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가 아파, 내가 아프다고!2021.07.21.
“구차하게 거짓말까지 할 것 같진 않아.”
“……리아야.”
수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수미와 강태호의 스캔들 기사가 뜨고 난 후, 그 누구보다 분노했던 수진이다. 자신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왜 강태호는 강수미 같은 수준 낮은 여자와 놀아나고, 마음에도 없는 리아와 결혼까지 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캔들 기사로 인해, 리아가 조금이라도 태호를 더 멀리하게 된다면 그것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호를 싫어한다고 믿었던 리아에게서 엉뚱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뭐랄까? 태호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굳어지던 리아의 표정이 조금은 느슨하게 풀렸다고나 할까?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정략결혼 부부에게도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 수진은 불안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수진의 속을 전혀 모르는 리아는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아니라니까, 아닌 거겠지. 태호 성격에 그걸 나에게까지 속일 필요는 없잖아.”
어제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만 그를 믿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의심했지만, 태호는 변함없이 진심으로 나왔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건 불만스럽지만, 그렇다고 그의 진심이 퇴색하는 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인 거고.”
수진이 여운을 남기며 작게 중얼거리자, 리아는 곧바로 말을 받았다.
“응. 사실이야. 난 그렇게 믿어.”
그 탓에 급격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대화는 수진이 태호의 흉을 보는 것을 리아가 편들어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안 하려니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느낌이다. 수진이 먼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떠올렸고, 리아 역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결국, 수진도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화제를 바꿨다.
“민훈 선배는 요즘 어때? 아직도 너에게 찝쩍거리니? 유부녀가 됐는데도?”
“선배와 난 직장동료일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네. 난 왠지 모르게 정 선배 싫더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진은 민훈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야, 네가 주원식품 딸이라는 걸 알면서 순수한 마음으로만 다가오겠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 그리고 정 선배 아버지, 오래전에 ㈜정직에서 근무했다더라. 우리 아빠가 졸업식장에서 정 선배 아버지를 봤대.
왜 갑자기 과거에 수진이 한 말이 떠올랐을까? 리아는 잠시 식사를 멈추고, 심각한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수진아…….”
“응?”
“정 선배 아버지, 부산에 계신다고 했지?”
민훈과 오랜 시간 알고 지냈지만, 그에 관해 아는 것은 부산에 본가가 있다는 정도였다. 오히려 수진이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무슨 요양원에 계신다던데…….”
“요양원?”
“응. 선배 부모님 모두 요양원에 계신다고 들었어. 꽤 됐지, 아마?”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아니고 민훈이 구태여 리아에게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구나.”
리아는 다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곧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강수미 스캔들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거짓 문자로 그녀와 민훈을 한밤중에 불러낸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 두 사람의 스캔들로 가장 이득을 볼 인물이겠지? 도대체 그게 누굴까? 리아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며, 머릿속을 굴렸다. 하여간 잡히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거야.
*** 띠리리릭―. 수진과 헤어지고 차에 타려는데 핸드백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응?”
생전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평소 같으면 받지 않았을 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아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강태호 씨, 아내 되십니까?]
휴대폰 저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그런데요. 어디시죠?”
[진천 성모병원 응급실입니다.]
“네?”
리아는 휴대폰을 든 채로 제자리에 얼어 불어버렸다.
[보호자 수술 동의서에 사인이 필요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휴대폰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흘러나왔다.
“수, 수술 ……동의서라니요?”
리아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게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남편분께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응급차에 실려 오셨어요. 아무래도 MRI 검사를 해야 정확하게 상태를 알 수 있어서요.]
그다음부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태호가 방금 응급실로 실려 왔다는 말과 MRI 검사를 해야 정확하게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거야?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통화했는데, 난데없이 왜? 병원까지 어떻게 달려갔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마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가면 안 된다는 각오로 최대한 교통수칙을 따르며 빛의 속도로 차를 몰았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며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처럼 목이 탔지만,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로 뛰어든 리아는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병원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저, 강태호 환자 보호자예요. 그이는 지금 어디 있죠?”
직원의 연락을 받은 담당 간호사가 신속히 달려왔다. 담당 간호사는 태호의 상태를 설명하며 그가 있는 곳으로 리아를 안내했다.
“보호자가 오시는 도중에 환자분이 깨어나셔서 본인이 직접 동의서에 사인하셨어요. 지금은 검사 모두 끝나고 회복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리아의 질문에 담당 간호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공장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환자분은 크게 다치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MRI 검사를 한 거니까, 결과 나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회복실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는 태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을 지키는 남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진정제가 몸에 남아 있으니까, 조금 이따 환자분이 눈을 뜨시면 그때 대화하세요.”
태호의 상태를 살펴본 간호사가 회복실을 나서자, 남 비서가 리아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사모님에까지 연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미동 없이 누워있는 태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리아가 물었다. 남 비서는 군더더기를 모두 잘라내고 짧게 설명했다.
“증축 공사장 현장을 둘러보던 중, 작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이사님은 안전모를 착용하고 계셨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으셔서 혹시 뇌를 다친 건 아닐까 하는 우려에 MRI 검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만이 검사 동의서에 사인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남 비서의 사과는 태호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리아에게 불필요한 연락이 간 것에 관한 것이었다. 리아는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남 비서가 동의서에 사인할 수 있었다면 내게는 연락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 네. 괜히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남 비서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지금까지 꽉꽉 눌러두었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우리 진짜 결혼한 거 아니야. 태호가 내 진짜 남편 아닌 거 나도 안다고! 하지만 이렇게 사고가 났는데……, 저렇게 힘없는 얼굴로 내 앞에 누워 있는데……. 어떻게 내게 연락할 필요까진 없었다고 하는 거야! 리아는 속으로 크게 외치며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흐윽.”
이제까지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호야……, 태호야……! 제발 아프지 마. 리아는 속으로 흐느끼며 스르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뭐? 사고?”
사고 소식을 들은 강 회장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있던 태문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 회장과 태문의 반응이 생각보다 거세자, 비서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크게 다친 직원은 없습니다. 마침 사고 현장에 있던 이사님이 신속히 상황을 지휘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내가 안전 수칙 따르면서 공사 진행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나!”
강 회장은 화난 얼굴로 소리치며 벗어두었던 재킷을 서둘러 걸쳤다. 태문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 회장의 뒤를 따랐다. 계열사이지만, KJ푸드는 KJ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므로 가만히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네. 한 사장은 이미 그쪽으로 출발했겠지?”
“네. 그리고 주리아 팀장도 사고 소식을 듣고 진천 성모병원으로 향했답니다.”
“새아가가 거긴 왜?”
비서의 보고에 강 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그게…….”
비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 이사님이 사고 현장을 지휘하시던 중, 갑자기 건물이 더 부서졌답니다. 그때 잔해를 맞고 정신을 잃어 응급차에 실려 가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어서…….”
“뭐야?”
강 회장과 태문은 충격받은 얼굴로 동시에 크게 외쳤다. ***
“흑흑.”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목 놓아 울면 안 되는 상황이란 걸 알았지만, 이성이 몸을 지배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자, 남 비서는 어쩔 줄 모르고 리아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 혼자 서 있을 수도, 의자에 앉을 수도 그렇다고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제 그만 고정하시고…….”
“……미,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흑.”
리아의 눈물은 MRI 검사 결과를 가진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회복실에 들어오고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 빼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진통제 복용하시고, 혹시라도 심한 두통이나 다른 통증이 따르면 바로 내원하세요.”
크게 다친 곳은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리아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갈비뼈에 금이 갈 정도로 큰 충격이었는데 이상이 없다니…….
“진통제만 가지고 되겠어요?”
“네, 우선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난 괜찮아.”
리아가 뭐라고 하려는데 순간, 태호가 천천히 눈을 뜨며 작게 속삭였다. 태호의 목소리에 리아는 바로 뒤돌아 침대로 다가갔다.
“정신 좀 들어?”
“응.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안 아파.”
안 아프다니! 입술이 바싹 마른 주제에 태호는 리아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 찢어지거나 부러진 곳만 없을 뿐이지 말도 못 하게 아플 텐데……. 아니다. 다른 곳 다 멀쩡하고 손끝만 살짝 베었다고 해도 리아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아프게 되는 건 너무나 싫었다. 그런데도 태호는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만을 늘어놓았다.
“머리만 조금 어지러울 뿐이지, 큰 통증은 없어.”
이 바보야! 큰 통증이든 작은 통증이든 통증은 통증이라고! 결국, 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네가 어떻든 난 상관 안 해.”
독설에 가까운 말에 태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정제를 복용하고 검사를 받은 탓에, 한동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희미하게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숨을 죽여 울고 있어서 확실하진 않았다. 그러나 코끝이 빨개진 리아를 보는 순간,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울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 리아의 어머니인 민 여사가 쓰러진 경험이 있었기에, 단지 그녀가 조금 겁을 먹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리아의 입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파! 내가 아프다고!”
순간 태호는 그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프다니?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태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금 리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네가 다치면 내가 아프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마.”
흐느낌 같은 속삭임을 입안으로 삼키며 리아는 황급히 회복실을 걸어 나갔다. 아, 미치겠네!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며 리아는 거칠게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가끔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금 너무나 큰일이 일어났으니까. 병원 건물을 빠져나온 리아는 허탈한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태호야.”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죄이는 것처럼 아프다니…….
“흑, 태호야.”
어쩌면 좋아! 굳게 잠갔던 사랑의 빗장이 힘없이 풀려버렸다. 아, 진짜 큰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