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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잠결에 내가 건드리면 어떡해? (55/81)

55. 잠결에 내가 건드리면 어떡해?2021.09.08.

“오빠.”

태호가 놀란 표정을 짓든 말든 태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태호 팔에 팔짱을 꼈다. 도대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만약 단둘이 있었다면, 태희의 목덜미를 잡아 당장 밖으로 끌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청담동. 주 회장의 집이자 리아의 본가였다. 태호는 속으로 화를 누르며 어색하게 태희를 향해 웃어 보였다.

“태희야, 네가 어떻게 여길…….”

그의 질문에 민 여사가 대신 대답했다.

“아까 우연히 밖에서 사돈처녀를 만났지 뭔가. 그래서 약속 없으면 같이 저녁 먹자고 초대했지.”

“아,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에선 태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초대를 받았어도 정중히 거절했어야지! 태희를 바라보며 입으론 웃어도 눈빛은 매우 살벌했다. 즉각 위험한 낌새를 느낀 태희는 슬그머니 팔짱을 풀고 옆에 선 리아의 팔에 매달렸다.

“새언니를 여기서 보니까 느낌이 달라요.”

“그래요?”

“네. 친정이 좋긴 좋은가 보다. 새언니 얼굴이 환해요.”

적진 한복판에 들어선 것도 모르고 태희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헤헤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면 민 여사와 주 회장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주었나 보다. 두 사람의 결혼은 결혼이고, 아직 강 회장 집안과는 꺼림칙한 사이일 텐데……. 리아는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민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민 여사는 강씨 집안이라면 더는 엮이기 싫다며 고개를 내젓곤 했었다. 그랬던 민 여사가 강씨 집안에 시집간 리아를 위해 먼저 태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다니…….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다.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민 여사가 만든 손만두를 맛있게 먹어야겠다. 다행히도 저녁 식사 분위기는 저번보다 부드러웠다. 오면서 리아가 가장 크게 걱정한 부분은 아버지 주 회장이 어떻게 태호를 맞을까 하는 것이었다.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태호를 대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 회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떠올린 채 태호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웬일로? 태희가 옆에서 있어서 그러나? 아니면 아빠도 엄마처럼 날 위해 일부러? 태호가 주 회장에게 두 사람 과거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리아는 혼자 머리를 굴렸다. 태호는 태호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태희를 쫓아버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분위기가 어째 태희도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할 만큼 화기애애했으니까. 막내로 듬뿍 사랑만 받아서일까? 눈치라곤 하나도 없는 태희는 민 여사가 내미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이건 간이 좀 싱겁네요. 원래 싱겁게 드세요?”

감히 맛 평가까지 내리면서……. 리아는 민 여사가 해준 음식을 억지로 먹느라, 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만약 오늘 그가 체하게 된다면 그건 오로지 태희 때문이다. 불청객이 따로 없는 동생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얘가 지금 오빠 엿 먹이려고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태희와 단둘이 있을 기회는 차를 마시러 거실로 이동하는 중에 찾아왔다. 태호는 태희의 팔을 움켜쥐고 재빨리 정원으로 끌어냈다. 반항할 줄 알았는데 태희는 잠자코 태호의 손에 이끌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그런 눈치가 있었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겠지.

“너, 미쳤어? 네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왜, 오빠?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같은 오빠인데 왜 리아가 오빠라고 부르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복하고, 왜 태희가 오빠라고 부르면 소름부터 돋는 걸까? 태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고뭉치 동생을 노려보았다. 태희는 태호의 그런 속마음도 모르면서 다시금 눈꼬리를 휘며 웃기 시작했다.

“난 누구보다 오빠 마음 잘 알아. 걱정하지 마. 난 누가 뭐래도 오빠 편이니까.”

태희는 태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말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그녀는 태호를 위해 이곳에 있는 거니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태호를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결혼한 여자를, 그것도 모자라 결혼하고 나서 또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 여자를 아내로 둔 불쌍한 작은오빠. 살짝 쌤통이란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오늘 사돈댁을 방문한다는데 적진 한가운데 오빠 혼자 뛰어들게 할 순 없었다. 얼마나 혼자서 뻘쭘하겠냐고! 하지만 태호는 그런 그녀의 뜻깊은 속도 모르고 싸늘한 눈으로 매섭게 쏘아보고만 있었다. 혹시라도 리아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태희가 안다고 하면 꽤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자상한 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은 나눈 형제가 아니던가. 우리가 남이냐고! 태희는 까치발을 하더니 위로하듯 태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힘내, 오빠.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알았지?”

“뭐?”

태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태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만 들어가자, 오빠. 다들 우리 찾겠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희는 도망치듯 집 안으로 뛰어갔다. 마음 같아선 태희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리아의 본가였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참을 수밖에. 태호는 멀어지는 태희의 뒷모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날 밤 태희는 청담동에서 하룻밤 묵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밤늦게까지 태호의 피를 말리다 가긴 했지만……. ***

“기분 참 묘하다.”

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자신의 침대에 앉은 태호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그와 결혼했다는 사실보다, 그가 지금 그녀의 집에, 그녀의 방에, 그녀의 침대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그를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랄까. 저번 방문 땐 간단하게 저녁만 먹고 돌아갔기에 그가 그녀의 방까지 들어올 일은 없었다. 민 여사는 하룻밤 지내기 불편하지 않게, 새로 침구 세트를 마련하는 등 이것저것 준비를 해두었다. 리아의 침대는 알래스카 킹사이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담한 퀸사이즈였다.

“아주 넓은 침대에서 잔다고 하더니……. 전혀 아닌데?”

뻔한 거짓말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태호는 예전 리아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잠버릇이 좀 심한 편이거든. 이 정돈 넓어 줘야 편히 잘 수 있어. 그동안 얌전하게 자느라 얼마나 불편했는데…….

“그렇다고 잠버릇이 심한 편도 아니고…….”

태호가 하나씩 짚어나가자, 리아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잠버릇이 심한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는 거야. 우리가 함께 잔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지금은 네가 다쳤으니까 내가 애써 자제하고 있는 거라고.”

“이런…….”

한숨이 섞인 것 같은 중얼거림이 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제라니, 지금 자제라고 했나? 지금 여기서 미치게 자제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데……. 몸 상태만 아니었다면 벌써 예전에 자제력 따윈 저 멀리 내던졌을 것이다. 그가 사고를 당한 덕분에 그녀가 마음을 깨달았다곤 하지만, 지금은 그 사고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거야?”

멀뚱히 선 채로 리아가 침대로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자, 태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아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만 볼 뿐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태호가 묻자, 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안 되겠어. 침대가 너무 작아. 잠결에 내가 건드리면 어떡해?”

서로 조심하며 껴안고 자기는 했지만, 신혼집의 침대는 무려 성인 4명이 편하게 잘 수 있는 알래스카 킹사이즈였다. 자칫 위험하다 싶으면 급히 옆으로 몸을 굴릴 수 있는……. 혹시라도 잠결에 태호의 가슴을 꾹 눌러버리기라도 한다면? 순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난 그냥 소파 침대에서 잘게.”

그래, 아내가 남편을 지켜줘야지. 하지만 그녀가 소파 침대로 한 걸음 다가가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난 태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

“내가 조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옆에서 자.”

따뜻한 품에 안기고 나니까, 어떻게 혼자 소파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행동하는데 맞다. 자칫 잘못했다간 지금까지 자제한 노력이 모두 헛되게 돼버릴 테니까.

“아니, 그냥 소파 침대에서 잘 거야.”

리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대신…….”

그리고 유혹하는 것처럼 낫게 속삭였다.

“굿나잇 키스해 줄게.”

굿나잇 키스가 뭐라고. 결혼한 사이에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애를 태우듯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에 태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포개지고 그녀의 향기가 어루만지듯 그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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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다디단 굿나잇 키스였다. ***

[어머, 도와주러 간 줄도 모르고 오빠가 그랬단 말이야?]

휴대폰 너머로 흥분한 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니까.”

태희는 투덜거리며 절친인 서현에게 오늘 저녁, 청담동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혹시 새언니에게 맞고 신음한 거, 내가 들었을까 봐 창피해서 그런가?”

[흠, 그럴지도 모르겠다.]

천하의 강태호가 아내에게 맞고 산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으려고 할까.

“오빠는 진짜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내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데. 서현이 너 말곤 아무에게도 말 안 했잖아. 엄마도 몰라, 아무도 모른다고.”

[맞아, 맞아.]

휴대폰 너머에서 서현이 격하게 동의했다.

[나도 우리 엄마 밖에는 이 얘기 아무에게도 안 했어.]

“뭐? 너, 엄마에게 말했어?”

놀란 태희가 언성을 높였지만, 서현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랑 엄마랑, 우린 비밀이란 게 없잖아. 어떻게 나만 알고 있어? 그리고 우리 엄마, 입 엄청 무거워.]

그건 그렇다. 안 그랬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서현에게 털어놓은 비밀들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여기저기 소문났을 것이다. 서현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근데 우리 엄마, 술만 들어가면 가끔 비밀이 튀어나오긴 한다? 근데 또 우리 엄마, 밖에서 술 마시는 건 완전 연중행사잖아. 일 년에 한 번, 와이너리 방문할 때뿐인데…….]

그렇긴 하지. 잠자코 서현의 말을 듣던 태희는 순간, 뭔가를 깨닫고 벽에 걸린 캘린더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캘린더 숫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태희는 서둘러서 휴대폰으로 재차 날짜를 확인했다. 아니! 그날이 바로 오늘이잖아!

“서현아, 그럼 오늘 너희 엄마 와이너리 가셨어?”

[응. 아직 안 들어오셨는데. 모임이 늦어지려나?]

불안하게도 오늘 그 모임엔 정 여사도 참석한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서현이 엄마랑 우리 엄마랑 같이 술 한잔했다는 거? 헐! 어떡해? 전화를 끊은 태희는 불안한 마음에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통화하는 도중에 정 여사가 집에 돌아왔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긴 했었다. 내려가 봐야 하나? 태희는 초조한 얼굴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서현 엄마가 정 여사에게 모든 걸 말해버렸다면 정 여사 성격에 당장 태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태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다시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그때였다. 똑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희야, 자니?”

덜컹, 태희의 심장이 저 아래로 툭 떨어졌다. *** 토요일까지 청담동에 머무른 리아와 태호는 일요일 점심엔 한남동을 찾기로 했다. 입원할 동안 정 여사가 반찬을 챙겨주었으니, 퇴원하고 나서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게 도리일 테니까.

―급히 처리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긴 태호가 회사로 가버리는 바람에 리아 혼자 먼저 한남동에 도착했다.

“새아가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정 여사가 제일 먼저 리아를 맞이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오늘 정 여사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겉으론 미소 짓고 있지만, 뭔가 싸늘한 눈빛이랄까?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뒤에 이어지는 정 여사의 말이 확신을 주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말하지, 그랬니? 그랬다면 내가 도와줬을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리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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