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2021.09.12.
“그나저나 나한테 말하지, 그랬니? 그랬다면 내가 도와줬을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리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 여사는 리아의 궁금증을 풀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씁쓸한 얼굴로 살짝 입꼬리를 틀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게 전부였다.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는 소정이 웃으며 다가온 덕분에 사라졌다.
“어머니, 아버님께서 잠시 서재로 와달라고 하시네요.”
“그래, 알았다.”
정 여사가 서재로 가고, 리아와 소정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둘만 있게 되자, 리아는 곧바로 소정에게 정 여사의 기분에 관해 물었다.
“형님, 오늘 어머니 기분 나쁜 일 있으셨어요?”
“아니? 전혀 그런 일 없었는데……. 왜?”
소정은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아는 자신이 잘못 넘겨짚었나? 하며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뭘 도와줬을 거라는 것인지,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정 여사가 괜한 말을 했을 리는 없고……. 그래도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에 중요한 일이라면 정 여사가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를 따로 불러서 뭐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걱정할 필요 없다.
“향이 참 좋네요.”
리아는 가사도우미가 내온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소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태희랑 통 연락이 안 되는데……. 녀석, 오늘 가족 모임 있는 거 알기는 한 거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빠져나간 태희는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종적을 감췄다. 전화도 받지 않고, 갈 만한 곳을 모두 알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듯 집을 나서는 태희를 본 강 회장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강 회장보다 더 걱정해야 할 정 여사가 오늘은 웬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모이기로 한 거잖아요. 연락 안 되면 할 수 없죠.”
“전화가 안 되는데, 당신은 걱정도 안 돼?”
“걱정은 무슨. 서현이에게 연락하면 돼요. 아마 둘이 같이 있을 거예요.”
그제야 강 회장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난 식사 준비 잘 되나, 봐야 하니까 이만 갈게요.”
서재를 나선 정 여사는 복도에 선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방이 아닌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답답해서 바깥 공기라도 마셔야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원으로 나간 정 여사는 분수 옆 벤치에 앉아 어젯밤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태희가 아침 일찍 도망치듯 집을 나가게 한 그 사건을……. . . .
“태희야, 자니?”
분명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방문 너머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정 여사는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태희야, 안 자는 거 알아. 엄마, 들어간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리며 태희의 얼굴이 빼꼼히 나타났다.
“나, 방금 자려던 참인데…….”
“새벽 2시 넘게 자던 애가 오늘은 웬일로?”
정 여사는 헛소리 말라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태희는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정 여사는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태희,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오늘 정 여사는 모임에서 서현이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오늘 태희가 주 회장 집에 초대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돈 되더니, 집안끼리 앙금이 가셨나 봐요. 태희를 다 초대하고.
―서현 어머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모르셨어요? 아까 서현이가 전화로 그러던데. 오늘 태희가 사돈댁 초대받아서 간다고.
황당한 대답에 정 여사는 저도 모르게 단숨에 와인 잔을 비워버렸다. 아니, 얘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그리고 그런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이야길 했어야지! 한마디 할 생각으로 태희의 방에 들어선 정 여사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태희를 노려보았다. 태희는 자기 잘못을 아는지, 정 여사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느라 바빴다.
“다 알고 왔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설명해봐.”
“……정말?”
“그래, 서현이 어머니에게 다 들었어.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내가 왜 서현이 어머니를 통해서 들어야 하니?”
그 말에 태희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정 여사에게 달려왔다.
“엄마, 그건 내가 입이 무거워서 그런 거잖아. 난 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입을 다문 거라고.”
“입이 무거워서?”
정 여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사돈댁에 저녁 초대받을 일을 숨긴 것이 가족의 안녕과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웬만해선 자녀를 때리지 않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 여사는 태희의 등을 찰싹 소리 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무리 주 회장네와 사돈을 맺었어도, 아직까진 앙숙이라는 거 몰라? 그런데 초대받았다고 넙죽 거기에 가?”
“그럼 어떡해! 새언니가 대놓고 다른 남자 좋아한다는데. 그런 집에 작은오빠만 가게 해? 혼자 완전 바보 되는 건데?”
“뭐?”
순간 정 여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태희의 다음 말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엄마, 서현 어머니에게 다 들었을 거 아냐. 새언니, 결혼 전부터 다른 남자가 있었다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 남자와 쭉 만나왔고.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남자로 상대를 바꾼 거잖아.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너무 한 거 아니야?”
정 여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태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정 여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게다가 작은오빠, 새언니에게 맞고 사나 봐. 내가 다 들었어. 작은오빠가 새언니에게 맞고 신음하는 거.”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리아가 태호를 때린다니? 이보단 리아가 ‘마동석’을 팬다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주 회장 댁에 초대받았다는 서현 어머니의 귀띔은 리아의 불륜으로 내용이 확대되었다. 믿을 수 없지만, 가정폭력까지 덧붙여서…….
. . .
“후우.”
상념에서 깨어난 정 여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티를 내선 안 된다. 아직까진 집안사람 누구도 알아선 안 되니까. 그 이유로 점심에 들리겠다는 태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태희는 태호가 자신을 죽일 거라며 ‘걸음아 나 살려라.’ 아침 일찍 도망쳤다. 사실 정 여사도 리아와 태호를 마주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선 내키지 않더라도 직접 두 사람을 볼 필요가 있었다. 정 여사는 마음을 진정하려 길게 숨을 고르며 천천히 집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 뭔가 이상하다. 리아는 자신 앞에 놓인 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 점심은 들깨 소스를 발라 숯불에 구운 닭고기와 송로버섯이 곁들여진 마늘 파스타였다. 메인 셰프가 하나하나 핀셋으로 정성을 들여 장식한 요리는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리아의 접시만 어딘지 모르게 모양이 흐트러져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메인 셰프가 이런 걸 내오게 하진 않았을 텐데……. 혹시 가져오다 흔들렸나? 한마디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괜히 고용인에게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리아는 묵묵히 포크를 들었다. 그런데…… 또? 리아는 포크 손잡이에 묻은 이물질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정말 왜 이러지? 강 회장 집안일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최 과장이 휴가 갔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그래도 손잡이에 묻은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리아는 묵묵히 냅킨으로 이물질을 닦아냈다. 어느 정도 식사가 진행되고, 강 회장이 먼저 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새아가. 요즘 태호와 사이는 어떠냐? 진전은 있고? 한 달마다 보고 한다고 그랬었지?”
그 말에 리아는 생긋 눈꼬리를 휘었다. 어머, 진전이라니요. 지금 눈에서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 안 보이세요?……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갑작스러우려나?
“사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가 입원하는 동안, 리아가 많이 챙겨줬거든요.”
리아 대신 태호가 대답에 나섰다. 강 회장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었다. 새아가가 계속 병원에 들러서, 반찬도 챙겨주고 그랬다면서. 하, 사고 난 건 유감이지만, 덕분에 두 사람 사이가 좋아졌다니까 다행이구나.”
강 회장의 말에 모두 밝게 웃는데, 정 여사만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닭고기를 썰었다. 식사 내내 정 여사가 침묵만 지키자, 태호가 지나가는 듯 말을 걸었다.
“어머니, 태희는요?”
가족 모임에 빠지고 외출한 태희를 변호하려 정 여사가 말문을 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정 여사는 짧게 대답했다.
“일이 있나 보지. 가족 모임이라고 꼭 얼굴 내비칠 필욘 없잖니?”
“그렇긴 하죠.”
찬바람이 쌩 도는 정 여사의 쌀쌀맞은 말투에 태호는 더는 태희에 관해 묻지 않았다. 헛똑똑이 같으니라고! 정 여사는 리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태호를 흘겨보며 속으로 한탄을 내보냈다.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 앞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다니!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하지만,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거다. 태희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솔직히 처음엔 화가 났다. 앙큼한 것! 남자가 있었으면서 우리를 속이고 결혼을 진행하다니.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그래도 결혼은 결혼인데…….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도 억지로 결혼한 리아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자식만 아픈가? 다른 자식도 아프겠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어떻게 보면 모두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 정 여사는 ‘여적여’라는 말을 제일 싫어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니, 그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여자끼리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그래서 기분은 나쁘지만, 리아를 이해하기로 노력했다. 태호가 리아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맞았겠지, 이해하기로 했다. 만약에 괜히 맞았다면 태호 성격에 가만히 있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정 여사는 대인이 아니었다. 리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없었다. 고용인이 실수해서 흐트러진 리아의 접시를 보고도 그냥 내가게 한 것도, 포크 손잡이에 이물질이 묻은 것을 봤으면서도 모른 척한 것도 정 여사가 리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화풀이였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다. 옆에서 리아를 챙겨주는 태호를 보려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진실을 폭로할 순 없어도, 그녀도 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정 여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이유는……. 식사를 끝내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정 여사는 은근히 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말하지, 그랬니? 그랬다면 내가 도와줬을 수도 있을 텐데…….”
수수께끼 같은 말에 리아는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리아는 정 여사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반찬을 말하는 건가? 그건 분명 말씀드렸고 도와주셨는데?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무슨 말씀이신지…….”
“넌,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니? 내가 어떻게 몰라. 내 자식 일인데. 내 자식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인데 어미인 내가 어떻게 모르겠니.”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정 여사의 목소리가 커졌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모였다.
“하여간 난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앞으론 날 속일 생각 말렴.”
“모든 걸 알고 계시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리아가 가증스러워졌지만, 아직은 폭로할 시기는 아니다. 강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태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오자, 정 여사는 이쯤 해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내저었다.
“모른다니 됐다. 이제 그만하자.”
하지만 이렇게 끝내긴 못내 아쉬웠는지, 정 여사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명심해라. 사랑이란 건 쉽게 속일 수 없는 게 아니야. 어떻게든 드러나기 마련이지.”
그 한마디에 리아는 지금까지 “설마?”하고 부정했던 상상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여사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까?
“오래전부터 계속된 사랑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역시, 알고 계셨어! 리아는 저도 모르게 정 여사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