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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다른 남자가 있었어? (49/81)

49. 다른 남자가 있었어?2021.08.18.

“…….”

두 사람의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태호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아직도 리아가 민훈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선배라고, 팀원이라고 싸고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홧김에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리아의 입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진실이 튀어나왔다. 다른 남자가 있었어? 도대체 누구?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태호는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리아는 그녀대로 제멋대로 말을 토해낸 망할 놈의 혀를 깨물었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지만 이런 식으로 멋대가리 없게 버럭 소리를 질러가며 고백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게 그렇게 고백하기로 했잖아! 하지만 이미 흘러나간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아, 정말 입이 원수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니…….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어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더니…….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 태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태호는 분명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고백의 대상이 자신이란 걸 모르니까 그렇게 물은 거겠지? 아니, 그런데 어떻게 그걸 몰라? 기가 막힌 나머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혹여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괜한 우려일 뿐이었다. 이걸 지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리아는 무엇보다 상황 수습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은 대로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민훈 선배가 아니라 따로 있어. 그러니까 괜히 헛다리 짚지 마.”

리아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태호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우선은 이렇게 1차 고백을 하고, 나중에 때를 봐서 2차 고백으로 넘어가자. 태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리아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으로 향했다. 잠시 후, 휴대폰을 확인한 리아의 눈빛이 혼란으로 크게 흔들렸다.

  ***

“정 대리님?”

민훈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문가에 있던 박 주임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낼모레까지 휴가 아니었어요?”

“아, 네.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짧게 대답한 민훈은 박 주임을 지나쳐 곧장 팀장실로 향했다.

“어머, 대리님?”

마침, 서류를 놓고 팀장실에서 나오던 채영이 민훈과 마주쳤다.

“팀장님 지금 안 계시는데요.”

“어디 회의라도 가셨어?”

“아뇨. 오늘 반차 내시고 일찍 들어가셨어요.”

“일찍 퇴근했다니, 왜? 팀장님 어디 몸이 안 좋아?”

“아뇨. 그러는 대리님은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왜 그래요?”

휴가 간 며칠 사이에 민훈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지금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은 리아가 아니라 민훈인 것 같았다. 하지만 민훈은 채영의 물음에 대답을 회피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무슨 일로?”

“오늘 강 이사님 퇴원하는 날이거든요. 퇴원 절차 밟는다고 가셨어요.”

“……아, 그래.”

민훈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이자, 채영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주 급한 거면 제가 팀장님께 전화해볼까요?”

“아니,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야. 고마워, 채영 씨.”

말을 마친 민훈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어딘지 평소와 다른 것 같은 태도에 채영과 박 주임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팀장님께 전화해볼까요?”

채영의 물음에 박 주임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정 급하면 정 대리님이 팀장님께 연락하겠지.”

박 주임이 자리에 돌아간 후에도 채영은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정 대리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저런 모습의 정 대리를 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항상 웃는 얼굴이던 대리님이 왜 갑자기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어두워졌을까? 채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

“이건…….”

여러 장의 사진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리아는 민훈이 한 사장에게 서류를 건네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예사로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민훈과 한 사장 모두 주위를 의식한 얼굴로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는 등 평소와는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설명 길게 할 거 없이 짧게 끝낼게.”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리아에게 숨기고만 있을 순 없었다. 모두 털어놓을 순 없겠지만, 한 사장의 비리만큼은 밝힐 때가 된 것 같았다. 태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 사장의 비리를 캐려 몇 년 전부터 뒤에 정보원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한 사장이 정민훈 대리를 몰래 만났더군. 지금까지 왜 주원식품과 KJ푸드 신제품이 비슷한가? 했더니, 이게 이유였어.”

“하지만 이 사진만으로 정 선배가 산업스파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어.”

“물론이야.”

리아의 말에 태호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정 대리를 만나고 얼마 후, 한 사장이 KJ푸드 연구소에 직접 찾아가 제품 아이디어를 건넸어. 모두 주원식품에서 개발 중인 제품과 아주 비슷했고. 메일을 보면 만난 날짜와 연구소에 지시를 내린 날짜가 연이어 뜰 거야. 비교해봐.”

찬찬히 메일을 훑어보는 리아의 얼굴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법정에 가져갈 만큼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민훈을 의심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정 선배가 우리 정보를 너희에게 빼돌렸다는 거네. 하지만 왜?”

리아에게 정민훈은 자상한 선배이며 든든한 팀원이었다. 그런 그가 왜? 그러면서 내가 좋아한다고 다가왔던 거야?

“정 대리 부모님이 요양원에 계신 건 알아?”

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민훈 본인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라, 수진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다. 순간 리아는 과연 정민훈이란 사람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 대리 월급으론 그 요양원 감당할 수 없어.”

“그러면 돈 때문에 회사를 배신한 거라고?”

혼란스러운 듯 리아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짧게 숨을 고른 태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충격이라면 한꺼번에 받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태호가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는 동안, 리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태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물론 배신감도 컸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아버지, 주 회장과 민훈 부모와의 악연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 아빠 때문에 선배 부모님이 그렇게 되신 거네.”

“아직 정확한 건 아니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그래.”

어느 순간부터일까? 리아는 민훈에게서 예전에 없었던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나서일까? 아니면 그전부터 민훈은 이미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던 걸까? 처음부터 부모와의 악연을 알고 접근할 걸까? 아니면 나중에 알게 돼서 마음이 변할 걸까? 아직은 그 무엇도 확실한 건 없었다. 리아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태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정 대리 어떻게 할 거야?”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결정을 내린 듯 태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잖아. 선배를 지방으로 보내진 않을 거야. 대신 조심할게.”

“……좋아.”

리아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선에서 정 대리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이다. 두 사람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리아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했다. 도대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인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멀쩡하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리아가 지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자, 태호는 반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먼저 상대가 누군지 알려줄 것 같진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태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야?

리아는 힐끗 태호를 쳐다보더니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제부터?”

리아는 대답을 미루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예 이참에 슬그머니 2차 고백을 해버릴까? 자연스럽게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그녀가 좋아하는 상대가 바로 태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음, 좋아한다고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일주일 좀 안 됐나?”

“뭐?”

리아의 대답에 태호는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너…….”

그녀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그에게 상처 입혔는지 모를 것이다. 다른 때도 아니고, 그가 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있는 동안,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뜻이니까. 일주일 집에 안 들어갔다고, 밤마다 다른 남자를 만난 걸까?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미안한 마음에 매일같이 병원으로 찾아왔던 거고? 그래서 안색이 안 좋았던 거고? 물론 두 사람은 평범한 부부 사이가 아니니, 그녀에게 바람을 피웠다고 화를 낼 순 없었다. 하지만 칼로 찌른 듯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후.”

어느새 씁쓸한 웃음이 꽉 다문 입 새로 흘러나왔다. 태호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퇴원 선물치곤 너무 어마어마하군. 도대체 그 자식, 왜 좋아하는 거야?”

조금 전만 하더라고 ‘그 남자’라고 하더니 이젠 ‘그 자식’이란다. 이러다 아예 ‘그 새끼’라고 나오겠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 그냥 그 사람이니까 좋은 거지.”

뭐가 그리 좋은지 대답하는 리아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태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의 목을 힘껏 조르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결국 태호는 참지 못하고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급히 일어난 충격에 아직 아물지 않은 갈비뼈로 통증이 번졌지만, 그깟 고통은 마음에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야? 난 네 남편으로서 알 권리가 있어.”

태호는 어금니를 악물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자 리아도 소파에서 일어나 힘껏 눈에 힘을 주고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니? 이 바보야! 딱 보면 몰라? 하지만 눈으로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태호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리아가 대답 회피하자, 안 좋은 예감이 뒤따랐다.

“네가 말 못 하는 이유는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라서?”

모든 것에 당당한 주리아가 이렇게 나올 때는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었다.

“응.”

역시나! 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태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너…… 혹시?”

그래! ‘혹시’가 그 ‘혹시’ 맞아! 리아는 기대하는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태호의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후를 좋아하게 된 거야?”

성후?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성후가 누구더라? 그러다 곧 남 비서의 이름이 성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다잡고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야! 너 지금 사람을 뭐로 보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네!

“내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어도, 네 사람을 건드릴 정도로 밑바닥은 아니라고. 넌 어떻게 내가……!”

“그럼 도대체 누구야!”

사과는커녕 태호가 언성을 높이자, 리아는 할 수 없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나긋나긋 고백은 무슨 나긋나긋 고백이냐. 그냥 원래 성질대로 밀고 나가야겠다. 리아는 호흡을 짧게 가다듬고는 손가락으로 태호를 가리켰다.

“너.”

“뭐?”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태호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이번엔 리아가 태호의 양팔을 움켜쥐며 힘 있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바로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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