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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나, 나쁜 여자인가 봐. (43/81)

43. 나, 나쁜 여자인가 봐.2021.07.28.

“그때 자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그래서 내가 한발 물러섰던 거고…….”

태호와 주 회장이 시선이 조용히 맞물렸다. 이윽고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랬었죠. 제가…….”

그때 태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거의 손에 들어왔던 것을 놓칠 순 없었으니까.

―회장님, 저는 진심입니다. 정략결혼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결혼입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믿으며 태호는 주 회장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했다. 그리고 리아와 자신이 과거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두 사람의 사이를 전혀 몰랐던 주 회장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꽤 오랫동안 주 회장은 할 말을 잃은 채로 길게 한숨만을 내쉬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주 회장은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처음엔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못난 어른들 때문에 둘 다 마음고생이 심했겠더군.”

주 회장이 계획보다 더 오래 해외 출장 기간을 늘린 건,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난 솔직히 아무것도 모른 척 연기할 자신이 없네. 특히 집사람이 눈치가 너무 빨라서……. 내가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한다면 금방 탄로 날 걸세.”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아니야, 그게 자네 잘못은 아니지. 그리고 말이지, 지금 벌이고 있는 일…….”

그날, 태호는 주 회장에게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직의 동업이 깨진 이유가 어쩌면 누군가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나 주 회장은 선뜻 태호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호가 알아낸 정보를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나도 최대한 돕겠네. 만에 하나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그 말을 끝으로 주 회장은 편히 쉬라며 병실을 나섰다. 혼자 병실에 남은 태호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곗바늘은 저녁 6시가 조금 안 되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할 시간이군. 분명 자신이 먼저 오지 말라고 말했지만, 퇴근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은근히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오지 않을 테지만……. 며칠 안 보는 사이만이라도 리아가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억누르면 그만이니까. ***

“커억, 컥. 말로 해. 말로.”

민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리아는 한참 후에야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리아는 캑캑거리는 민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저기압인데? 그리고 날 보고 뭘 책임지라는 거야?”

민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목을 문질렀다.

“몰라.”

리아는 대답을 거부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도 안다. 괜한 화풀이라는 거. 민수가 일부로 두 사람을 맺어지게 하려고 대리출석을 부탁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자꾸만 얄밉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민수는 힐끔 눈치를 보며 가져온 제품을 앞으로 내밀었다.

“퇴근하기 전에 이거 좀 시식해 봐. 이번에 우리 팀에서 개발한 사골국인데 국물이 완전 죽이거든.”

“죽이는 국물 같은 소리 한다.”

리아는 꼴 보기도 싫다는 듯 민수가 건네는 제품을 손으로 밀쳐냈다. 민수는 지금 리아가 저기압인 이유가 병원에 있는 태호가 걱정되어서라고 넘겨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남친이자, 현남편이 사고로 병원에 있는데 마음이 무겁겠지. 어쩌면 당장에라도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래서 일부러 태호에게 가져다주라고 사골 제품을 골라서 가져온 거다. 그런 뜻깊은 배려도 모르고 리아는 민수를 향해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도 일부러 가져왔는데 헛수고하고 싶지 않은 민수는 다시금 사골국 제품을 리아 앞으로 밀었다.

“그나저나, 태호 녀석, 갈비뼈에 금이 간 거면 숨 쉴 때마다 꽤 고통스러울 거야.”

그 말에 리아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정말?”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민수는 옆으로 바짝 다가가며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응. 나도 재작년에 축구 하다가 갈비뼈에 금 간 적 있잖아. 왜, 기억 안 나? 나 그때 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끙끙거리면서, 팔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그랬었나? 리아는 재작년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민수는 항상 비실비실하고 허구한 날 아픈 편이라서, 솔직히 왜 아픈지는 샅샅이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그거 은근히 통증 심해. 숨 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고.”

태호가 괜찮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주치의도 깁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고,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했었다고. 그런데…… 통증이 꽤 클 거라고?

“……그렇게 많이 아파?”

리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민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프지. 뼈에 금 간 건데…….”

순간 리아는 가슴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갑자기 밀려드는 죄책감에 숨을 죽였다. 올 필요 없다는 태호의 말에 병원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니. 그뿐인가? 한동안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며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 나, 나쁜 여자인가 봐. 리아는 울고 싶은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퇴근하고 병원 들를 거지?”

“응.”

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는 앞에 놓인 사골국 제품을 툭툭 건드렸다.

“뼈가 도로 붙는 데도 한 달쯤 걸릴 거야. 뼈 회복엔 사골국이 최고니까, 이거 가지고 가. 그래서 일부러 챙겨온 거니까.”

이런 걸 보고,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는 걸까? 결국, 리아는 잠시만이라도 민수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민수가 준 사골국 제품을 종이 가방에 가득 넣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민훈과 마주쳤다.

“강 이사, 사고 났다고 들었어. 지금 병원에 있다며? 사실이야?”

증축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는 이미 뉴스에 보도되었지만, 태호의 사고는 비밀이었다. 모두 쉬쉬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민훈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응.”

리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병원에 입원했다며…….”

“그렇긴 한데 크게 다친 건 아니고, 갈비뼈에 금이 간 정도야. 그래도 혹시 몰라서 상태 지켜보려고 입원한 거고.”

민수에 말에 의하면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꽤 통증이 큰 거라지만, 이상하게도 민훈에게 태호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왜인지 태호가 싫어할 것 같았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어?”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민훈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었을 테지만, 얼마 전 새벽에 있었던 일 이후로 어딘지 모르게 민훈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민훈의 잘못은 아니지만, 누군가 계획적으로 두 사람을 불러낼 정도라면, 어디선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도 된다. 혹시 알아? 지켜만 보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

“나, 늦었다. 먼저 갈게. 내일 봐.”

리아는 대답을 생략한 채, 재빨리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민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지금 그녀는 민훈의 기분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다. 리아의 머릿속에는 고통에 허덕일지도 모르는 태호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

“이사님.”

남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저를 놓는 태호를 바라보았다. 진통제나 통증 때문에 입맛을 잃었는지, 태호는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상을 물렸다. 식기에 담긴 음식은 반도 채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병원 밥이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제가 밖에서 사 올까요?”

“아니, 됐어.”

“잘 드셔야 회복이 빠릅니다.”

“나중에……. 나중에 먹을게. 그보다 사고 현장 수습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한 사장이 현장에 내려가서 직접 수습하고 있답니다.”

“그래?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 본인이 직접 수습해야겠지.”

태호는 피식 입매를 비틀며 남 비서가 건네는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이곳저곳에 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공장 증축 현장에까지 손을 쓰고 있었다니……. 처음 강수미에게 공장 증축 현장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건축자재를 뒤로 빼돌리고, 건축 업체 선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모두 한 사장의 지시로 일어난 일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 사고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 회장님도 전무님과 함께 사고 현장에 들렀다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눈치를 채신 건 없고?”

“한 사장이 워낙 철저하게 숨긴 터라……. 경찰 조사가 있겠지만 그냥 형식적인 절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겠지.”

태호는 표정을 굳히며 남 비서에게 태블릿을 돌려주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한 사장을 건드렸다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테니까. 힘들지만 조금만 더 인내해야 한다. 완전히 몸통을 끄집어내 말끔히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진…….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남 비서가 뒤를 돌아보려는데 문이 스르르 열리며 리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분명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리아가 병실에 모습을 나타내자, 태호는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의 우려가 맞는지, 리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근처 지나다가 들렀어.”

근처 지나다가 들렀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태호는 리아의 뻔한 거짓말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병원에 입원한 자신보다 그녀의 안색이 더 창백해 보였다. 혹시 근처 지나다가 들렀다는 말이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왔다가 들렀다는 말은 아니겠지? 태호와 마찬가지로 남 비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은 한쪽 뺨에 검붉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오늘 리아가 이곳에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에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았다. 이런! 남 비서는 서둘러 한 손으로 뺨을 가리고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

“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 비서가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잠시 병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리아는 아무도 없는 병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녁은 먹었어?”

“……어, 그게…….”

태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리아는 민수에게 받은 사골국 제품을 종이 가방에서 꺼냈다.

“아직 안 먹었으면 이것 좀 먹어 봐. 이번 가을에 출시 예정인 사골국이야.”

태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골국 제품과 리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범한 부부 사이였다면 당연히 뼈 잘 붙으라고 가져왔다고 믿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당연히 의문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걸?”

태호가 굳은 표정으로 묻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리아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머, 어떡해! 티 났나 봐. 누군가 그랬지? 연기를 숨길 수 없듯이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도 쉽게 숨길 수 없다고. 그 말이 정말 맞나 보다. 그저 사골국만 건넸을 뿐인데도 느껴지나? 아직은 들키면 안 되는데…….

“왜겠어? 나중에 우리가 이거 출시하고 나서, KJ푸드 제품 카피했다고 시비 걸지 말라고, 먼저 시식해 보라고 가져왔어.”

리아는 최대한 쌀쌀맞게 말하며 제품을 뜯어 그릇에 담았다. 혹시라도 태호가 눈치챌까,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잘 봐. 로고 디자인, 음식 사진도 완전 다르고, 포장 색상도 달라. 물론 맛도 다르고. 우리 제품이 기름을 싹 걷어내서 훨씬 더 깔끔하다고.”

그제야 굳었던 표정이 풀리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 알았어.”

어떻게 보면 비웃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런데 왜 이리 멋진 거지? 태호가 피식 웃어버리자, 순간 얼굴이 붉게 물들고 말았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오는 건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리아는 재빨리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등을 돌렸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줄게.”

음식이 데워지는 5분 동안, 리아는 손부채질하며 붉어진 얼굴을 정상으로 되돌리려 애썼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리아는 차갑게 말하며 침대 음식 테이블 위에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사실 마음 같아선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면서,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인 남자 앞에서 떨고 있다니……. 리아는 그런 자신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나서,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날이니까. 태호를 코앞에서 보니까 더 미치겠다. 사람이 양심도 없이, 뭐 이리 섹시한 거야? 긴 속눈썹하며, 숟가락을 잡은 기다란 손가락하며……. 한마디로 인간 명품 그 자체였다. 다시 얼굴이 붉어지려 하자, 리아는 서둘러 창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 마음을 들킬 게 분명하다. 불안한 마음에 리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어쩌면 좋지? 애타는 질문에 해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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