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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나쁜 남자가 취향이었던 거야? (42/81)

42. 나쁜 남자가 취향이었던 거야?2021.07.25.

“욱.”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태호가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이사님, 아직은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깜짝 놀란 남 비서가 서둘러 말렸지만, 태호는 다시 침대에 누우면서도 리아가 뛰어나간 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방금…… 리아, 울면서 나간 거 같은데……. 맞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남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쉽사리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리아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이제까지 억눌린 스트레스가 폭발했다는 증거다.

“……성후야.”

“네, 선배님.”

태호가 나직이 남 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사적인 호칭으로 부를 땐 대화 역시 사적인 내용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남 비서는 긴장한 얼굴로 태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리아가 본 거 같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가린다고 가렸는데…….”

남 비서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어제 리아에게 맞았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신경 써서 잘 가려.”

“네, 선배님.”

어제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던 남 비서의 뺨은 다음 날이 되자, 검붉은색으로 변해버렸다. 박 비서의 도움으로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발랐지만, 완벽하게 가릴 순 없어 가까이서 보면 바로 티가 났다. 그러니 리아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자신이 핸드백을 휘두른 상대는 한쪽 뺨이 검붉게 변해 서 있지, 원래 때리려 했던 상대는 갑자기 사고가 났다며 병실 침대에 누워 있지. 가뜩이나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 온갖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텐데……. 그러다 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졌나 보다. 다시는 리아를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왜 자꾸만 그녀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뱃멀미가 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 몸속에 진정제 기운이 남아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본의 아니게 리아를 울리게 돼 나타난 후유증이랄까. 다친 몸만큼이나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후.”

태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소식을 들은 강 회장과 태문이 달려오고, 좀 더 세밀한 정밀검사를 위해 태호를 서울 한국대학 종합병원으로 이송했다. 검사 결과는 성모병원과 마찬가지로 큰 이상은 없다고 나왔지만,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며칠 더 입원하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괜찮다고 퇴원하겠다고 할 텐데, 어쩐 일인지 태호는 주치의 의견에 동의했다. 입원 첫날, 태호는 리아에게 그녀가 병원에 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내일부턴 오지 마. 퇴원하게 되면 그때 남 비서가 연락할 거야.”

태호는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리아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마음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 그럼.”

한동안만이라도 태호를 피하고 싶었던 리아는 그의 의견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풀려버린 빗장이 도무지 다시 채워질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까. 태호 얼굴만 봐도 주책없게 가슴이 두근거려, 그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녀가 정말 태호를 싫어한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병실엔 정 여사와 강 회장은 이미 집에 돌아가고 태희만 남은 상태였다. 태희의 표정도 리아와 비교해 그리 다를 건 없었다. 태희는 갈비뼈에 금 좀 갔다고 병실 침대를 차지한 태호가 정상이 아니라고 여긴 모양이다.

“오빠, 지금 꾀병 부리는 거지.”

“내가 넌 줄 알아?”

태호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태희는 상관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리아가 옆에 있으므로 태호가 자신을 어찌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야? 갈비뼈에 금 간 것 빼곤 아무 이상 없다며…….”

태호는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그렇게 속 긁을 거면 그냥 집에 가라.”

“오케이!”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태희는 재빨리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패막이로 리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새언니, 어서 가요. 새언니도 내일 출근하려면 집에 가야죠.”

얄미운 시누이지만, 이럴 땐 제법 도움이 된다. 리아는 태희에게 이끌려 병실을 나섰다.

“새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작은오빠 멀쩡하니까. 나, 갈게요.”

리아의 속마음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태희는 혼자 키득거리며 차에 올랐다. 리아는 태희가 차를 출발하고서야 자신의 차에 올랐다. 태희 덕분에 병실을 빠져나올 순 있었지만, 자꾸만 침대에 누운 태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 정말…….”

짜증나 미치겠다. 그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리아는 운전대를 잡고 힐끗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든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발, 작작 좀 해라, 주리아! 리아는 뺨을 손등으로 꾹꾹 내리누르며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애정과 애증은 정말 한 끗 차이인가 보다. 애증이 애정으로 바뀌자, ‘미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돌을 영접하고 온 열성 팬처럼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어떻게 저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아, 아니다, 그냥 쳐다본 게 아니라 노려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땐 정말 그럴 수 있었다. 완벽하게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방사성폐기물 처리하듯 이중 삼중으로 꼭꼭 둘러싸서 마음속 저 깊고 깊은 곳에 영구히 격리해놓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빗장이 풀릴 줄이야. 리아는 어두운 밤거리를 노려보며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태호를 좋아하지 않았던 시간보다 좋아했던 시간이 더 길긴 했다.

“그래, 주리아. 인제 그만 솔직해지자.”

리아의 입에서 고해성사와도 같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사실을 털어놓자면, 태호에게 초콜릿을 받기 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게 진실이다. 물론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놀아주던 태문 보다, 까칠한 표정으로 책만 읽던 태호에게 눈길이 간 건 사실이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물론, 혼자 잘난 척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태호가 얄밉기도 했다. 흥, 천재가 뭐라고! 아무리 어른들이 태호를 천재라고 칭찬해도, 리아의 눈에 태호는 또래 꼬마로 보일 뿐이었다. 함께 놀고 싶은 아주 잘생긴 꼬마. 하지만 태호는 우당탕 집 안을 휘젓고 다니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태호의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앞에서 뛰어다닌 건데……. 뛰는 것으로 안 되자, 태호가 있는 서재로 가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조금이라도 날 보아줬으면……. 같이 놀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매정한 태호는 커튼을 휙 걷으며 태문에게 그녀가 숨을 곳을 알려줄 뿐이었다. 아앙, 너 미워. 정말 밉다고! 결국, 리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던 태호는 우는 그녀에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야, 이거 너 먹어.

그 나이 또래 아이에겐 황금 덩어리보다 더 귀중한 초콜릿을 말이다. 얼마나 심장이 떨리던지, 자칫 잘못하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물론 너무 어릴 때 일이라서, 조금은 더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기억이 변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초콜릿을 준 건 사실이다. 그때 한 번뿐이 아니라, 그다음부턴 계속 그녀에게 초콜릿을 양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태호는 여전히 서재에 앉아 책을 읽었고, 아무리 앞에서 알짱거려도 같이 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운했지만,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그 후, 동업이 깨지며 두 집안 사이가 멀어지고도 리아는 가끔 어린 시절 왕자님이었던 태호를 떠올렸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태호의 외모가 공붓벌레처럼 역변했을 때는 솔직히……. 아주 솔직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 이젠 아무도 안 쳐다보겠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우연히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둔갑한 태호와 마주쳤다. 클럽에서 만났을 땐 구미호가 태호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감각은 본능으로 알아보았나 보다. 그러니 다짜고짜 생일 선물이라며 서프라이즈 뽀뽀를 날렸겠지. 하다 보니 뽀뽀가 아니라 키스가 되었지만……. 그 후 민수의 부탁으로 대리출석을 해주다가 다시 태호와 재회하게 되었고, 그대로 빠져들었다. 나중에 상대가 강태호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도 차마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태호를 어찌 외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과거는 그랬다 치고.

“아이 씨, 망했어.”

정지 신호에 차를 세우며, 리아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내리쳤다. 철없던 20대 시절에야 그럴 수 있겠지만, 이젠 아니잖아. 사랑은 사랑, 일은 일, 인생은 인생. 서로 깔끔하게 구분해야 하는 나이다. 그런데도 ‘사랑보다 일이 더 중요해!’를 외치며 멋지게 이혼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사랑한다고 일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선 둘 다 차지할 순 있다. 하지만 그녀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강태호였다. 이제는 그녀를 강가에 돌멩이처럼 바라보는, 그래서 그녀를 체스 말쯤으로 여기며 이용하는 냉정한 구미호, 강태호 말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날이 5년이나 남았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태호에게 넘어가다니……. 실망이야, 주리아! 그날 밤, 집에 돌아간 리아는 ‘어떻게 하면 다시 마음의 문을 잠글 수 있을까?’ 하는 궁리로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끝내 뾰족한 해결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하고 나서도 그녀는 틈만 나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강수미와 서로 껴안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정이 좀 떨어지려나? 하지만 정이 떨어지긴커녕, 미칠 것처럼 질투심만 끓어오를 뿐이었다. 이번엔 그가 얼마나 독설가인가를 떠올려보았다.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난도질할 것 같은 날카로운 말을 내뱉곤 했으니까. 그런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리아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나쁜 남자가 취향이었던 거야?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새로 개발한 제품을 손에 든 민수가 들어섰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책상 앞에 서 있는 리아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리아야,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태호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리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민수를 힐끗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민수 때문이니까. 태호를 사랑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 주민수!

“……민수야.”

“응, 그래. 말해봐.”

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하자, 리아는 민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갑자기 리아에게 멱살을 잡힌 민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왜 이래?”

“책임져.”

“책임지라니 뭘?”

“이게 모두 다, 너 때문이잖아. 그때 나에게 대리출석 부탁만 안 했어도…….”

오늘따라 리아는 자신의 반쪽인 민수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

“괜찮은가?”

주 회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병실에 들어섰다. 예정보다 길어진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태호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공항에서 병원으로 달려오는 길이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다고 들었네만…….”

주 회장이 다가오자, 몸을 일으키려던 태호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도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주 회장이 말을 이었다.

“입원하길 잘했어. 원래 사고 후유증이라는 게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니까, 이럴 때 푹 쉬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네, 회장님.”

태호가 계속해서 자신을 회장님이라고 부르자, 주 회장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젠 회장님 부르지 말고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네, 장인어른.”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주 회장이었다.

“기억나나? 결혼식을 1주일 남기고 내가 자넬 찾아간 일. 아무래도 이 결혼은 안 되겠다고, 회사 살리자고 내 딸을 호랑이 굴에 보낼 수 없다고 말했었지.”

그랬다. 만약 그때 주 회장이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리아와 태호의 결혼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자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그래서 내가 한발 물러섰던 거고…….”

태호와 주 회장이 시선이 조용히 맞물렸다. 이윽고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랬었죠.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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