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갑자기 당한 거라서……2021.07.18.
혹시……? 강수미 말고 또 다른 여자라도 있는 거야? 리아의 머릿속에 잠시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사라졌다. 아니겠지. 그녀가 아는 강태호라면 거짓말까지 하면서 뒤에서 몰래 여자를 만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하러 구질구질하게 그럴까. 정말 업무 때문에, 비밀 프로젝트 때문에 오피스텔에 간 거겠지? 리아가 생각에 잠긴 동안, 태호는 열심히 적당한 구실을 찾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 도무지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털어놓을까? 그렇다면 민 여사가 빚은 손만두를 먹고 체했다는 사실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장모님이 해준 요리를 먹고 바로 탈이 나는 사위라니! 사위로서 완전 낙제다. 게다가 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황해하겠지? 조금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자칫 잘못하면 화해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기에 대답에 신중해야만 했다. 결국, 태호는 도박해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리아에게 예전 감정이 남아 있다면,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믿어줄 것이다. 만약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쏘아붙이겠지만…….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지금 내게 강수미가 중요한 존재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남녀로서는 아니야.”
“그래?”
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중요한 존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강수미는 KJ푸드의 전속 모델이니까. 그녀는 잠자코 태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 믿어.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너야. 그런 너를 속이면서까지 애정 행각 벌일 생각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리아는 재빨리 태호의 말을 받았다. 그녀도 그만큼이나 확실히 해두고 싶은 사항이었다. 그녀 역시 애정 행각을 벌일 마음의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상대가 정민훈이든, 아니면 강태호이든.
“좋아, 그럼.”
리아는 이쯤 해서 끝내자는 뜻으로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게 끌어봤자, 서로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진 않을 테니까.
“강수미와의 스캔들 기사,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너도 정 선배일 그냥 넘어가.”
태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떠올렸지만, 이윽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내민 손을 잡으며 그가 짧게 동의했다. 가볍게 악수를 마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거두었다. 이상하다. 막상 화해하고 나니까,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리아는 태호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싸울 때가 더 편한 거지? 그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태호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싸늘한 눈빛은 아무렇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말랑해지려고 하면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었다.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서……. 좋았던 그때가 생각나서.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약해지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절대로 안 되는데…….
“그런데 네 기사는 왜 아직도 안 내려가는 거야?”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리아는 아무 말이나 던지고 보았다. 하지만 질문하고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기사 뜬 지가 언제인데 그의 기사는 아직도 포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마 오늘 일로 남 비서가 병가를 내고 일찍 퇴근해서는 아니겠지? 의외로 태호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루에 두 기사를 한꺼번에 내릴 순 없으니까. 내 기사는 아마 내일쯤 서서히 사라질 거야.”
“남 비서는 어때? 괜찮은 거지?”
“글쎄……? 내일 출근해서 보면 알겠지.”
태호는 정확한 대답을 회피한 채, 빠르게 리아를 지나쳐 침실로 향했다. 사실 남 비서는 리아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었다. 뺨이 약간 빨개지긴 했지만, 붓기는 없었고 멍이 들 정도도 아니었다. 부러진 안경테만 그새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던 남 비서의 얼굴은 ‘아까 어떻게 된 거야?’라는 태호의 질문에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남 비서는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당한 거라서…….
―리아가 남 비서를 나로 착각해서 갑자기 공격한 거라고?
―아뇨. 제가 갑자기 당한 거라고 말한 상대는 사모님이 아니라 강수미입니다. 강수미가 난데없이 저를 껴안는 순간 사모님이 집무실에 들어오셔서…….
―그래?
태호는 ‘왜 강수미가 너를 끌어안아?’라고 묻는 대신, 남 비서의 어깨를 한두 번 두드려주었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이성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훗.”
침실에 들어온 태호의 입에서 참았던 웃음이 흘러나왔다. 리아는 절대로 질투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질투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뭐든 깐깐하게 이성적으로 따지는 리아가 한순간 이성을 잃고 폭발했다는 사실이 뭔가 희망 적으로 느껴졌다. 괜히 한 방 맞은 남 비서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남 비서는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태호는 미소를 띤 얼굴로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 다음 날, 오전 회의를 마친 리아는 점심도 거르고 KJ푸드 본사로 달려갔다. 도무지 남 비서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호에게 물어봐도 되겠지만, 정확히 그녀 눈으로 남 비서의 상태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간 김에 병원비와 안경값도 물어주고, 밥도 사주고. ……아, 위자료도 줘야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를 기다린 건, 어제 반차를 낸 덕분에 자리를 비웠던 박 비서였다.
“어머, 사모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이사님은 한 시간 전쯤 진천 공장 증축 현장을 둘러보러 가셨는데요.”
“남 비서님도 함께 갔나요?”
“네, 그럼요.”
박 비서의 대답에 리아는 겸연쩍게 웃으며 굳게 닫힌 집무실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바늘이 가는데 실이 안 갔을 리가 없겠지.
“급한 일이세요? 이사님께 전화해 볼까요?”
“아뇨, 아니에요. 지나는 길에 잠깐 들른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박 비서가 수화기를 들자, 리아는 두 손을 내저으며 재빨리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헛걸음치긴 했지만, 그래도 태호를 따라 지방 공장을 둘러보러 간 것으로 보아,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만약 흉하게 얼굴이 부었거나, 멍들었다면 태호를 따라 지방에 내려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을 테니까. 우선은 한숨 돌렸고, 다시 기회 봐서 남 비서를 만나야겠다. 만나서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해야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태호에게서 온 전화였다. 연락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박 비서가 그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나 보러 왔다고. 무슨 일이야?]
역시나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예상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너를 보러 온 거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라고 말하려 했는데……. 순간 울컥하며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실망감이 뒤늦게 밀려왔다. 나, 왜 이러지? 오늘 아침까지 얼굴 마주 보다가 각자 출근했는데, 실망할 게 뭐가 있다고……! 어제 일로 너무 충격 받아서 잠시 감정이 흔들리나 보다. 리아는 숨을 들이켜며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남 비서 어떤지 보려고 왔어.”
[저런……. 지금 옆에 있는데 바꿔줘?]
“아냐, 아냐. 지방까지 따라간 걸 보니 괜찮은가 보네. 하지만 만약에라도 이상 있으면 바로 연락해줘.”
[알았어. 그럼.]
태호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다시금 실망감이 밀려왔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처럼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 주리아, 너 정말 왜 이러니! 그런 자신이 못마땅한 리아는 벽에 기댄 채, 눈살을 찌푸렸다.
[일 끝나면 여기서 바로 퇴근할 거야. 어때? 이따 저녁 같이할래?]
리아의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태호는 전화를 끊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우습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데이트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 사람끼리 ‘함께 저녁 먹자.’라는 말에 가슴이 설렌다니……. 그것도 결혼하게 되면 될수록 식사는 따로따로 하자고 조건을 내건 주제에 말이다. 양심에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태호의 제안을 물리칠 생각은 없었다.
“좋아. 같이해.”
[알았어. 남 비서는 해산물을 좋아하니까, 네가 알아서 장소 예약해.]
그 말을 끝으로 태호는 전화를 끊었다.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녁 같이할래?’라는 말에 남 비서가 포함된 거였어? 점심시간을 활용해 남 비서를 보러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에라도 만나게 해주려는 태호의 배려가 느껴졌다. 이성적으론 이해하는 거라면 그게 맞다. 하지만 둘만의 식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자,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아쉽긴 뭐가 아쉬워? 정신 차리자, 주리아!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리아야.”
뒤를 돌아보자, 수진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태호 오늘 진천 공장 증축 현장 돌아보러 갔는데……. 허탕 쳤네?”
“어, 그냥 지나는 길에 들린 거라서…….”
“어머, 얘는 그런 거라면 집에서 맨날 보는 태호가 아니라 나를 보고 가야지.”
리아의 팔에 팔짱을 끼며 수진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리아는 수진, 유정과 어울렸지, 앙숙인 태호와는 서로 으르렁댔으니까. 하지만 오늘 리아가 만나러 온 사람은 태호가 아니라 남 비서였다. 그러나 이유를 설명하다 보면 어제 그녀가 저지른 실수까지 튀어나올 터라, 리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미안, 듣고 보니 그러네.”
리아가 곧바로 사과하자, 수진은 재빨리 서운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리고 팔짱 낀 리아의 팔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점심은 먹었어? 난 아직 점심 전인데, 안 먹음 같이 먹자.”
밥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차피 먹긴 먹어야 했으므로 리아는 수진을 따라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덕분에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다. 점심으로 나온 생선커틀릿이 담긴 식판을 들고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프로 생선커틀릿을 자르며 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 그 기사 때문에 태호를 찾아온 거지? 참고만 있자니, 속에서 불이 나니까…….”
그 기사라면 강수미와의 스캔들 기사를 가리키는 것일 테다. 기사는 오늘 아침이 돼서야 서서히 온라인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거의 하루 동안 포털 검색 상위권을 기록한 탓에 이미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을 게 뻔하다. 예전 같았으면 수진과 함께 욕을 실컷 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리아는 피식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속에서 불날 일이 뭐가 있어? 그저 추측성 기사일 뿐이야.”
리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수진의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추측성이라니? 그날 두 사람이 거기 있었던 건 팩트 맞잖아.”
“그렇긴 한데……. 태호에게 물어보니까 그날 강수미가 거기 있었다는 것도 몰랐대.”
“얘, 넌 지금 그 말을 믿니?”
예전 같았으면 ‘미쳤니? 내가 그 말을 믿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태호의 그 말…….”
리아의 입에서 확신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믿어.”
그리고 앞으로도 믿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