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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내 남자는 내가 챙겨야지. (44/81)

44. 내 남자는 내가 챙겨야지.2021.08.01.

“……나쁘진 않네.”

사골국 시식 후, 태호가 내린 평가였다. 예전 같았으면 “나쁘지 않다고? 왜? 너무 맛있어서 위기감 느낀 건 아니고?”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리아는 잠자코 종이 가방에서 즉석 밥을 꺼냈다.

“밥도 같이 먹을래? 국만 먹기 그렇잖아. 반찬도 좀 챙겨왔어.”

이어서 주원식품 반찬 세트를 꺼낸 리아는 간소하게나마 테이블 위에 상을 차렸다. 왜 저러지? 태호는 아까보다 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리아를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다친 남편 안 챙긴다고,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나? 하지만 태호가 아는 한, 그의 어머니 정 여사는 리아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략 결혼한 사이에 무슨 아내 노릇이라며, 말리면 말렸지. 소정도 싫은 소리를 할 리 없었고, 태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리아는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걸까? 유심히 살펴보니 그릇에 반찬을 옮기는 리아의 손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안색 역시 좋지 않은 것 같다. 자꾸만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바짝 긴장한 것 같은데…….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결국, 태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어?”

예상이 맞았는지 리아는 흠칫 놀라며 동작을 멈추었다. 누가 구미호 아니랄까 봐! 귀신같이 알아챘네. 혹여 마음을 들킬까 봐, 일부러 눈도 안 마주쳤는데……. 흑, 망했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포기할 순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리아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태호가 뒷말을 이었다.

“내가 분명 올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런데도 퇴근하자마자 찾아온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야. 그렇지?”

“아니…….”

“아니거든!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걱정도 되고, 하룻밤 못 봤다고 보고 싶기도 해서 온 거거든!”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하자, 리아는 살며시 혀끝을 깨물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지금은 최대한 감정을 숨겨야 한다.

“할 말은 무슨? 근처 지나는 길에 들른 거라고 했잖아.”

그 말에 태호는 고갯짓으로 테이블을 가득 채운 반찬 그릇을 가리켰다.

“지나는 길에 들른 건데, 이렇게 음식을 챙겨왔어?”

흠……, 그러네. 솔직히 그녀가 보기에도 지나는 길에 들른 것치곤 좀 과하긴 했다. 너무 바리바리 싸 왔나?

“맞아,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건, 그냥 해본 말이고. 사실은…….”

어쩔 수 없이 리아는 진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하지만……. “태호야, 나, 널 다시 좋아하게 됐나 봐.”……라고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었다.

“흠흠.”

리아는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병원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거야.”

태호의 입원이 대외적으론 비밀이라지만, 그를 돌보는 병원 의료진이나 직원들에겐 아니었다. 아무리 입단속 한다고 해도, 리아가 이곳에 발길을 끊으면,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퍼질지도 모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강수미와의 오피스텔 밀회 기사가 온라인을 장식했으니까. 심하면 두 사람은 이미 별거 중이라는 황당한 소문으로 커질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지 태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일 찾아올 필요까진 없어.”

하, 천하의 까칠남 아니랄까 봐, 완전 철벽을 치시네. 며칠 전의 리아였다면, “알았어. 그럼 퇴원하는 날 올게.”라고 투덜거리며 바로 병실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본심을 깨달은 이상, 더는 그럴 수 없었다. 태호야, 내가 널 여기 혼자 두고 어떻게 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거라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호가 야속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옆에서 자고 갈 순 없겠지만, 챙겨온 음식이라도 다 먹는 모습은 보고 가야겠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거야?”

그녀가 일부러 기분 상한 티를 내자, 그제야 태호는 마지못해 다시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올리다 통증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팔을 들면 가슴에 통증이 오는 것 같다. 아까 민수도 그랬었다. 갈비뼈에 금 갔을 때, 팔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고. 몰랐다면 무심코 넘겼겠지만, 이젠 그가 어떤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어떡하지? 태호가 아파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리 줘. 내가 먹여줄게.”

리아는 재빨리 태호의 손에서 수저를 빼앗아 들었다.

“뭐?”

태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골국을 가져다준 것만으로도 서쪽에서 해가 뜰 판인데, 이젠 먹여주기까지 하겠다고?

“팔 올리면 갈비뼈 아프잖아.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밥을 먹여준다니.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머니 정 여사가 밥을 먹여준 기억은 유년 시절 이후엔 한 번도 없었다. 아플 때마다 먹여달라고 칭얼거리던 태문, 태희와는 달리, 그는 딱히 아픈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프다고 해도 양팔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왜 남의 손을 빌려서 밥을 먹느냔 말이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도 어색한 것보단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리아야.”

괜찮다고 하려는데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골국을 보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 아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더니, 사모님 기다리시느라고 그러셨네요. 오늘 통 드시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간호사는 차트를 넘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병원식이 입맛에 맞진 않겠죠. 그래도 회복이 빠르게 하려면 잘 드셔야 해요.”

오늘 통 먹질 못했다니! 울컥 감정이 솟아올라, 리아는 손에 쥔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랬으면 말을 했어야지. 환자 체크를 마친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자, 리아는 원망 어린 눈으로 태호를 흘겨보았다. 오늘 이렇게 왔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음 남편이 병원에서 굶든 말든 전혀 신경 안 쓰는 못된 아내가 될 뻔했다. 태호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리아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런 줄도 모르고 혼자만의 감정에 휩쓸려 끙끙거리고 있었으니까. 마음의 빗장이야 도로 잠그든 못 잠그든, 그거야 나중 일이고, 지금 태호가 아파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는데……. 그래, 내 남자는 내가 챙겨야지.

“자, 먹어.”

리아는 젓가락으로 동그랑땡 반찬을 집어 태호에게 내밀었다. 안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비장 어린 표정이었다. “됐어. 내가 먹을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살벌한 표정을 보니 군소리 없이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태호는 못이기는 척, 그녀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었다.

“자, 이것도 먹어.”

이번엔 사골국에 말은 밥을 숟가락으로 한술 떠 가져왔다. 첫 번째로 받아먹는 게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쉽게 넘어갔다. 물론 어색하고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았다. 닭살도 돋고, 유치해도, 뭐랄까? 가슴이 뻐근하게 아픈 느낌이랄까. 절대로 갈비뼈에 금이 가서 그런 건 아니다. 태호는 다음 반찬을 심각하게 고르는 리아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 다음 날, 리아는 정시 퇴근 후, 곧장 한남동 본가로 향했다. 이미 전화로 연락받은 정 여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아를 맞이했다.

“그래서 나 보고 반찬을 챙겨 달라고?”

“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요리에 서툴러서요. 그리고 아플 때 제일 생각나는 게 엄마 음식이잖아요.”

“그거야 그렇다만…….”

정 여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까지 태호는 아픈 적이 거의 없었기에 어머니인 그녀조차 뭘 해줘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천재 소리 듣던 둘째 아들, 어디 뇌만 튼튼했나? 몸도 아주 튼튼했다. 그 덕분에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물론 사고 소식에 놀라서 그녀도 병원에 달려가긴 했었다. 그러나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는 태호를 보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놓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호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1년 안에, 사이가 좋아질 수 있게 노력한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며느리가 아들을 챙겨준다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그때 마침 주방으로 들어서던 태희가 차곡차곡 쌓인 반찬통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뭐예요? 어디서 파티해요?”

“태호 씨가 입맛이 없는 것 같아서 반찬 조금 가져가려고요.”

잉? 이게 ‘조금’이라고? 조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태희는 리아를 골탕 먹이려고 태호가 반찬 투정을 부린다고 넘겨짚었다. 자기는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새언니는 집에 편하게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딴에는 리아 편을 들어준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뭘 귀찮게 반찬까지 싸가요? 오빠, 그냥 병원 밥 먹으라고 해요. 병원 밥은 저염식이라서 건강에도 좋다고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리아는 반찬통을 모두 종이 가방에 담자, 태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매정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가씨. 지금 작은오빠는 환자예요.”

“네?”

“저,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친 리아는 양손에 종이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살며시 태희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태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언니, 왜 저래?’라는 듯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정 여사는 ‘난들 아니?’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현관을 나서는 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늘따라 며느리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아주 예쁘게 느껴졌다. ***

“이번에 다친 직원들, 위로금 지급하는 거 잊지 말고.”

서류를 확인을 끝낸 태호는 남 비서에게 태블릿을 돌려주며 재차 강조했다.

“그건 이미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룹 차원 말고도 KJ푸드 단독으로도 진행해. 한 사장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아, 저, 그런데…… 이사님.”

태블릿을 가방에 넣으며 남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강수미가 문병 와도 되냐고 묻더군요.”

“절대로 안 되는 거 알지?”

그 말에 태호는 크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화해했는데 또다시 리아와 다투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이미 제 선에서 처리했습니다. 그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남 비서는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이제 앞으로는 될 수 있으면 남 비서가 혼자 강수미를 만나도록 해.”

“……아, 네.”

태호의 지시에 남 비서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분명 불만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아내 사랑과 후배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아내 사랑이니까.

“강수미에게 이번 사고, 미리 귀띔해준 건 고맙다고 전해.”

말을 끝낸 태호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곧 리아 올 시간이다.”

그러자 남 비서는 급히 손으로 한쪽 뺨을 감쌌다. 어제보단 검붉은 기가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 비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에 종이 가방을 든 리아가 병실에 들어왔다. 어제보다 조금 늦게 온 것 같더니, 어디서 쇼핑이라도 하고 왔나? 했지만, 정작 종이 가방에선 크고 작은 반찬통이 끊임없이 나왔다. 태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 한 번 먹은 반찬도 또 안 먹잖아. 그래서 오늘 딱 먹을 만큼만 가져왔어.”

오늘 딱 먹을 만큼이라면서 이 많은 반찬통은 뭘까? 평소에 천하장사처럼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리아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입원을 결정했던 거지, 이렇게 매일매일 병시중 하러 오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돌아가자, 태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반찬통을 노려보았다. 팔 아프게 왜 이 무거운 걸 혼자 들고 온 거야. 리아는 태호가 표정을 굳힌 이유가 어제처럼 주원식품 제품인 줄 알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주원식품 반찬 세트 아니니까. 어머님이 손수 준비해주셨어. 아플 땐 엄마 밥이 최고잖아.”

“어머니가 손수?”

“응.”

그녀가 생각해도 조금 많이 부탁하긴 했지만, 정 여사는 군소리 없이 직접 반찬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이리도 잘생긴 아들 먹이려고 요리하는 건데 하나도 힘들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잘난 아들은 둔 시어머니는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셨겠네! 리아는 정 여사가 한없이 부럽게 느껴졌다. 나도 태호 쏙 닮은 멋진 아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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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행복하겠지? ……?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리아는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을 깨닫고 흠칫 굳어버렸다. 헐!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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