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81)

53. 이제는 말할 수 있다.2021.09.01.

왜 하필 내 앞에서 이러는 거야? 수진은 신혼부부 연기에 한창인 리아와 태호를 바라보며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힘겹게 바로 잡았다. 살짝 입만 맞추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태호가 고개를 들자, 이번엔 리아가 발돋움하며 입술을 겹쳤다. 쟤, 왜 저래? 수진은 지금 앞에 서 있는 이가 자신이 아는 그 주리아가 맞나? 의심해 보았다. 그녀가 아는 주리아라면 강태호의 ‘강’ 자만 들어도 치를 떨며 싫어해야 하니까. 행복한 신혼부부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하던 리아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는 아무리 연기라지만, ‘너무나 행복해서 숨넘어가겠어요!’ 하는 얼굴의 리아가 서 있었다. 요 며칠 사이, 리아의 연기가 주연 배우 급으로 나아진 게 아니라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혹시라도 남녀가 한집에 살다가 눈이 맞은 건 아니겠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옛말이 괜히 생긴 것도 아닐 텐데……. 상상만으로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수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냐.”

수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리아는 그제야 옆에 수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호를 보고 반가운 나머지 옆에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화들짝 놀란 리아는 태호의 품에서 벗어나며 멋쩍게 수진을 바라보았다.

“안녕, 수진아. 지금 퇴근?”

“응.”

속에선 열불이 났지만, 수진은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미소 지었다. 신혼부부끼리 애정행각 벌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으니까. 괜히 일부러 저러는 걸 거야. 수진은 마음 편하게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어쩌면 반대로 두 사람은 사이가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더 과장되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기하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서로 각각 스캔들로 골치 아팠으니까. 그래도 확실히 알아내려면 우선 타인의 눈을 피해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야겠지? 수진은 환하게 웃으며 리아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마침 잘됐다, 리아야. 내가 방금 태호에게 언제 한번 함께 밥을 먹자고 했거든.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 먹을래?”

수진이 아는 리아는 흔쾌하게 ‘그래.’라고 나올 게 분명하다.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해도 리아는 웬만하면 수진을 보러 나오는 편이었다. 수진에게 리아는 아주 마음씨 착한 친구였다. 그랬는데…….

“미안, 수진아. 오늘은 안 돼.”

“어?”

‘안 될 것 같아.’도 아니고, 단호하게 ‘안 돼.’라니? 수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가 그럴 리가 없는데……?

“선약 있어?”

“아니, 선약 있는 건 아니고. 우리 오빠, 힘들어서 안 돼. 어제 퇴원했잖아.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어야지. 미안해, 수진아. 다음에. 우리 다음에 밥 먹자.”

그 말을 끝으로 리아는 수진과의 팔짱을 풀고 냉큼 태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었다. 그리고 그대로 태호와 팔짱을 낀 채,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수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리아와 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를 거절한 건 그렇다고 치고……. 왜 태호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그것도 그냥 오빠가 아니라 우리 오빠? 호칭이 너무 다정하잖아! 혹시? 리아와 태호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수진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냐, 아닐 텐데……. 리아 성격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속으로 계속 부정했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슬금슬금 수진의 몸을 휘감았다.  

  ***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의외였어.”

차에 오르자마자, 태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차를 출발하려던 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태호을 바라보았다.

“뭐가?”

“네가 저녁 먹자는 수진이 말을 거절한 거.”

“아…… 그거.”

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이내 차를 출발했다. 흠, 그러고 보니 너무 매정하게 잘랐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하지만 그때 리아의 머릿속에는 태호밖에 없었다. 퇴원 후, 첫 출근이라서 몸이 피곤할 텐데 괜한 자리에 그를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아마 지금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너, 피곤할까 봐 그랬지.”

“단지 그래서뿐이야?”

솔직히 그것만은 아니다. 어제 한 사장이 관련된 비리를 듣고 나니, 태호가 편안히 수진을 대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수진은 그녀의 친구이지만, 태호에겐 꺼림칙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진과 친구 사이를 끝낼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래도 태호 앞에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무슨 일이래? 정 선배도 그렇고 수진이도 그렇고. 갑자기 주변 인물을 예전처럼 대하지 못하고 잔뜩 경계해야 한다니……. 하, 마음이 무겁다. 만약 그녀 혼자였다면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그녀의 곁에는 태호가 있으니까.

“밖에서 먹고 들어가.”

리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호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리아가 친구 수진을 챙기지 않고 자신을 먼저 챙겨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괜히 더 물어보다,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 어제 아가씨가 가져다준 반찬도 있고, 찌개만 끓이지 뭐.”

“네가?”

리아가 요리하겠다는 말에 태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새 몇 번 해봤다고 요리에 자신이 붙은 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간단하게 미트볼 넣어서 김치찌개…….”

“아니, 그러지 말고, 밖에서 먹자.”

태호는 서둘러 리아의 말을 끊었다.

“태국 요리 어때? 나, 팟타이 먹고 싶은데.”

딱히 팟타이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참치통조림도 아니고 스팸도 아니고 미트볼을 김치찌개에 넣고 끓일 생각을 한다니! 맛을 보지 않아도 기묘한 음식이 될 게 뻔했다. 다행히도 리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다.

“그래, 그러자. 나도 팟타이 끌리네.”

솔직히 집에 가서 언제 찌개 끓여서 언제 밥을 먹나 걱정이 되긴 했다. 민수를 닦달해 숨겨진 이야기를 듣느라,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몹시 배고프기도 했다.

―그래, 네 예상이 맞아. 태호는 처음부터 이혼할 생각 없었어. 진심으로 너와 결혼한 거라고.

―그러면 태호는 왜 그때 나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고 털어놓지 않았어?

―그랬으면 네가 믿었겠어?

민수의 물음에 리아는 믿었을 거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민수는 달래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태호는 리아, 네가 자신을 몹시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괜히 부담스럽게 다가가기보다는 정략결혼이라도 함께 있다 보면 네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 뭐, 사실 그렇게 됐고…….

민수는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처한 건 우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부도 위기가 오지 않았다고 해도 태호는 두 집안의 정혼을 꺼내며 주 회장을 설득할 계획이었다고 귀띔해주었다. 리아는 민수가 모든 내용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민수는 자기가 아는 건 여기까지만이라고 강조했지만, 뭔가 더 깊은 내막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민수에게 알아내지 못한 부분을 태호에게서 묻고 싶진 없었다. 민수가 그녀에게 털어놓은 걸 알게 되면 민수 체면에도 문제가 있을 테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요리가 나오자 리아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수진이 아버지, 그러니까 한 사장님……. 그렇게 비리가 많아?”

태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가 한 사장과 직접 마주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경쟁회사의 사장이기 전에 친구 수진의 아버지였다.

“그러면 나중에 수진이도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거야?”

“글쎄, 아버지가 그렇다고 딸까지 해고당하는 건 아니겠지만, 수진이가 견디지 못할 거야.”

“많이 심각한 거야?”

“응.”

태호는 짧게 대답하고는 팟타이를 덜어 리아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어쩌면 한 사장의 비리는 ㈜정직이 둘로 쪼개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주원식품에게 몰아쳤던 두 번의 부도 위기 역시도 한 사장의 농간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리아에겐 말을 아꼈다.

“정민훈 대리는 어때? 아무 연락 없었어?”

이번엔 태호가 질문을 던졌다. 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어제 사무실에 왔었다고는 하는데……. 전화하니까 안 받더라고. 어차피 다음 주까진 휴가니까, 그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조심해.”

“알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아는 민수에게 민훈의 관한 일도 물어봤었다. 민수가 알고 있다고 말하자, 리아는 어떻게 그것까지 숨겼느냐고 쏘아붙였다.

―정 대리 일은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

그러자 민수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었다. 민수와 점심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표정이 어두워졌나 보다. 태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아의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앞으론 뭐든지 나와 상의해.”

마치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그가 말했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응. 그럴게.”

리아는 태호의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믿을 차례다. 곧바로 갈 수 있는 길을 한 바퀴 삥 돌아온 게 억울해서라도 말이다. 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포크로 팟타이를 돌돌 말아 올렸다. ***

“엄마, 엄마! 엄마는 아빠랑 정략결혼 아니지? 큰오빠도 완전 배 째라고 난리 쳐서 연애 결혼한 거고.”

숟가락으로 국을 뜨던 정 여사는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막내딸을 바라보았다. 태희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정략결혼은 아닌 거 같아. 작은오빠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새언니랑 완전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고.”

왜 갑자기 이런 주제가 튀어나왔는지 몰라도, 정 여사는 대수롭지 않게 태희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래도 두 사람, 이제부터 노력한다잖니. 한 달마다 진행 상황 보고한다며. 내가 볼 땐 둘 사이가 좀 나아진 것 같던데……. 태호 입원했을 때, 새아기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

“그거야 남의 눈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태희는 한 손으로 얼굴을 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난 하늘이 무너져도 정략결혼 안 할 거야. 알았지?”

“갑자기? 너, 비혼주의자라며. 세상에 멋진 남자가 너무 많아서 절대로 한 남자만 바라보며 못 살겠다며.”

“응. 그러니까!”

순간 흥분했는지 태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엄마! 지금 엄마 며느리가 그렇다고! 결혼 전부터 만난 남자를 결혼해서도 만나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를 좋아한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저녁 식탁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꼴이 될 거다. 하, 난 너무 입이 무거워서 다행이야. 새언니가 남편 복은 없어도 시누이 복은 있다니까. 태희는 목구멍 깊숙이 말을 꾹꾹 눌러 내리며, 앞에 놓인 오징어튀김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 대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었다. *** 서로 바라만 보고 누워 있어도 가슴 설레게 좋다니……. 뭐에 단단히 쓰인 게 분명하다. 집에 돌아온 리아와 태호는 샤워를 마치고 한 침대에 누웠다. 어제처럼 오늘도 손만 잡고 자야 하지만, 서로를 마주하는 두 사람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긴 세월을 기다렸는데, 고작 4~5주를 못 기다릴까. 리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태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괜히 코끝이 뭉클하게 시린 것 같다. 다시는 이렇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을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까. 손길은 서서히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로 향했다.

“……나, 사실은 그날…….”

리아는 태호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그날 밤,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다.

“너에게 헤어지자고 한 날 말이야.”

리아의 입에서 한숨 같은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99193110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