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고백이 별건가?2021.08.11.
신혼에 빠진 아내를 연기하며 거의 매일이다시피 병원에 들른 탓일까? 마음의 문을 다시 잠그기는커녕 빗장은 둘째 치고, 그나마 있던 문틀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무너진 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벅찬 감정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뿐이었다.
“하아.”
리아는 컴퓨터 화면에 뜬 캘린더를 들여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태호가 병원에서 퇴원해 신혼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가서 허둥지둥 대지 않으려면 지금에라도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하는데…….
“치, 준비는 무슨 준비.”
리아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맑은 하늘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걸까? 원래 그녀의 계획은 마음을 다잡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러니까 태호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한 ‘차갑고 이성적인 주리아’로 말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폐기처분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을 차갑게 꽁꽁 얼려도, 태호를 보는 순간 사르르 물처럼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아, 짜증 나. 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다. 그러니까 웬만하게 잘생기지, 왜 그렇게까지 잘생겼냐고! 리아는 다시 캘린더로 시선을 돌리며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어디 잘생기기만 했나? 모성애 자극하는 표정은 또 어떻고! 태호는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리곤 했는데……. 어머나! SM이 취향도 아니면서 왜 이리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야! 그녀도 모르게 그만 사레에 들려 콜록콜록 기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뿐인가? 꼭 감은 두 눈을 보면, 속눈썹이 얼마나 길고 풍성하던지,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도대체 이렇게 멋진 남자를 어떻게 남자친구로 삼을 수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면 과거의 그녀는 정말 대단한 여자였던 것 같다. 리아는 곰곰이 어떻게 두 사람이 사귀게 되었나를 되짚어 보았다. 제일 먼저 클럽에서 만났던 날이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 내가 먼저 작업 걸었었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먼저 키스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사고였고, 감정이 담긴 키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강태호의 입술을 처음으로 훔친 여자가 자신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태호에게 대놓고 달려든 여자가 어디 한둘이겠냔 말이다. 그런데도 태호는 모든 여자를 다 제치고 그녀를 선택했었다. 어째서일까? 그때 나에겐 어떤 매력이 있었던 걸까? 리아는 다시금 과거를 떠올렸다. 두 번째 만남은 민수의 대리출석을 해주다 강의실에서 만나면서였다. 그때 리아는 머리도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옷도 민수의 야상 점퍼를 입었기 때문에 영락없는 미소년 이미지였다.
“앗!”
과거를 회상하던 리아는 뭔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태호는 그녀의 보이시한 모습에 끌린 건 아니었을까? 대학 졸업반이 될 때까지 리아는 줄곧 짧은 머리를 유지했었다. 그러다 점점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인제 보니 머리를 기르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와 헤어졌다. 물론 이별의 원인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집안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래도……. 리아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찰랑찰랑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손가락에 감겼다. 이참에 짧게 확 잘라버릴까? 그러면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태호가 그녀를 다시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리아는 쓰게 웃으며 거울을 내려놓았다. ***
“애석하게도 두 분 모두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내일 당장 상을 치르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요.”
남 비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요양원에서 가져온 서류를 태호에게 건넸다. 민수는 약속한 대로 좀 더 자세한 정 대리의 정보를 보냈고, 남 비서는 그대로 태호에게 보고했다.
“……흠.”
서류를 훑어보는 태호의 얼굴에도 남 비서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내렸다. 서류의 맨 마지막 장을 넘기며 태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후야, 너라면 어떻겠어? 자신의 부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의 딸을 사랑할 수 있을까?”
“흠, 글쎄요. 확실하게 하자면 이게 주 회장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다. 사고는 분명 작업 중에 일어났지만, 동업이 깨지며 ㈜정직이 두 회사로 쪼개지는 와중에 정창식의 산재 처리가 흐지부지하게 돼 버렸을 수도 있다. 서류 어디에도 주 회장이 일부러 산재 처리를 막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래도 좋은 감정으로 먼저 다가갈 수 있겠어?”
“글쎄요. 만약 상대가 정말 자신의 이상형이라면, 흠…….”
혼자 중얼거리던 남 비서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태호는 굳게 입을 다문 채로 서류에 실린 사진을 노려보았다. 사진 속에는 휠체어를 탄 정창식과 배연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 정민훈이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건 어제 찍힌 사진입니다. 정민훈 대리는 지금 휴가 중이더군요. 원래는 3일이었지만, 일주일로 연장했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곁을 지키려는 것 같습니다.”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한곳에 모아 봉투에 집어넣었다.
“정민훈의 뒤를 좀 더 알아봐. 특히 우리 KJ푸드와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점이 있는지 집중적으로 조사해봐.”
“네.”
어쩌면 한 사장 혼자 주원식품과 KJ푸드 사이를 삐걱거리게 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태호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두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이 나오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항상 KJ푸드가 한 발 차이로 먼저 신상품을 출시하곤 했다. 그때마다 리아는 불같이 화를 냈고, 태호는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되받아쳤다. 주원식품 안에서 누군가가 한 사장 측에게 제품 정보를 빼돌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리아까지 복잡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민수와 남 비서가 뒤에서 연락하며 정보를 교환했다. 덕분에 비슷한 제품의 출시는 막을 순 있었지만, 정보를 유출한 자를 찾아내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누가 제품 정보를 KJ푸드에 흘렸는지 밝혀질지도 모른다. 훗,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태호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왜 한 번도 마케팅 부서에서 정부가 새어 나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줄곧 제품 연구소에서만 찾았을까. 만약에 짐작한 대로 정민훈이 한 사장에게 제품 정보를 빼돌린 거라면……? 생각에 잠겼던 태호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리아가 많이 놀라겠지? 솔직히 산업 스파이 색출보다는 혹시라도 그녀가 마음 아파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리아 곁에서 정민훈을 치워야 한다.
“후우.”
태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
“와, 팀장님!”
점심시간이 끝나고 리아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알아본 채영이 리아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점심도 안 드시고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했더니, 머리 자르셨구나. 진짜, 진짜 예뻐요. 완전 짱!”
“그래?”
채영의 칭찬에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처음엔 예전처럼 짧게 자르려고 했다. 하지만 헤어디자이너가 머리를 자르려 가위를 드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도저히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릴 순 없었다. 대신 층층이 레이어를 주면서 전체를 다듬었다. 물론 보통 남자들 눈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헤어스타일로 보이겠지만…….
“아, 맞다. 오늘 강 이사님 퇴원하시는 날이죠? 그래서 예쁘게 보이려고 머리하신 거예요?”
리아는 말로 채영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대신, 피식 웃음으로 대처였다. 머리를 짧게 자르진 못해 보이시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예뻐 보였으면 하는 게 진심이다.
“오늘 일찍 퇴근하실 거죠?”
“응. 내가 가서 퇴원 수속해야 하거든.”
사실은 거짓말이다. 퇴원 수속은 남 비서가 알아서 다 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리아는 아내로서 태호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손수 모는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왜냐고? 난 강태호의 아내니까. 그래야 사람들 앞에서 연기인 척 부축도 하고, 팔짱도 끼고, 머리카락도 쓸어 넘겨주고 등등, 사심을 채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 이러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결국 리아는 예정보다 한 시간 빨리 회사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태호를 보고 싶은 마음에 리아는 교통법규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 민훈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선배, 그 많은 후배 중에서 왜 내가 좋았어?
그때 리아는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며 민훈에게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았었다.
―넌 상대와 대화할 때마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빤히 쳐다보잖아. 그게 참 가슴 설렜어. 뭐랄까, 반짝반짝했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눈을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게 그녀의 매력이란 말은 민훈에게서만 들은 건 아니었다. 종종 다른 이에게도 듣곤 했었다. 하지만 태호에겐 통하지 않을 매력이었다. 아니, 매력은 고사하고 태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간, 그녀도 모르게 ‘좋아해.’라고 고백할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리아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이판사판 좋아한다고 확 고백해버릴까?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며 혼자 끙끙거리는 것만큼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얼마 못 가서 들킬 텐데……. 그러기 전에 “나, 네가 다시 좋아졌어.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피해.”라고 이실직고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태호가 부담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그도 꼭 같이 좋아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태호가 그녀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상황은 180도 변할 수 있었다. 그렇다. 리아가 그때 태호를 좋아한 건 태호도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전혀 마음이 없다면 곧 그녀의 감정도 정리될 것이다. 혼자 아파하면서 정리하는 것보단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자. 5년 후, 서로 깨끗이 이혼하고 싶으면 그가 알아서 피하면 되는 거다. 태호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단번에 식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혀줄지 모르겠다.
“그러면 되겠네.”
어느새 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나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고백하지? 리아는 지금까지 고백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고백도 생략한 채, 먼저 입술부터 맞추고 시작했으니까. “태호야, 너 왜 나 좋아했던 거야?”……라고 툭 던지듯 물어볼까? 그것보다는 “너 언제부터 날 좋아했었어? 네가 먼저 날 좋아했잖아.”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태호는 삐딱한 표정으로 “무슨 소리야? 네가 먼저 날 좋아했던 것 같은데…….”라고 되받아칠 게 뻔했다. 그리고 4살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그녀가 먼저 태호를 좋아한 게 사실이다. 먼저 키스한 것도 언제나 리아였다. 어릴 때도, 커서도……. 하아, 아무래도 그냥 담담하게 고백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살며시 숙이면서, 조금은 나긋한 목소리로. “태호야, 나…… 널 다시 좋아하게 됐어.”라고 말이다. 리아는 병실 앞에서 선 채로 달래듯 그녀 자신에게 속삭였다. 떨지 마, 주리아. 고백이 별건가? 넌 할 수 있다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