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이게 다 지금 무슨 소리지?2021.09.15.
“죄송해요, 어머니.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순순히 인정하자, 정 여사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살짝 경고만 할 생각이었는데, 리아가 너무 쉽게 털어놓아 솔직히 말하자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태호가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리아 얼굴이 왜 창백한 거죠?”
못난 녀석, 이 와중에도 연기하다니! 정 여사는 리아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고는 태호에게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렴.”
“어머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만해.”
리아는 정 여사에게 따지려는 태호를 급히 말리며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태호가 나섰다 사태가 심각해질까 두려웠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양가 부모님을 속이고 몰래 연애한 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잠시 불장난친 게 아니고, 아주 오랫동안 연인으로 있었는데 얼마나 배신감이 클까?
“어머니가 우리 사이 알고 계셔.”
태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
그 말에 이번엔 태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어떻게 그걸?”
정 여사는 무척이나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태호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도도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태호였다.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정 여사가 알게 되었다고 하니, 매우 당황스러울 것이다. 창피하기도 하겠지. 그러니 다른 가족까지 알기 전에 어서 마무리하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 일이 더 커지는 게 부담스러운 정 여사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로할 때 폭로하더라도,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할 일이었다. 강 회장이 알았다간 당장 이혼하라고 호통을 칠 테고, 다시 주원식품과 전쟁 같은 경쟁이 시작될 게 뻔했다. 두 집안싸움에 지치기도 했고, 또한 정 여사는 그 악몽의 원인이 자신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만하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원 테라스로 향하던 강 회장과 태문, 소정마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정 여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아직 아버지껜 비밀이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적당히 알아듣고 멈춰야 하는데……. 그녀가 아는 작은아들 태호는 그랬다. 섣불리 일을 키우지 않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평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피하려는 정 여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 여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곧이어 태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난데없이 죄송하다니!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어머니로서 정 여사는 그 안에 담긴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태호의 사과에 정 여사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바람피운 건 며느리인데, 왜 내 아들이 잘못했다는 거야? 울컥한 나머지,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정 여사가 뒤를 돌아보자, 태호의 어두운 얼굴이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들어왔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왜……?”
그때 믿을 수 없는 말이 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쨌든 부모님을 속인 거니까요. 맞아요. 리아와 저, 아주 예전부터 사랑했던 사이 맞습니다.”
정 여사는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리아와 태호, 예전부터 사랑했던 사이라고. 이게 다 지금 무슨 소리지? 말문을 잃은 정 여사는 그저 멍하니 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오래 기다렸어?”
민훈의 질문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수진이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진은 민훈을 슬쩍 흘겨보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 한, 한 시간쯤?”
“훗, 천하의 한수진이 한 시간이나 기다리다니. 꽤 안달 났는가 보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민훈이 빈정거리자, 수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민훈 앞으로 커피 잔을 내밀었다.
“커피가 식었을 거야. 선배가 이렇게 늦을 줄 모르고 먼저 시켜놨거든.”
“갑자기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사람 잘못이지, 난 아니야.”
얼마 전, 술자리에서 민훈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수진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민훈을 따로 불러냈다. 그날 술자리에서 민훈은 지나가는 투로 리아와 태호에 관해 말했었다.
“몰랐어? 두 사람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이잖아.”
“선배 취했어?”
처음에 수진은 그저 헛소리라고 넘겨버리려 했다. 그런데 유정은 민훈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조금 눈치채긴 했었어. 태호가 우리 학교로 리아를 만나러 오곤 했었거든.”
“뭐?”
수진은 말도 안 되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태호가 왜 리아를 만나러 우리 학교에 와? 그리고 유정아, 그런데 왜 내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거야 확실하진 않으니까 그랬지. 그리고 만약에 둘이 사귄다고 해도, 숨겨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친구라고 괜히 물어볼 수도 없고.”
뭘 그런 걸 가지고 흥분하냐는 듯 유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태호를 좋아하는 수진은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속이 뒤집힌 것처럼 메스꺼웠다.
“그렇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어쩌고저쩌고한 게, 모두 사실이란 말이야?”
민훈은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유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좀 그런 것도 같더라고. 다는 아니겠지만, 조금은 그럴 거야.”
“말도 안 돼!”
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유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리아가 우리를 속인 거잖아. 우릴 병신 취급한 거잖아! 친구끼리 어떻게 그래!”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수진은 소리치듯 말을 퍼부었다. 모두의 시선이 몰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떠들썩한 술집 분위기에 묻혔다. 속 터지게도 유정은 리아의 편이었다. 수진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아무리 화를 내도 유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진아, 넌 누구보다도 두 집안이 어떤 줄 잘 알잖아. 아무리 친구라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해줘야지. 우린 친구잖아.”
미칠 것처럼 화가 나고 흥분했지만, 수진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홧김에 자신이 태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해버릴까 봐, 겁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순 없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다시 한번 더 민훈을 만나기로 했다.
“그날, 선배가 술자리에서 한 말. 취해서 헛소리한 거 아닌 거 분명해?”
제발 취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 수진은 애원하는 눈으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도 안다.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민훈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수진은 지금까지 리아가 태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리아가 태호를 싫어한다고만 생각했을까? 살며시 떨리는 리아의 눈가에 많은 답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수진은 지금까지 자신을 속인 리아에게 화나는 만큼 그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유정이도 눈치채고 있던 걸, 왜 수진이 너만 몰랐을까?”
술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민훈은 빈정거리는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왜? 강태호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눈에 뭐라도 씌어버렸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수진이 놀란 듯 눈살을 찌푸리자, 민훈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유정이가 그것도 눈치채고 있는 거 몰라? 나한테 그러던데……. 수진이, 네가 매일 강태호 욕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고. 네 입에서 나오는 남자 이름은 강태호밖에 없다면서…….”
“뭐?”
아니, 유정이 이 계집애. 왜 그런 걸 시시콜콜하게 선배에게 다 말하는 거야? 수진은 리아 뿐만 아니라, 유정에게도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어쩌면 둘이 짜고서 자신을 엿 먹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정이가 너랑 리아, 둘 사이에서 난처해하더라고. 저번에 만났는데 술 취해서 나한테 속풀이처럼 털어놓더라.”
“둘 다, 이젠 내 친구 아니야.”
수진은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민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오늘 민훈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결국은 그녀도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주리아와 강태호의 ‘로미오와 줄리엣’ 기사는 사실이라는 것을. 수진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민훈이 빠르게 말했다.
“친구든 아니든, 이제 장난질 그만해라. 리아와 헤어진다고 해도 강태호는 너에겐 절대로 가지 않아.”
“하!”
그 말에 수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민훈에게로 돌아왔다.
“선배야말로 꿈 깨. 리아가 태호랑 헤어진다고 걔가 선배에게 갈 거 같아?”
“바라지도 않아. 하여간 나, 분명히 너에게 경고했다. 나중에 우스운 꼴 나기 싫으면 행동 조심해.”
“흥, 재수 없어.”
민훈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지만, 수진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대로 카페를 걸어 나갔다.
“후,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
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식어버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들이켜자, 진한 커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 그의 마음처럼 시고 씁쓸한 맛이……. ***
“뭐? 방금 뭐라고 했어?”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강 회장이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강 회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로미오와 줄리엣’ 그 기사가 모두 사실이었단 말이냐?”
“네, 아버지. 속여서 죄송합니다.”
“허허, 참.”
기가 막힌 나머지, 강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으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른 자식도 아니고 제일 믿었던 둘째가 감쪽같이 자신의 눈을 속이고 원수와도 다름없는 주씨 집안 딸과 사랑에 빠졌었다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이건 믿었던 굴착기에 온몸이 찍힌거나 매한가지였다. 그래놓고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서로 으르렁거리며 사이 나쁜 연기를 했다니!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주 회장은 너희, 이렇게 속인 거 알고 있기는 하나? 하, 알면 난리가 나겠군.”
그래도 주 회장보다 먼저 사실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도를 가졌다. 하지만 그 마음의 안도는 곧 깨져버리고 말았다.
“장인어른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제가 결혼 허락받으러 갔을 때 말씀드렸어요.”
그 말에 리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빠가 알고 계셨어? 그래서 어제 웃으면서 맞아주셨던 거야? 아니, 그것보다도 그러면 아빠는 태호가 날 아직도 좋아하는 거 뻔히 아시면서, 모른 척하셨다는 거야? 왠지 모를 배신감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영철이도 아는 사실을 난 모르고 있었다는 거냐, 지금?”
흥분했는지 강 회장의 입에서 주 회장의 호칭이 이름으로 튀어나왔다. 상황이 심각해지려고 하자, 태호는 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때였다. 강 회장보다 더 큰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서 내가 전부터 그랬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