라고 다정하게 이름까지 부르면서……. *** 서재에서 태호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저녁 식탁에서 강 회장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정 여사의 눈치를 슬쩍 보긴 했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식사를 시작하고 조금 지나서, 이윽고 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아가.”

모두 긴장한 채로 강 회장에게 시선이 쏠렸다. 정 여사만 쓸데없는 말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강 회장을 노려보았다.

“네, 아버님.”

리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 여사는 그렇다고 해도, 강 회장은 두 사람에게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뭐라고 한들, 꾹 참고 모두 들을 각오였다.

“그러니까 너희 두 사람, 아주 예전부터 사랑했다는 거지?”

“네, 아버님.”

“그러면 말이다.…….”

강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관계 회복하고 말고도 없는 거 아니냐? 2세 계획을 1년이나 늦출 까닭이 있을까? 너희,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 아니냐? 그러니, 내가 보약 한 첩 지어주마.”

“큭.”

당황스러운 강 회장의 발언에 리아는 혀끝을 깨물고 말았다. 물론 그녀가 태어날 아이의 심리까지 들먹이며 1년이란 유예를 받아낸 것은 맞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 아버님!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원망스러운 눈으로 강 회장을 바라보던 리아는 잘 차려진 저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어째, 시댁에선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걸까? 오늘 저녁 역시 다 먹은 것 같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저, 아버님…….”

리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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