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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아, 정말 미치겠다. (52/81)

52. 아, 정말 미치겠다.2021.08.29.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뿐인데……. 온 세상이 변했다. 미세먼지 가득한 회색빛 하늘마저 상쾌하게 보이고, 평소보다 밀리는 교통체증에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회복 안 된 태호의 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만 잡고 잤지만…….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손만 잡고 잤다. 그래도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갈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역시…… 사랑하면 모든 게 달라지는구나. 이런 기분이라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 아, 맞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호가 바로 원수였지. 리아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신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모두 좋은 아침.”

웃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서며 리아는 팀원 한 명, 한 명과 아침 인사를 나눴다. 마음 같아선 팀원 모두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팀장님.”

리아가 기분 좋다는 걸 단번에 알아챈 채영은 부러움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역시 신혼은 신혼이야. 이사님이 퇴원해서 집에 왔다고 얼굴빛부터 다르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요즘 팀장님 때문에 제 비혼주의가 마구 흔들려요.”

“정말?”

예전 같으면 채영의 어깨를 붙잡고, “안 돼, 채영 씨! 비혼주의 고수해.”라고 말렸겠지만, 사랑의 꿀맛을 알아버린 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채영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아, 그런데…… 팀장님.”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행복은 다음에 이어진 채영의 말로 인해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제 팀장님 반차 내고 병원 가신 다음에 정 대리님이 오셨었어요. 급히 팀장님을 뵐 일이 있었던 것 같던데, 혹시 연락 못 받으셨어요?”

그 말에 리아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민훈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 없는 텅 빈 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태호에게 고백받고 들뜬 나머지, 민훈의 일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과거 부모끼리 얽힌 일은 물론이고, 현재 산업 스파이로 의심되는 상황까지 떠올리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선배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쎄, 아무 연락 못 받았는데…….”

리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민훈 이야기에 리아의 표정이 어둡게 변하자, 채영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나, 정 대리님이 요즘 계속 휴가 쓰는 이유가 있었네. 팀장실로 들어간 리아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민훈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성 메시지를 남길 생각은 들지 않아 리아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다음 주까진 휴가니까, 회사로 돌아오면 그때 가서 민훈의 거처를 고민해도 늦지 않을 거다. 리아는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회의에 들어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출근하게 돼서 그렇게 기쁘십니까?”

밝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서는 태호에게 남 비서가 투정하는 투로 물었다. 태호는 입원하는 내내, 하나도 빠짐없이 회사 일을 병실로 가져오게 지시했었다. 말만 입원 중이지, 평소 업무량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회사 일을 처리했던 태호다. 그런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서자, 남 비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일에 중독되었다지만 이건 너무나 중증이거든. 하지만 태호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남 비서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성후야,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리고 미안해.”

“네? 고생 많았다는 건 알겠는데 갑자기 미안하다니요?”

“흠.”

남 비서의 두 번째 물음에도 태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짧게 마른기침만 내뱉고는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갔다. 남 비서에게 미안한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제 남 비서가 옆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있었다면 리아의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멱살부터 잡았을 테니까. 다혈질은 아니지만, 리아에 관한 일이라면 가끔 어쩌다 이성을 잃기도 한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다른 하나는 리아가 핸드백으로 남 비서를 후려갈긴 이유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리아는 사고로 그가 병원에 실려 간 후,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때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에 눈이 멀어 다짜고짜 손이 먼저 나갔던 거다. 자신이 좋아하는 태호가 다른 여자를 눈앞에서 끌어안고 있어서…….

“후.”

실수를 깨달은 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태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폭력을 행사하는 아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다니. 그 역시 사랑에 눈이 먼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클럽 루프톱에서 키스한 날 이후로 지금까지 쭉 눈이 먼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자리에 앉은 태호는 잠가두었던 첫 번째 서랍에서 사진 액자를 꺼냈다. 사진 속에는 로스카보스 바닷가를 걷는 리아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신혼여행 도중 찍은 사진인데, 리아가 언제 사무실로 들이닥칠지 몰라서 책상 위보단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젠 마음 편히 책상 위에 놓을 수 있다. 사진을 바라보는 태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태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확히 해둘 게 있다. 오전 회의를 끝낸 리아는 점심 휴식 시간을 이용해 민수를 찾아갔다.

“네가 웬일로 나랑 점심을 먹재?”

“긴히 할 이야기가 있거든.”

“할 이야기?”

리아는 회사 근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꾹 입을 다물었다. 주문한 요리가 나오고서야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민수야, 너 태호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민수는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민수를 향하는 리아의 두 눈에 의혹이 가득했다. 태호에게 고백을 받은 건 고백을 받은 거고……. 그렇다면 두 사람의 결혼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계획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부도 위기에 몰린 주원식품을 돕다 보니 우연히 정략결혼이 거론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결혼할 계획으로 태호가 먼저 주 회장을 찾았던 걸까?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멀쩡한 주원식품을 부도 위기로 몰았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혹이라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태호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순 없었다. 그러다 혹시라도 핑크빛 무드가 잿빛으로 바뀔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혼자 고민하던 리아는 민수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수를 태호의 사무실에서 부딪친 것도 그렇고, 예전부터 두 집안 사이가 어떻든 전혀 신경 안 쓰고 민수와 태호는 친구 관계를 유지했으니까. 리아가 태호와 헤어지고 나서도, 민수는 정기적으로 태호를 찾아가 술잔을 기울였다. 결국 리아는 만만한 민수를 닦달해서 의문점을 풀기로 했다. 그런 리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민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컵을 들어 올렸다.

“태호가 너 좋아한 거, 당연히 알지. 네 남친이었잖아. 그것도 나 때문에 사귀게 된 건데.”

“그거 말고. 나랑 헤어지고 나서도 태호가 날 잊지 못한 거 쭉 좋아한 거 알고 있었냐고.”

“푸웁.”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마시던 민수가 사레에 걸린 듯 물을 내뿜었다.

“켁켁.”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위기를 모면하려는 서툰 연기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민수가 누구인가? 엄마 배 속에서 함께 지낸 그녀의 쌍둥이다. 다른 건 몰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진 민수의 두 눈에서 리아는 그가 긴장 상태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주민수. 넌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털어놔.”

리아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으스스할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수, 너. 우리 결혼에 관해서…… 내게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아니야?”

확신에 찬 리아의 목소리에 민수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제길, 안 통하네. 아 씨, 오늘은 아침 안 먹고 와서 배고픈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점심은 다 날아간 거 같다. 민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얌전히 손에 든 물컵을 내려놓았다. ***

[언제 퇴근해? 오늘은 야근할 거 아니지?]

휴대폰 너머에서 상냥한 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호는 힐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중으로 끝마쳐야 할 업무가 아직 한참 남았지만, 늦게 퇴근할 거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응, 제시간에 퇴근할 거야.”

[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너 아직 운전할 수 없잖아.]

오늘 아침에도 태호는 본가에서 보낸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했다. 퇴근길에는 남 비서가 운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리아가 직접 데리러 온다는 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럼.”

아직 퇴근까진 서너 시간 남았지만, 리아를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렜다. 전화를 끊은 태호는 주어진 시간 안에 남은 업무를 끝낼 생각으로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펼쳤다. 덕분에 퇴근 시간 직전에 모든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살살 좀 하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오는 줄 알겠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남 비서는 태호가 건네는 결재서류를 받아들며 투덜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랑이가 아니라, 여우가 쫓아오는 거야.”

“네?”

“오늘은 모두 정시에 퇴근하지.”

태호는 어리둥절한 남 비서를 집무실에서 내보내고 빠르게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리아와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려서는데, 마침 맞은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 이사님.”

태호를 발견한 수진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퇴원하고 나서 오늘 첫 출근이셨네요.”

두 사람은 사석에서는 말을 놓지만, 사내에선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태호가 그러길 원했다. 중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라곤 하지만, 태호는 수진과 아무런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편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불쾌할 정도였다. 사석에서 말을 놓는 이유 역시 수진이 리아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첫 만남에서 호감을 느꼈던 유정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리아의 친구 관계까지 그가 이래라저래라 관여할 순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태호는 수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만해서 다행이에요. 리아가 걱정 많이 했죠? 언제 시간 있으면 리아와 함께 식사해요.”

수진의 입에서 리아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태호는 불쾌한 감정을 감추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지나쳐버리던 태호가 두 번이나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용기를 얻은 수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래는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 만나서 식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맞다. 두 사람 결혼은 그런 게 아니었지.”

물론 수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감정 상하라고 한 말임도 분명하였다.

“……그런 게 아니라니, 무슨 뜻이지?”

태호는 얼어붙을 것처럼 싸늘하게 상대를 쏘아봤다. 하지만 수진은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는 사실에 행복하기만 했다. 그것도 존대가 아닌 반말로……. 그래, 태호야, 너도 억지로 결혼해서 불행하잖아. 수진은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나한테까지 물어볼 필요 있어?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까 리아에게 잘 해줘. 리아, 지금 아주 힘들어해.”

“그건 네가 참견할 일이…….”

그때 멀리서 들리는 커다란 소리가 두 사람 대화를 끊었다.

“오빠.”

태호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녀가 지금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리아는 진심으로 태호를 발견해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힘이 가지 않게 조심하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사랑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

순간 가슴에 통증을 느낀 태호의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태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굳은 표정으로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갈비뼈만 아니었다면 숨 못 쉬게 끌어안았을 텐데. 아, 정말 미치겠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순 없고……. 결국 태호는 껴안는데 대신 고개를 숙여 리아의 입술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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