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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역시 넌 눈치가 느려 (50/81)

50. 역시 넌 눈치가 느려2021.08.22.

리아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태호는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리아가 보인 행동으로 본다면 고백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남 비서이어야 했다. 강수미와 끌어안은 남 비서를 보고 그녀답지 않게 이성을 잃어 핸드백으로 후려갈긴 것도 그렇고, 다친 남 비서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계속 찾아온 것도 그렇고. 그런데 리아는 좋아하는 사람이 남 비서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말한다. 혹시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려 거짓말하는 건 아닐까? 그 정도로 성후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거야, 주리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뚫어지게 바라보는 리아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실해 보였다. 태호가 아는 리아는 거짓말에 서툴다. 특히 거짓말하는 순간에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시선을 피하곤 했다. 이젠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만 헤어지자고 말할 때도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눈빛에 담긴 사랑을 숨길 수 없었을 테니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호는 리아가 아파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순순히 놓아주었었다. 수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게 된 리아는 사랑을 말끔히 지운 얼굴로 그를 대했다. 그랬던 리아가 지금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태연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성격도 변한 걸까?

“내 말에 기분 나쁠 테지만……. 뭐, 기분 더럽다고 해도 내가 뭐라 할 순 없는데……. 후.”

리아는 어두운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 줄 알았는데, 풀기는커녕 태호의 얼굴은 고백 전보다 더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딱 닫힌 입매가 그녀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순 없었다. 약속을 어기고 그를 다시 좋아하게 된 건 그녀의 잘못이 크니까.

“그래, 이게 모두 내 탓이야.”

리아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감정 컨트롤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가 너무 자만했어.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사귄 기간이 얼만데…….”

리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로 입장이 거추장스럽게 됐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협조하자는 뜻이니까.”

“……협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태호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응.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네가 좀 도와줘.”

지금 리아가 하는 말은 외계어가 아닌, 분명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그 뜻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거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리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아무리 거짓말 실력이 늘었다고 한들, 거짓 눈물까지 흘리며 연기할 리는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정말로 네가 좋아한다는 상대가 바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충격이 태호를 에워쌌다. 그래서일까?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하아. 리아는 그런 태호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낼 필요는 없잖아!

“역시 막 퇴원한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결국 리아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태호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어서 가서 좀 쉬어.”

안 돼! 리아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태호는 그녀를 잡으려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원래 의도는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으려던 거였는데…….

“욱!”

이런, 갈비뼈에 금이 갔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힘주어 팔을 뻗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탕―. 그와 거의 동시에 어디에선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리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며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소리지?”

분명 현관에서 난 소리였다. 리아는 태호를 거실에 홀로 놔둔 채, 급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가 보았다.

“……뭐지?”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현관 앞 복도에 커다란 종이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

“와! 대박!”

신혼집을 빠져나오는 태희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역시 새언니, 대단해! 급히 대문을 빠져나가던 태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직도 저 안에선 막장 드라마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겠지? 태희는 방금 일어난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 쪽에서 리아와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회사로 곧장 갈 줄 알았는데, 일 중독자가 웬일이시래? 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밀번호를 입력하느라, 바닥에 내려놓았던 종이 가방을 들어 올렸다. 정말 상태가 안 좋나? 그렇다면 반찬 가져다줬다고 점수 좀 따겠는걸? 그런데 누가 앙숙 아니랄까 봐, 한창 언쟁 중인 리아와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네 속마음을 모르는 것 아닌가?

―아니거든. 내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거든!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헐! 새언니에게 남자가 따로 있다고? 리아의 고백을 듣는 순간, 태희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물론 부부싸움만큼 재미난 구경거리는 없겠지만, 지금 끼어들었다간 괜히 그녀에게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이다. 태희는 서둘러 밖에 세워둔 차로 걸어갔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아, 맞다.”

하지만 차 문을 열려던 태희는 아직도 자신의 손에 반찬통이 든 종이 가방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져온 건 다시 놓고 와야지. 태희는 다시 돌아가 현관문을 열고 몰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 나지 않게 종이 가방을 현관 앞 복도에 내려놓는데…….

“욱!”

태호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어도 무지무지한 고통이 느껴지는 처절한 소리였다. 헐, 새언니가 이젠 오빠를 구타까지 하는 거야? 겁에 질린 태희는 종이 가방을 놓고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전속력으로 세워둔 차로 달려갔다. 마치 무서운 호랑이에게 쫓기는 연약한 토끼처럼……. 차에 올라탄 태희는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했다. 천하의 강태호, 작은오빠가 고통에 비명 지르는 소릴 다 듣다니! 참,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방금 목격한 일을 되짚어보던 태희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 팔은 안으로 굽는 게 맞는 건데…….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새언니를 원망하고 작은오빠 편을 들어야 하는데…….

“큭, 큭, 큭.”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져 나왔다. 흥, 맨날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새언니에게 다른 남자가 있어서 참으로 자존심 상하시겠어? 아무리 사랑 없이 결혼한 정략결혼이라지만, 자존심 상하는 건 상하는 거다. 이번엔 태호가 제대로 된 상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고소할까! 지금까지 이 여자, 저 여자 스캔들이란 스캔들은 다 터뜨리고 다니더니, 쌤통이네!

“그래, 오빠도 잘못했지. 결혼하고도 계속 강수미 만나면서 이상한 소문 돌게 했잖아.”

그래도 나는 시누이인데……. 새언니가 오빠 두고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태희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부부 문제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은 아니니까. 우선은 잠자코 옆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도 소현이에게는 얘기해줘야지…….”

태희는 혼자 키득거리며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 리아는 종이 가방 중 한 개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반찬통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병실에 가져갔던 반찬통과 같은 제품인 것으로 보아, 시댁에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중에 누가 왔다 갔다는 건데…….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대화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걸까? 거실과 현관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나직한 대화는 들을 수 없겠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언성을 높였기에 엿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말도 안 하고 몰래 빠져나갔겠지.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용기 내서 고백했건만, 태호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고,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 쪽 누군가가 대화를 엿듣다니……. 아, 꽈배기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꼬여! 리아는 작게 투덜거리며 냉장고에 반찬통을 집어넣었다. 잠시나마 어색한 자리를 피하기엔 그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방에 숨어 있을 순 없었다. 혼자 있을 태호 상태가 슬슬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리아는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태호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얼마나 싫었으면 저런 모습으로 있을까! 기분은 상했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철저한 을이 입장이 되었으므로.

“많이 아파? 주치의 부를까?”

“……아니.”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 두드렸다.

“여기 와서 앉아봐.”

리아는 얌전히 태호가 시키는 대로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태호는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는 자신을 향한 짙은 눈빛이 고통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 미안하고, 아파하는 모습에 모성애가 발동하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뿐인가? 가까이 앉으니까 은은한 남성 향수가 느껴지면서 살짝 설레기도 하고……. 아, 정말 답이 없네. 망신살 뻗치게끔 퇴짜 맞았으면서도 그래도 좋단다. 리아는 정신 못 차리는 자신을 책망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갈비뼈를 다쳐서 그런데…….”

그가 말을 시작하자,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뾰쪽한 말이 그녀를 상처 입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야! 고백하자마자, 곧바로 태호와 싸우긴 싫었다.

“알아, 알아! 아픈 사람 가지고 내가 너무 심했어.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해결하자. 나도 노력할게.”

‘노력할게.’라니? 무슨 노력? 리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아무 말이나 하고 보았다.

“……리아야.”

“그러니까 내가 좋아한다고 한 말, 부담가지지 말고…….”

“리아야.”

화가 난 것처럼 태호가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히자, 리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후우.”

태호는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매우 화가 난 상태인지,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실이다. 태호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리아를 힘차게 끌어안을 수도 없고, 고개를 숙여 키스할 수도 없었다. 이놈의 갈비뼈! 하아, 왜 하필 이럴 때……. 할 수 없이 태호는 껴안는 대신 리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뭐한 짓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는 리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네 마음을 깨달은 거, 혹시 내가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야?”

“맞아.”

리아는 시선을 맞춘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아픈 건 참을 수 없었거든.”

“그럼 그때 병실에서 갑자기 뛰어나간 이유가…….”

“응.”

리아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깨달았어.”

“……리아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물론 너무 기뻐서다. 심장 박동이 빨라질수록 고통은 심해졌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아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아직 모든 것을 다 밝힐 순 없겠지만, 속마음만큼은 솔직히 털어놓아야 한다. 그녀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더는 아닌 척 마음을 숨길 수 이유는 없었다. 아니, 숨기고 싶어도 더는 숨길 수 없다.

“넌 다시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했지만…….”

태호가 입을 열자, 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난 한 번도 너를 내 안에서 지운 적이 없어.”

“응?”

순간 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번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난 행여나 네가 내 마음을 눈치챌까 봐 걱정했는데……. 후, 역시 넌 눈치가 느려.”

“……”

반박하려는 듯 리아의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태호의 손이 리아의 뒤통수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리아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기도 전에 자석에 끌리듯, 두 입술이 제자리를 찾으며 깊게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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