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다시 안을 수 있을 때까지…….2021.08.04.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얼굴이 화끈거리며 벌겋게 되려 하자, 리아는 용수철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참, 음료수 깜빡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태호는 속 터지는 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아, 물 마시면 돼.”
“아니,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 먼저 먹고 있어. 음료수 사 올게.”
말을 마친 그녀는 뛰듯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병실 문을 닫고서야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리아는 한 손으로 부채질하며 무작정 복도를 따라 걸었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정말 정신 못 차리지? 네가 지금 십 대 소녀야? 아니지, 십 대일 때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무자식이 상팔자’ 클럽을 결성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5년 후에 이혼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한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두 사람의 2세를 상상하며 혼자 들뜨다니! 아무리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지만, 이건 지나쳐도 너무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한번 물꼬를 튼 상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크기를 키워나갔다.
“……태호를 닮았다면, 정말 사랑스럽겠지?”
어느새 음료수 자판기 앞에 도착한 리아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판기를 보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아무 버튼이나 꾹 눌렀다. 잠시 후, 음료수 캔이 ‘덜컥’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캔을 꺼내던 리아가 잠시 주춤거렸다.
“……식혜?”
하고 많은 음료수 중에 왜 하필 식혜지? 음료수를 확인하는 리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속담 중에 “식혜 먹은 고양이 속”이란 말이 있다. 죄짓고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건데……. 죄지은 거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거나, 좋아하는 거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닐까?
“하하.”
왠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아, 리아는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 다음 날, 팀원끼리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리아에게 민훈이 다가왔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훈은 평소보다 어두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회의 도중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집중하느라 그랬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네, 정 대리님. 말해보세요.”
“그게…….”
민훈은 팀원들 모두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잠시 뜸을 들였다. 이윽고 회의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말문을 뗐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해서 내가 빠지면 안 되겠지만……. 한 3일 정도 휴가를 받을 수 있을까? 급히 본가에 내려가 봐야 해서.”
“본가라면 부산?”
“응.”
그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 며칠 전 수진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선배 부모님 모두 요양원에 계신다고 들었어. 꽤 됐지, 아마?
혹시 부모님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선 항상 밝기만 하던 민훈이 표정이 오늘처럼 굳어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부모님 편찮으셔? 그런 거라면 3일이 아니라, 일주일 넘게 빼줄 수도 있어.”
“……아.”
찰나였지만, 민훈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두 분 아주 건강하셔. 매주 등산도 함께 다니시는걸.”
“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말꼬리를 흐린 리아는 살며시 민훈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마주 보며 모르는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요양원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매주 등산도 함께 다닌다니? 먼저 털어놓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왜 지금도 사실을 숨기는 걸까. 처음으로 리아는 민훈이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사람과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흐음.”
왠지 꺼림칙한 기분에 리아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
“그날 새벽에 사모님께 문자를 보낸 이는…….”
남 비서는 태호에게 태블릿 화면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정민훈 대리가 맞습니다.”
남 비서는 리아에게 동의를 얻어 기지국으로부터 수신과 발신 정보를 받아냈다. 그날 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아도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정 대리 휴대폰을 잠시 가져갔다거나, 또는 해킹으로 사모님께 문자를 보냈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문자를 지웠다면 정 대리 본인도 몰랐을 겁니다.”
“……그건 그래.”
태호는 보고를 들으며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훈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애꿎은 상대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좀 이상합니다. 혹시나 해서 정민훈 대리의 뒷조사를 좀 더 해봤거든요.”
그 말과 함께 남 비서는 옆에 두었던 서류 파일을 집어 태호에게 건넸다.
“제가 전에 정민훈의 아버지인 정창식이 ㈜정직에서 2년 동안 잠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놓친 게 있더군요.”
“놓친 게 있다니?”
태호는 의아한 얼굴로 서류 파일을 들추었다. 당시 정창식은 생산직에서 근무했다고 들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그가 근무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창식의 아내, 그러니까 정민훈의 어머니인 배연주도 ㈜정직에서 경리로 근무했더군요. 그것도 10년 넘게 꽤 오랫동안…….”
“뭐?”
서류를 훑어보던 태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배연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마도 배연자란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래전에 이름을 개명했더군요. 그래서 제가 놓치고 말았습니다.”
“배연자라면……?”
“네.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그 인물이 맞습니다.”
태호가 아는 바에 따르면 배연자는 ㈜정직이 두 개의 회사로 갈라지게끔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당시 경리를 맡았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며 한밤중에 강 회장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한 달 후, 회사가 두 개로 쪼개졌다. 물론 이유는 강 회장이 관리하던 가공 육류에서 식용에 사용할 수 없는 성분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밤중에 찾아온 배연자의 발언 역시 강 회장이 동업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배연자의 아들이 지금 주원식품에서 근무 중인 정민훈 대리라고? 얼마 전까지 리아와 사귀었던 그 정민훈?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석연치 않은 점이 또 있습니다. 배연자가 배연주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후랍니다.”
“복역이라니?”
태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주)정직이 두 회사로 나뉘면서 배연자는 다른 회사로 취직했는데, 다음 해에 공금 회령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었답니다. 제가 알아낸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는 태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명 뭔가 있어.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아하.”
리아는 병실 문 앞에서 보물단지라도 되듯 가슴에 안은 과일 바구니를 꽉 끌어안았다. 맹세컨대, 연속해서 병실을 방문할 계획은 없었다. 어제 반찬을 싸들고 왔었으니까, 오늘은 퇴근 후 조용히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고!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이건 모두 그녀의 반쪽인 민수 탓이다. 한창 퇴근 준비 중인 그녀에게 불쑥 찾아와서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덜컥 안겼다.
“내가 오늘 병문안 갈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네가 이거 태호에게 전해줄래?”
무슨 소리야! 어제 내가 좋아하는 티 안 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오늘 하루는 쉬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눈치 빠른 태호에게 그녀의 감정을 들킬 게 뻔했다. 리아는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일 바구니를 도로 민수에게 안겼다.
“싫어, 난 오늘은 집에 가서 쉴 거야. 어제도 늦게까지 병원에 있었다고. 넌 오늘 안 되면 내일 가면 되잖아.”
“나, 내일은 세미나 때문에 제주도 가. 주말까지 거기 있다가 다음 주 월요일에나 올라올 거라서…….”
그러면 너무 늦겠네. 그때쯤 되면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할 텐데……. 마음이 약해져서 민수의 부탁을 들어주려던 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그래도 과일 바구니 때문에 위험을 자초할 순 없어!
“그건 네 사정이고.”
조금은 매몰차다 싶게 리아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
그러자 어깨를 으쓱거린 민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제주도 가면서 먹어야겠다. 한라봉처럼 비타민C가 많은 감귤이랑 견과류가 뼈 회복에 좋다고 해서 일부러 주문했는데…….”
“응?”
왜 하필 뼈 회복에 좋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던 태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눈에 훤히 보이던데……. 가뜩이나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성격에 혼자 얼마나 끙끙거리고 있을까! 솔직히 과일이랑 견과류를 먹는다고 오늘 당장 금이 간 뼈가 말짱하게 낫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를 위해 준비한 과일 바구니를 매정하게 물리친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하루 더, 조심하면 되지 뭐. 어차피 퇴원하고 집에 오면 이제부터 매일 얼굴 봐야 하는데. 그전에 안 들키게 연습도 할 겸, 오늘 하루 더 간다고 무슨 큰일이 있을까 싶었다.
“알았어, 이리네.”
그래서 리아는 빼앗듯이 민수에게서 과일 바구니를 건네받고 다시금 태호의 병실을 방문했다. 긴장한 채로 숨을 들이마시며,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간호사가 태호의 상태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이렇게나 간호사가 반가울 수가! ‘백의의 천사’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간호사가 있는 순간에는 최대한 그녀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리아가 어떻게 나와도 태호는 그저 연기라고만 받아들일 것이다. 고개를 숙여 간호사에게 인사한 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침대 옆 테이블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오빠, 비타민C랑 견과류가 뼈 회복에 좋다고 해서, 좀 가져왔어.”
태호는 오빠라는 호칭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크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분명 그 자신도 남들 앞에선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으니까. 리아는 과일 바구니에서 제일 큼직한 한라봉을 꺼내어 껍질을 깠다.
“자, 오빠. 아, 해봐.”
“……거기 놔. 이따가 먹을게.”
그녀의 과도한 친절이 불편했는지 태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라봉을 거부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간호사가 생긋 웃어 보였다.
“체크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드릴게요. 제가 있어서 어색하신가 봐요.”
어머, 아니에요! 이 언니가 가긴 어딜 간다고! 리아는 저도 모르게 간호사의 팔을 와락 잡아버렸다.
“그러지 마세요. 찬찬히 아주 찬찬히 체크해주세요. 그래야 우리 오빠,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잖아요.”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버리면 그녀는 다시금 쌀쌀맞게 태호를 대해야 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간호사가 있어 주는 게 그녀에겐 크나큰 도움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리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간호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꼼꼼하게 태호의 상태를 차트에 적어 내려갔다. 다행히도 다 끝내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리아는 다시 태호에게 고개를 돌려 생글생글 웃으며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태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이런, 소름 돋을 정도로 싫은가 보다. 연기라고 생각해도 못 견딜 정도로 거슬린 걸까? 그러자 갑자기 불쑥 오기가 생겼다. 왜 이래? 우리 그래도 예전엔 좋았잖아. 서로 죽고 못 살던 때도 있었잖아! 리아는 좀 더 달콤하게 웃으며 태호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굴을 바짝 들이민 상태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다 나으면 내가 꽉 안아줄게. 지금은 갈비뼈를 다쳐서 껴안지도 못하잖아.”
말이 끝나는 순간, 태호의 얼굴이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욱! 태호는 날카롭게 가슴으로 퍼지는 통증을 느끼며 숨을 들이마셨다. 주리아!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때늦게 강수미와의 일로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뻐근하게 아픈데 심장 박동이 미친 듯 빨라지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것도 모르고 리아는 눈꼬리를 휘며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져도 좋으니까, 리아를 숨도 쉬지 못하게 꽉 끌어안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제길! 태호는 뚫어지듯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기다릴게.”
그녀가 안아준다고 하는데 어찌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너도 기다려.”
태호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아야.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널 다시 안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