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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48/81)

48.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2021.08.15.

“헉.”

병실에 들어선 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아직 침대에 누워 있을 거로 생각한 태호가 병실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환자복에서 슈트로 갈아입은 그는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환자복 차림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렇게 슈트로 쫙 빼입었으니……. 아, 말해서 뭐 해? 심장은 미친 듯이 이리저리 날뛰며 얼굴마저 화끈 달아올랐다. 이런 상태로 고백했다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우물쭈물 약한 모습을 보일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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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병원에서 무슨 고백을 해. 고백은 집에 가서 하자. 리아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애써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퇴원 절차는?”

“지금 남 비서가 하고 있어. 곧 올 거야.”

그 대답은 고백을 뒤로 미룬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렇잖아! 심각하게 고백하는데 남 비서가 불쑥 들어오기라도 하면, 얼마나 곤란하겠어. 그러니까 단둘이 있을 때, 분위기 보면서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게 낫지. 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목에 두른 넥타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맨살이 살며시 드러나자, 리아는 다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웃통을 벗은 것도 아니니,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상대가 좋아하는 남자라면 완전 다른 이야기다. 화끈 달아오른 열기로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자, 리아는 작게 투덜거리며 손으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했다.

“병원이라서 그런지, 되게 덥네. 하아.”

덥다고 불평할 정도로 실내 온도가 높진 않았으나, 다행히 태호는 그녀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리아를 쳐다보며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웬일이긴. 퇴원하는 날이니까 왔지.”

리아는 생글 웃으며 태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예 얼굴이 안 보이게 바짝 붙어서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붙어선 김에 리아는 태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혼자 걸을 수 있어? 부축해줄까?”

순간 그의 몸이 바짝 긴장하며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됐어, 괜찮아.”

팔을 뿌리친 건 아니지만, 손을 떼라는 살벌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허리에 두른 팔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퇴원 절차를 마친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 비서는 태호 옆에 선 리아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반응이 왜 저래? 둘이서 미리 짜기라도 했나? 이 시간에 웬일이라니!

“어쩐 일이라뇨? 남편이 퇴원하는 날인데, 아내인 내가 당연히 와봐야죠.”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리아는 톡 쏘는 목소리로 남 비서를 흘겨보았다. 그 말에 남 비서는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퇴원하고 바로 회사로 갈 예정이었어. 그래서 남 비서가 물어본 거야.”

구미호 싸움에 괜한 새우등이 터지는 것 같아, 태호는 재빨리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출근할 계획이었다는 말에 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일 중독자라지만 그것도 어지간해야 받아주지.

“퇴원하자마자 회사로 간다고?”

“응.”

태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린 업무도 많고 해서 바로 가봐야 해.”

사실을 털어놓자면 KJ푸드 본사로 가는 건 아니었다. 남 비서와 함께 긴히 갈 곳이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리아에게 일일이 설명할 순 없었다. 민훈에 관한 일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리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녀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으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퇴근 이후로 고백을 미룰 순 없었다. 그랬다간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변명하지 마. 남 비서가 매일매일 여기로 회사 일 가져온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뒤로 고개를 돌린 리아는 애꿎은 남 비서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남 비서님, 갓 퇴원한 상사를 어떻게 회사로 모실 생각을 해요? 말렸어야죠.”

“아, 네, 저도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남 비서는 억울했다. 퇴원 절차를 밟으러 가기 전,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몇 번이나 태호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태호였다. 정보원에게서 민훈의 자료를 건네받는 즉시 바로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태호는 자신이 직접 정보원과 만나길 원했다.

“강 이사가 자리에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안 돌아가기라도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회사로…….”

“됐어, 그만해.”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태호는 또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째서인지, 오늘 리아는 평소보다 기분이 나빠 보였다. 퇴원해서 집에 가게 되니까, 신경이 곤두섰나? 한껏 누리던 혼자만의 자유가 끝난 것 같아서?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리아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알았어. 집으로 갈게.”

태호가 순순히 따르자, 그제야 리아는 굳은 표정을 풀며 태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부축해줄게, 내 차로 가.”

이번엔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쩡한 두 다리로 걷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신혼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먼저 냉정하게 뿌리칠 테니까. 짧은 순간이라도 리아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으니, 나쁠 건 없다. 태호는 허리에 감긴 부드러운 팔의 감촉을 느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민훈의 일 처리는 잠시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

“이게 다 뭐야?”

주방으로 들어서던 태희는 밀폐용기에 반찬을 담는 정 여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정 여사는 반찬이 담긴 밀폐용기를 하나씩 닫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이 태호 퇴원하는 날이잖니. 아직 입맛이 없을 테니까, 밑반찬 좀 보내주려고.”

요리와는 거리가 먼 정 여사였지만, 얼마 전 리아가 건넨 한마디가 잠자던 모성애를 건드렸다. 아플 때 제일 생각나는 게 엄마 음식이라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오랜만에 직접 요리하는 거라서, 맛은 좀 들쑥날쑥했지만, 엄마 음식이 최고라고 했으니까, 맛있게 먹을 게 분명하다.

“그래? 가는 길에 작은오빠 집 지나가는데 내가 가져다줄까?”

“네가 웬일로?”

“뭐 그냥 가는 길이니까. 어차피 지금 집에 아무도 없을 거잖아. 오빠는 퇴원하자마자 바로 회사로 갔을 거고, 새언니도 아직 회사에 있을 거고.”

심부름하고 생색도 내 볼 겸, 둘이 어떻게 살고 있나 살짝 훔쳐보기도 할 겸, 태희는 정 여사에게서 반찬통이 담긴 종이 가방을 건네받았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LS그룹 창립 파티에서 보여준 태호의 행동도 그랬고, 입원한 태호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리아를 봐도 그렇고, 어쩐지 묘한 느낌이 왔다. 문제는 정확히 그게 어떤 변화인지는 모르겠다는 거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기어이 진실을 파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태희는 그 때문에 요 며칠 잠을 설쳤다. 하여간 오늘 신혼집에 가보면 뭔가 잡히는 게 있겠지. 태희는 종이가방을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 남 비서를 회사로 돌려보낸 리아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에서 고백할까? 하는 유혹도 잠시 들었지만, 그러다 운전 중에 흥분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집에 도착할 때까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오고 나니,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화난 것처럼 뚱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어떡하지? 빨리 표정을 풀어야 하는데…….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리려는데 침실로 향하려던 태호가 내뱉듯이 짧게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이만 회사 들어가.”

“아니. 반차 내서 안 가도 돼.”

“팀장이란 사람이 너무 자주 자리 비우는 거 아닌가?”

“뭐야? 지금 경쟁사 걱정해주는 거야?”

저도 모르게 삐딱한 반응이 나오자, 리아는 서둘러 혀끝을 깨물었다. 톡톡 쏘아붙이는 말투가 이젠 버릇이 되었나 보다. 리아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이번 주는 한가한 편이라서…….”

띠링―. 그때 태호의 휴대폰에서 e메일 도착 알림이 울렸다. 태호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메일을 확인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태호의 얼굴이 순간 화난 듯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보다. 그만큼 태호의 표정이 살벌했다. 아무래도 고백을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리아는 초조한 얼굴로 태호의 분위기를 살폈다. 뚫어지게 휴대폰을 노려보던 태호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정민훈 대리 어디 선까지 믿을 수 있어?”

“응?”

왜 갑자기 정 선배 얘기가 튀어나오는 거야? 누가 또 함께 있는 사진을 온라인에 올리기라도 했나? 리아는 질문에 깔린 저의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리아에게서 제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호는 혼자 결론을 내린 듯 차갑게 말했다.

“정민훈 대리, 다른 곳으로 발령 내는 좋겠어. 서울 본사 말고 아예 지방으로 보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리아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번엔 또 무슨 사진이 올라왔기에 저러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새벽 스캔들 기사가 올라가고 나서 얼마나 주위를 살피며 조심에 조심했는데…….

“회사에서 정 선배랑 단둘이 있지도 않았다고. 만약에 누가 이상한 사진 올렸다면 그건 결혼하기 전에 찍은 사진일 거야.”

리아의 항변에 태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예 그런 류의 사진이었다면 덜 화가 났을 것이다. 방금 남 비서에게 받은 e메일에는 한 사장과 정 대리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우려했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스캔들 기사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아니면?”

민훈이 민낯을 알지 못하는 리아는 그를 감싸려 했다. 그 점이 태호를 더욱더 화나게 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리아가 얼마가 크게 실망할지 알기에…….

“솔직히 말해봐. 정민훈 아직도 못 잊었어?”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어쩌다 보니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발끈한 리아가 민훈을 놓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잊긴 뭘 잊어?”

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팀원 사랑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과하니까. 혹시 네 속마음을 모르는 것 아닌가?”

“아니거든. 내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거든!”

당당하게 말했지만 조금 찔리긴 했다. 얼마 전에야 태호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아, 아니다. 어쩌면 한순간도 그를 잊었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잊었다고 자기최면을 걸었을 뿐……. 그래서일까? 태호를 노려보는 리아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뭐지, 저 비웃는 것 같은 미소는? 이 바보야! 그 순간 쌓이곤 쌓인 감정이 울컥 터지고 말았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토록 마음고생인데!

“그래.”

리아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민훈 선배가 아니라!”

말이 튀어 나간 동시에 리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헐, 말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제길!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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