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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까. (46/81)

46.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까.2021.08.08.

“여깁니다.”

민수가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은 남 비서가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민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남 비서가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보고 올리기 전에, 조금 더 확실하게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민수가 자리에 앉자, 남 비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알고 싶은 사람이 우리 회사 직원이라고요?”

“네.”

남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첫 장을 넘기던 민수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신상에 관해 알고 싶다는 직원이 정민훈 대리였습니까?”

“네. 혹 정 대리에 관해 잘 알고 계십니까?”

남 비서의 질문에 민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정 대리와는 함께 근무한 적도 없고, 항상 부서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왜 직접 리아에게 묻지 않고 나에게 물어보는 거죠?”

정 대리에 관한 거라면 리아가 훨씬 더 잘 알 텐데……. 민수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남 비서를 바라보았다. 남 비서는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주 팀장님이 그러니까 사모님이 정 대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은 있습니까?”

“그거야 물론 있죠.”

리아가 민훈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무작정 과 선배들이 무척 잘해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점점 과 선배들에서 정민훈이란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그 선배라는 사람,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라는 민수의 놀림에 리아는 ‘에이, 그럴 리가…….’라며 가볍게 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다 2학년에 올라가고, 태호와 사귀고 난 후부터는 민훈이란 존재는 리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리아가 다시 민훈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 건 그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면서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태호와 결혼 말이 오가면서 흐지부지하게 돼버렸다. 리아 말에 의하면 민훈은 그녀와 태호와의 정략결혼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났다고 했다. 그런데 왜 태호는 난데없이 남 비서를 통해 민훈의 배경을 캐려는 걸까? 사랑에 빠지면 질투심에 눈이 먼다더니……. 태호는 두 사람이 깊은 관계였다고 의심하는 걸까? 후, 바보 녀석. 민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리아와 정 대리, 절대로 그런 사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랬다면 내가 이미 눈치챘을 테고.”

남 비서는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한데 모아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정 대리의 부모가 예전 ㈜정직에서 근무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뇨. 금시초문입니다.”

“당시 근무 기록이 없어, 제가 놓친 부분이 있었는데, 정 대리의 아버지가 생산직에서 근무 중에 다치셨더군요. 그리고 그때 책임 관리자가 주 회장님이셨습니다.”

“네?”

민수는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 대리의 부모가 ㈜정직에서 근무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작업 중 다치기까지 했다니…….

“사고 있고 나서 얼마 후, 회사가 둘로 갈라지는 바람에, 산재 처리가 제대로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 비서는 정 대리의 어머니 이야기도 덧붙였다. 경리로 근무하던 그녀가 결정적인 정보를 강 회장에게 넘기면서 동업이 깨졌고, 그 후 다른 회사로 옮겼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횡령죄로 교도소에 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로 주 회장님을 소환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지금 남 비서 말은 정 대리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때문에 산재 처리를 받지 못했고, 정 대리의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의 증언으로 감옥에 가게 됐다는 겁니까?”

민수의 추측에 남 비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거기까진 아닙니다. 다만 이 사실을 주리아 팀장님이 알고 계셨나 해서요.”

“아뇨. 알았다면 분명 내게 말했을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태호와의 관계를 숨겨도 민수에게만큼은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던 리아다. 그런 그녀가 정 대리의 배경을 알면서도 숨겼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민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정 대리가 리아에게 일부러 접근한 걸까요?”

“네. 제 생각은 그쪽으로 기우는군요.”

지금 상황에선 남 비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정 대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리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고 의심할 것이다. 항상 옆에 있었으면서 왜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까? 민수는 안일하게 대처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그 긴 시간 동안 정 대리는 리아의 주변을 맴돌며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려던 걸까?

“이 사실, 태호에게 보고할 건가요?”

“내일 아침에 보고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괜찮다면 시일 좀 미루죠. 내 선에서 좀 더 조사해보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건 가지고 가십시오.”

남 비서가 서류 봉투를 건네자, 민수는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를 나서는 민수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

“늦었으니까, 그만 가. 난 좀 피곤해서 쉬어야겠어.”

태호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차갑게 말했다. 밤이 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 리아가 힘들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리아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알았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가 말했다. 겉으론 담담한 척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오늘은 머리카락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그냥 가는구나.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의료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타인이 옆에 있어야, 다정한 척 연기할 수 있는데……. 그 탓에 오늘 리아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데면데면하게 태호를 대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너무 속상해하진 않기로 했다. 그래도 태호의 얼굴은 보았으니까. 사실, 연애가 별건가? 서로 얼굴 보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연애지. 그런 면에선 퇴근 후 병실에서 밤늦게까지 옆에 있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물론 진정한 연애가 아니라는 건 안다. 지금은 혼자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 좋아하는 쪽이 져준다고, 리아는 지금 자신이 철저한 약자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안 와도 돼.”

병실을 나서는 리아의 뒷모습에 대고 태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리아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어. 네가 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자 리아가 천천히 뒤들 돌아보았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이 태호의 시야에 가득 찼다. 날이 가면 갈수록, 태호의 상태는 나아지는데, 반대로 리아는 상태는 나빠지고 있었다. 미열이 있는지 가끔 얼굴이 빨개지기도 하고,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는 둥,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왜 아니겠어?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서 밤늦게까지 억지로 아내 코스프레를 하는데……. 리아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까진 몰랐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무척이나 피곤할 게 분명하다. 그랬기에 태호는 내일만큼은 리아가 집에서 편히 쉬길 원했다.

“그래. 그럴게.”

리아도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대응하고 병실 문을 닫았다. 거의 매일 찾아왔으니, 사실 내일 하루쯤은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내일은 태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서늘해졌다. 이상하다. 사실은 오지 말라는 소리에 기뻐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감정을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한 주제에 또 이젠 오지 말란다고 축 기분이 처지고. 하아, 주리아. 너도 참 답이 없다. 리아는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탓하며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 집에 도착해, 차고 문을 열려던 리아는 눈에 익숙한 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리아가 밖으로 내리자, 차 문이 열리며 민수가 차에서 내려섰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갑작스러운 방문에 리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냥 근처 지나는 길에……. 넌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야?”

“응.”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리아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어제 민수는 세미나 때문에 오늘 제주도에 간다고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너, 주말까지 제주도에 있을 거라며? 그래서 나보고 대신 과일 바구니 전해달라고 한 거잖아.”

“어, 그랬는데……. 별장에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그냥 돌아왔어.”

심심하긴 무슨! 제주도 갈 때마다 이집 저집 맛집 탐방하느라 바쁘면서……. 아예 처음부터 당일로 제주도에 다녀올 계획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혹시, 일부러? 리아는 민수의 표정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모았다. 눈치가 느린 것 같으면서도 아주 눈치가 빠른 민수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다시 태호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알아차린 거라면? 그래서 그녀가 병원에 찾아갈 구실을 만들어준 거라면? 다짜고짜 사골국을 들고 온 것도 그렇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온 것도 그렇고……. 순간 리아는 민수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하는 유혹이 생겼다. 고작 며칠이었지만, 끙끙거리고 혼자 고민하자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처럼 고역이었다. 그나마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덜 힘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엔 민수보다 완벽한 상대는 없었다. 그래, 너 마침 잘 왔다. 하나의 난자가 쪼개진 일란성 쌍둥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란성 쌍둥이 역시 쌍둥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남인가? 엄마 배 속에서 무려 10달이나 꼭 붙어 지낸 사이잖아! 빠른 고심 끝에 리아는 자신의 반쪽인 민수에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리아는 활짝 웃으며 민수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러나 민수는 뒤로 물러나 팔짱을 풀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저기, 리아야.”

“응?”

리아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민수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람 쉽게 믿지 마.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까. 알았어?”

응? 다짜고짜 이게 무슨 말이야? 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그 말 하려고 이 한밤중에 찾아온 거야?”

민수는 가끔 이상한 말을 그녀에게 툭 던지곤 했지만, 일부러 그녀를 찾아와서까지 한 적은 없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원래 당연한 말이고, 평소엔 그녀가 민수에게 충고하던 말이기도 했다.

“아니, 너 보고 싶어 왔어. 얼굴 봤으니까 됐다. 나, 갈게.”

민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독거리듯 리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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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강한 사람이야. 그거 잊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민수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대로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했다.

“쟤, 왜 저래?”

리아는 사라지는 민수의 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민수는 심각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

―사람 쉽게 믿지 마.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까. 알았어?

혹여 태호를 믿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잠시 후,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만약 경계해야 할 상대가 태호나 태호의 가족이었다면 민수는 지금처럼 아리송하게 돌려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호랑이 굴에 들어간 처지니까. 눈앞에서 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데, “도망가!”라고 외쳐야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속삭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수가 말하는 상대는 누구지? 민수의 차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리아는 선뜻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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