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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숨 막히게 안아줄게. (51/81)

51. 숨 막히게 안아줄게.2021.08.25.

뜨거운 입술이 닿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방금 들은 태호의 고백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혹은 뜻을 잘못 해석한 건 아닐까?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잖아. 한 번이라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신호를 줬어야 말이지. 그는 그녀보고 눈치가 느리다고 했지만……. 아니다. 눈치가 느린 게 아니라, 그가 너무나도 감쪽같이 감정을 철저히 숨긴 거다. 항상 다른 여자와 스캔들을 일으키며, 차디찬 얼굴로 대했는데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입술이 열리고 그가 한 치의 틈도 없이 안으로 파고들자……. 아, 말 보단 행동이라고!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안에서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절실해서……. 눈물 날 같은 애틋한 감정이 그대로 입술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아, 태호야. 리아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이제까지 네 마음을 몰랐을까. 이렇게나 절실히 원하고 있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하나로 얽힌 숨결이 가슴 벅차게 좋아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의 열기를 나누었을까?

“……음.”

태호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자극받은 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와락 끌어안았다.

“윽.”

그러자 그와 동시에 태호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깜짝 놀란 리아는 곧바로 팔을 풀고 태호에게서 떨어졌다. 아직 갈비뼈가 다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너무 세게 끌어안았나 보다. 흑, 미안해서 어쩌나. 태호는 고개를 숙인 채로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미안. 가슴에 통증이 와서…….”

사과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인데……. 리아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태호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많이 아파?”

리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태호는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야, 괜찮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으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되겠어. 침실로 가자.”

그 말에 태호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지금은 그냥 여기 있는 게 나아.”

통증 덕분에 불타오르는 불을 가까스로 끌 수 있었는데 지금 이 분위기로 침실로 갔다간……. 갈비뼈가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리아를 세게 끌어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더는 그녀에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진통제 가져다줄까?”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태호는 두 눈을 감으며 힘없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마쯤 지났을까? 통증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자, 리아는 흘러내린 태호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나만 눈치 느린 거, 아니거든. 너도 만만치 않거든. 병실에 갈 때마다 너만 보면 얼굴이 빨개졌는데, 전혀 몰랐잖아.”

“그게 나 때문이었다고?”

리아는 목덜미로 손길을 내리며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내가 간호사 언니 보고 그랬겠니?”

“……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리아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 때문이었다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눈치 없다는 거야?”

리아는 작게 투덜거리며 목덜미에 머물던 손길을 서서히 어깨로 미끄러뜨렸다. 그녀 딴에는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어루만지는 거겠지만, 태호는 그녀의 작은 손길 하나하나에 온몸이 화끈거렸다. 다시 한번 갈비뼈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태호야.”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견디어내던 태호였지만, 이번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뭐?”

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을 텐데.”

“……그건.”

“사람들 앞에서 신혼부부처럼 연기할 때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거지!”라고 반박하려던 리아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뭐야? 진심으로 그렇게 불리길 원한 거야?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자, 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랑하는 남자가 원한다는데 호칭하나 못 바꿀까. ‘주인님, 자기야.’ 같은 닭살 돋는 호칭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보다 한 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오빠.”

리아는 최대한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태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는 대신 험상궂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표정이 왜 그래? 오빠라고 부르라며!”

정말 몰라서 묻나?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든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 미치겠다. 아예 팔다리가 부러졌다면 이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는 연신 생글거리며 그의 한계를 시험했다.

“잠깐, 그런데…….”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태호는 처음부터 이혼할 계획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닐까? 한 번이라도 나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우리 이제, 5년 지나도 이혼 안 하는 거야?”

“물론이야. 이젠 죽어도 안 놔줄 거니까 각오해.”

소유욕에 불타는 무시무시한 협박성 발언인데,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왜 이리 가슴이 뭉클하지? 리아는 다시 한번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빠.”

태호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자, 리아는 피식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가슴에 압박이 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달콤한 열매를 따 먹듯 깊숙이 입술을 포갰다. *** 한참 후, 태호는 휴식을 취하러 침실로 가고, 리아는 CCTV를 확인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누가 반찬통을 놓고 갔는지 알아내지 않으면 호기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문은 곧 풀렸다. CCTV에 찍힌 동영상을 돌리자,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희의 모습이 화면 속에 떠올랐다.

“아가씨가?”

최 과장이나 다른 직원이 가져다 놓았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태희는 가방을 든 채로 금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종이 가방을 놓고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두 번이나 들어왔었어?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저리 다급하게 도망가는 거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하는 말은 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거의 외치듯 말했으니까. 리아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혼자 궁리해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사자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한 방법일 것이다. 태희에게 전화를 걸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연결되었다.

“아가씨, 왔다 갔어요? 현관에 반찬통이 놓여 있던데……. CCTV로 확인하니까 아가씨가 보이더라고요.”

[어머, 새언니. 네, 제가 좀 바빠서 반찬통만 놓고 바로 갔어요. 괜히 인사하고 그러면 시간 잡아먹을 것 같아서요. 호호호.]

흠, 평소와 다르게 ‘호호호’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둘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그러나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순순히 알려줄 태희도 아니었고, 나중에 이상한 말이 정 여사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머니, 제가 태호 씨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태호 씨도 제가 좋다고 하네요.”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리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는 당장 오늘 밤이 문제니까.  

  ***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지만, 회사 기밀을 그리도 쉽게 흘리다니.”

맞은편에 앉은 민훈에게 위스키 잔을 건네며 한 사장이 말했다. 한 사장이 민훈과 직접 얼굴을 맞대며 만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민훈이 리아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게 된 이후부터다. 수년 동안 주원식품 기밀을 넘겨주던 산업스파이가 얼마 전까지 리아와 사귀었던 정민훈 대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한 사장은 적잖이 놀랐다. 그전까진 민훈이 먼저 약속장소에 가서 기밀이 든 서류 봉투를 놓아두고, 나중에 한 사장이 봉투를 찾아오곤 했다. 기밀만큼은 누구도 믿을 수 없어 한 사장이 직접 나섰다. 그런데 얼마 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려나?’라는 생각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던 한 사장은 민훈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강태호 이사와 주리아 팀장이 이혼하길 원하시죠? 사장님을 원해서도, 그리고 따님인 수진이를 위해서라도?”

민훈은 돈 대신 재밌는 걸 제안했다.

“저 역시 두 사람의 이혼을 원합니다.”

“왜? 리아가 태호와 이혼하면 다시 자네에 돌아갈 것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됐지만, 술이 들어가서일까? 오지랖이 발동했다. 한 사장은 상대가 원하지도 않은 충고를 늘어놓았다.

“듣기 불편하겠지만, 잘 들어. 지금까지 자네에게 받은 도움이 있어서 해주는 충고니까. 주리아 같은 부류의 여자는 이혼한다고 해도 절대로 자네에게는 가지 않아. 자네 같은 보통 남자와는 그저 결혼 전에 재미나 보는 거라고.”

“후.”

그 말에 민훈은 쓴웃음을 머금고 단숨에 위스키 잔을 비웠다. 그리고 제 손으로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사장님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요. 아직 제 배경도 알아보지 않으시고.”

“뭐?”

“제가 한낱 돈이나 사랑, 이런 것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다고 생각하십니까?”

민훈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예전에 ㈜정직에서 함께 근무했던 정창식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함께 근무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그러면 배연자라는 이름은 들어보셨습니까? 그때 경리 담당이셨는데……. 10년 넘게 근무하셔서 어쩌면 아실 텐데요.”

“……배연자라면?”

“네, 제 어머님이십니다.”

“자네가 배연자의 아들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한 사장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하! 이것 참.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한 사장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부부를 기다리는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입 아프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밤이 다가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태호는 아직 환자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갈비뼈에 금이 간 환자. 주치의는 완벽하게 회복하려면 적어도 4주에서 6주는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은 절대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두 사람이 신혼이라는 것을 아는 주치의가 여기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서로 손만 잡고 자라는 뜻이다. 아니다. 손만 잡고 자는 것도 위험할지 모른다. 혹여 잠결에 끌어안기라고 하면 큰일이니까.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도 멀리 떨어져 잠들었고, 마음을 확인한 이후에도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잠들어야 한다니. 옆으로 누워서 서로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갈비뼈에 무리가 가지 않으려면 태호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야 하니까. 하, 뭐가 이래! 서로를 미치도록 원하지만, 그림의 떡인 상황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동안은 참아야 해.”

태호의 말에 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타깝지만 할 수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반듯하게 누운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한동안은 아쉬운 대로 이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아, 그래도 너무 좋다. 마음을 확인해서일까? 손만 잡고 있어도 너무 좋았다. 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깊고도 깊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 한마디가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몸이 회복하는 대로 예전처럼 숨 막히게 안아줄게.”

하,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태호의 나직한 말이 어루만지듯 리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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