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2021.09.05.
“……나, 사실은 그날…….”
리아는 태호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그날 밤,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다.
“너에게 헤어지자고 한 날 말이야.”
리아 입에서 무거운 내용이 흘러나오자, 태호의 표정이 순간 경직되었다. 하지만 리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굳어진 표정은 이내 풀렸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에 그는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헤어질 수 없다면서 네가 엄청 화냈었잖아. 기억나?”
물론 기억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그를 알고 지냈지만, 그날처럼 화내는 태호의 모습을 본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크게 소리를 지르며 폭언을 퍼부었다면 덜 무서웠을까? 헤어지자는 말에 그는 냉기 어린 눈빛으로 리아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었다. 피부를 꿰뚫고 박힐 것 같은 살벌한 눈빛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었다. 태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었다.
―누구 마음대로 헤어져? 내가 널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의 냉담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아가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제발 헤어지자고, 너와 나는 여기까지라며 흐느끼는 리아에게 그도 무너지고 말았다. 태호는 흐느끼는 그녀를 품에 안고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사실은 고마웠어.”
“고맙다니 뭐가?”
리아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태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 그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매우 화내긴 했었다. 당연하다. 사랑하는 여자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는데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을까. 리아가 없는 미래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별 통보는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저주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눈물을 펑펑 흘리며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리아를 보자, 또 다른 지옥이 태호를 덮쳤다. 어쩌다 눈물을 글썽거리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눈물을 보이는 건,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흐느낀다고 생각하자, 태호는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펑펑 울었던 리아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맙다니, 어떻게 고맙다는 거지? 리아는 태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화내줘서, 속으론 기뻤어……. 사실은 나라고 헤어지고 싶었겠니? 머리로는 헤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도 쉽지는 않았어.”
모순이겠지만, 그가 헤어질 수 없다며 불같이 화를 낼 때, 안도감을 느꼈고, 엉엉 우는 그녀를 그가 품에 안아주자, 오히려 불안했다. 아, 결국 너도 이별을 받아들이는구나. 그녀 뜻대로 해주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가슴 한쪽이 텅 비어버리는 것처럼 괴로웠었다. 사랑해서 이별한다는 말이 진실인 것 같으면서도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리아는 몇 번이나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날이 밝으면 이젠 그와 끝이라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울다 지쳐 태호의 품에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텅 빈 옆자리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는 그날 아침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까 넌 이미 가고 없더라. 조금 서운하긴 했어. 하지만 그보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널 다시 봤다면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거든.”
그 말에 태호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리아의 손을 잡아, 그녀 손등에 꾹 입술을 눌렀다. 그날 태호는 품에서 잠들어버린 리아를 끌어안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참 동안 고민한 결과, 지금은 리아를 위해 잠시 헤어지는 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에 그때 놓아주지 않았다면 리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더는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가 대신 아파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일부러 해외 지사 근무를 지원한 것도 리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녀가 덜 방황할 테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리 마주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는데…….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은 벽을 깨어 부순 듯이 이젠 희미하게나마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태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그 말에 자석에 끌리듯 리아는 태호 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곧 뭔가를 깨달은 듯 급히 뒤로 몸을 뺐다.
“잠깐, 너, 아직 갈비뼈 안 나았잖아.”
깜빡 잊었다. 그는 아직 환자다.
“괜찮아.”
괜찮긴 뭘 괜찮아! 주치의가 그랬다. 남편을 사랑한다면 제발 조심해 달라고. 절대로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한다고.
“안 돼. 그러다 덧나면 어쩌려고 그래?”
“조금 아프고 말겠지. 걱정하지 마, 아프다고 안 죽어.”
태연하게 대꾸하는 태호를 보며 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하지만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고전 사극에 나오는 대사처럼 정말 그랬다. 아무리 그를 꼭 껴안고 싶어도, 그가 아프게 되는 건 싫었다. 그래도 어제는 손만 잡고 잤으니까, 오늘도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유리 인형 다루듯 조심하면 될 거다.
“그러면 오늘은 살짝만 껴안고 잘게.”
리아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살금살금, 최대한 그의 가슴을 피해서……. 그녀가 허리에 팔을 두르자, 태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앗! 조심해.”
화들짝 놀란 리아가 뒤로 물러났지만, 태호는 그녀의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빼지 않았다. 리아가 걱정한 대로 약간 통증을 느껴졌지만, 참을 만했다. 아니, 아픔보다는 온몸을 감싸는 포근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태호는 리아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두 눈을 감았다.
손만 잡는 것과 이렇게 품에 안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가끔은 이게 모두 꿈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어지는 건 아닌지……. 안다. 바보 같은 걱정이라는 거. 태호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여 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하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행복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잠시라도 좋으니까, 가슴 벅찬 행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
―우리 오빠, 힘들어서 안 돼.
밤이 깊어갔지만, 리아의 말이 계속해서 수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태호 씨, 힘들어서 안 돼.’도 아니고 ‘오빠, 힘들어서도 안 돼.’도 아니고. ‘우리 오빠, 힘들어서 안 돼.’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다.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의 육감은 무시하지 못한다고 뭔가 꼬인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거다. 답답하고 초조한 수진은 유정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리아, 수진, 유정 세 사람 모두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였지만, 어떨 때 보면 리아는 수진보다 유정에게 더 손쉽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유정이 수진보다는 허심탄회하게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고, 전화하면 언제나 전화를 받았다. 만약에 태호와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었다면, 리아는 둘 중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것이고 수진에게 하지 않았다면 분명 유정에게 했을 것이다. 역시나……. 늦은 시각이었지만, 신호음 한 번 만에 유정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수진아? 너 완전 귀신이네.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응? 무슨 소리야?”
놀리는 듯한 유정의 말투에 수진은 뜨끔하고 말았다. 어떻게 알고 전화했냐니! 너 혹시 뭔가 알고 있어? 유정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 나 지금 민훈 선배랑 술 마시는 알고 전화한 거 아니었어?]
“민훈 선배?”
[응. 저번에 선배 우연히 만났다가 시간 되면 한잔하자고 했었거든. 너도 지금 나올래?]
“지금 거기 어디야?”
수진은 재빨리 펜을 꺼내 두 사람이 있는 장소를 받아 적었다. 민훈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는 매일 회사에서 리아를 보니까, 어쩌면 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알았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은 수진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
“정말 괜찮겠어?”
아침 식탁에서 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태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는 미루지 말고 오늘 가자.”
오늘은 일주일의 마지막 고비인 금요일. 퇴근 후, 청담동 리아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원래는 주 회장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친정에 갈 예정이었지만, 사고로 태호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연기되었었다. 태호는 더 미루게 된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아직 장인, 장모님에게 제대로 찾아뵙고 인사드린 게 아니니까. 금요일에 친정에서 저녁을 먹고, 토요일까지 머물 계획이다. 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전 같았으면, 친정에 간다고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물론 태호 때문이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니까. 아직은 두 집안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니니, 태호에게 청담동 방문은 가시방석에 앉는 느낌일 것이다. 게다가……. 리아는 버터와 딸기잼을 머핀에 바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태호야.”
“오빠.”
그가 호칭을 바로잡자, 리아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되고 ‘네가’도 되는데 이상하게도 ‘태호’라고 이름을 부르면 즉각 ‘오빠’로 정정했다. 물론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태호야.’라고 부르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고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오빠.”
리아가 상냥하게 오빠라고 부르자, 태호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난데없이 약속이라니? 태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따가 저녁 먹을 때, 억지로 안 먹겠다고 약속해 줘. 특히 우리 엄마가 해준 음식.”
“뭐?”
곤혹스럽다는 듯 태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으니까. 눈치챘나? 태호는 조심스럽게 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리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해도 다 안다.
“많이 먹을 필요 없어. 적당히만 먹어. 적당히. 아빠도 엄마가 해준 음식은 잘 안 드셔.”
아무리 주 회장의 아내 사랑이 차고 넘친다고 해도, 음식 평가 앞에선 냉정했다. 긴긴 결혼생활 동안 소화제를 달고 살 순 없으니까. 다행히 민 여사는 요리에 취미가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기에 지금까지 주방에 발걸음을 들여놓는 일도 드물었다. 리아가 요리에 취미가 없는 것도 민 여사의 영향이 컸다. 그랬던 민 여사가 민수의 말에 의하며 태호에게 먹일 거라며, 손만두를 빚고 있단다. 저번처럼 태호가 그릇을 싹싹 비우길 기대하며……. 적당히……라……. 태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아가 준비한 아침상을 내려다보았다. 메뉴는 간단했다. 양송이수프와 양상추 샐러드. 접시엔 토스트와 베이컨 구이, 계란 프라이가 담겨있었다. 양상추 샐러드는 포장만 뜯어 그릇에 담는 완제품이고 수프 역시 뜨거운 물만 붓는 주원식품 즉석 제품이다. 하지만 수프는 물 조절에 실패해서 맹물에 가까운 맛이 났다. 리아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는 동안 태호는 서둘러 수프 가루 하나를 더 넣었다. 계란 프라이도 ‘써니 사이드 업’으로 해준다더니, 노른자가 다 터져서 결국엔 정체불명의 달걀부침이 되고 말았고, 토스트도 첫 번짼 너무 타버려서 다시 구워야만 했다. 그래도 리아가 손수 차려준 아침인데 어떻게 적당히 먹을 수 있을까! 민 여사의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리아의 어머니가 해주신 요리인데 어떻게 적당히 먹을 수 있냔 말이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말에 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한번 크게 체한다.”
하지만 리아의 그런 걱정은 민 여사의 요리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태호를 힘들게 했다. *** 오늘따라 매끄러운 차량흐름 덕분에 리아와 태호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청담동에 도착했다. 막힐 걸 예상하고 집을 나섰던 태호는 기분 좋게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던 태호는 민 여사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얼굴을 보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등장에 태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