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질투하는 거 아니거든!2021.07.14.
리아는 재빨리 자신이 폭력을 행사한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헐!”
안경이 벗겨진 남 비서가 리아에게 맞은 뺨을 한 손으로 감싼 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태호가 아니었어? 그제야 리아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어떡해, 어떡해! 뒷모습만 보고 그만 착각하고 말았다. 남자가 남 비서라는 걸 알았더라면 둘이 껴안고 있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문 닫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태호라고 생각하니까 두 눈에 불이 켜지면서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리아는 자신의 폭력적 성향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이성이 사라지자, 제일 먼저 손부터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행사한 건 용납할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갑질하는 진상들과 뭐가 달라! 나, 이렇게 폭력적인 여자였어?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숨고만 싶다. 남 비서의 한쪽 뺨은 대충 보기에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리아는 빠르게 남 비서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남 비서님, 정말 미안해요. 제가 그만 착각을 해서…….”
그래도 "야! 강태호!”라고 외치고 때렸으니까, 그녀가 아무에게나 핸드백을 휘두른 게 아니라는 걸 알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픈 건 아픈 거다. 게다가 저 멀리 날아간 안경은 안경테 다리가 크게 휘어져 있었다.
“안경, 내가 새로 해줄게요. 아니, 그것보다 병원부터 가봐요. 얼굴이 많이 부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모르니까 가봐요. 우선 얼음찜질부터 하고…….”
리아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 동안, 강수미는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순간 리아는 잊고 있었던 강수미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리아는 질문을 요구하는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멀리서 지켜만 보던 태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박 비서가 오늘 반차를 내고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군. 있었으면 골치 아플 뻔했어.”
그 말에 리아는 죽일 듯 살벌한 눈으로 태호와 강수미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 모든 일의 주범이 누군데? 왜 두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인 거야! 이게 다 너희 때문이라고! 리아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태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남 비서, 병원 들렀다가 오늘은 그냥 퇴근해. 내일, 병가 내려면 내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도 병원 가. 안 그러면 리아가 오늘 한숨도 잘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강수미 씨는 볼일 끝났으면 그만 가시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수미는 재빨리 소파에 놓인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따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리아의 팔을 잡으며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언니, 얼굴 봐서 반가웠어요. 다음엔 더 오래 봐요.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
강수미가 집무실을 나가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남 비서였다.
“이사님, 병원 가는 건 가는 거고, 우선 스캔들 기사부터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그러자 태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냥 놔둬.”
“네?”
“그래야 리아의 스캔들이 잠잠해질 테니까.”
그 말에 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불똥이 나에게로 튀는 거야? 태호는 마치 그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명확히 짚고 넘어가자. 그녀는 누군가의 함정에 의해 민훈을 만나러 간 거지만, 그는 제 발로 걸어서 강수미를 만나러 간 거였다. 그것도 급한 업무가 생겼다고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왜 난데없이 날 끌어들여? 그리고 내 기사는 안 되고, 네 기사는 괜찮아? 너, 그러다 이미지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래?”
“상관없어. 난 떳떳하니까.”
듣고 보니, 참 그렇다. 떳떳하다고? 뭐가?
“그 말은 난 떳떳하지 않다는 거네?”
태호는 리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모서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야기라면 집에 가서 하자. 지금은 급히 끝낼 업무가 있어서…….”
말을 끝낸 태호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는데, 더 이야기하자고 매달리기는 싫었다. 리아가 순순히 집무실을 나서자, 남 비서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말 죄송해요, 남 비서님.”
리아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전했다. 남 비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항상 안경을 쓰고 있을 땐 몰랐는데, 남 비서의 안경 벗은 모습을 보니, 평소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리아는 저도 모르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런데 남 비서님, 강수미랑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요?”
그 말에 남 비서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리고 항상 차분하게 말하던 그의 입에서 큰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대로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절 덮친 거예요.”
“네?”
무슨 소리야, 강수미가 남 비서를 덮친 거라니? 강수미는 태호의 여자인데, 이젠 태호의 주변 남자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걸까? 하지만 리아의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남 비서가 꾸뻑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이사실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리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 비서가 나간 문과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없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
강수미의 스캔들 기사를 접한 한 사장이 화난 얼굴로 크게 소리 질렀다. 분명 리아와 민훈의 사진을 특종으로 넘기는 조건으로 이 기사는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주 팀장의 기사를 올릴 수 없게 되니까, 이거라도 올려야 한다고.”
“우 기자가 그래?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
“그리고 이번에 자신이 아니라, ‘센트럴’에 특종 기회를 줬다고 앙심을 품은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 그래? 내가 특종 기회를 줬다고!”
한 사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가 한 일이라곤 ‘센트럴’ 기자에게 주리아 뒤를 따라다니면 재미난 일이 있을 거라고 귀띔한 게 전부다. 한밤중에 리아와 민훈이 몰래 만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어제 드디어 ‘센트럴’ 기자에게 들켰나 보다. 후, 앙큼한 년! 뒤로 호박씨를 깠다 이거지. 과정이 어찌 되었든 한 사장은 리아의 스캔들 기사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리아의 스캔들 기사는 모두 사라지고, 그가 막았던 태호와 강수미의 스캔들 기사가 온라인을 뒤덮었다. 한류 스타인 강수미의 인기가 워낙 높으니,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기사를 퍼 나를 게 뻔했다. 이미 손쓰기엔 너무 늦은 걸까? 한 사장은 불쾌한 눈으로 스캔들 기사로 도배된 태블릿 화면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아주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강태호는 재벌 3세 중에서도 배우 뺨치게 인물이 뛰어나니, 그러다 보면 스캔들이 날 수도 있다. 그것 때문에 주리아와 사이가 삐걱거린다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한 사장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분통은 터졌지만, 이쯤 해서 넘기기로 했다. 그래도 아쉽긴 아쉬웠다. 망신당하는 거라면, 태호가 아니라 리아가 돼야 했는데…….
“참, 운도 좋아.”
한 사장은 크게 투덜거리며 집어 던지듯 태블릿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 남 비서 일 때문에 리아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KJ푸드 본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런 기분으로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순 없고, 집으로 가자니 속이 터졌다. 아, 맞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소식이 빠른 민 여사는 이미 온라인을 뒤덮은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지만, 민 여사가 걱정하기 전에 일을 수습해야 한다. 태호가 강수미를 오피스텔로 불러낸 날은, 처가를 방문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맛있다면서 장모가 만든 손만두를 넙죽넙죽 받아먹던 사위가 다음 날 쪼르르 애인에게 달려갔다니! 이를 알게 된 민 여사가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까? 가뜩이나 앙숙인 집안으로 시집간 리아가 걱정돼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 졸이는 민 여사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길 순 없었다. 리아는 서둘러 민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음이 가자마자 민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그거 아냐. 기사 그거, 사실 아니라고.”
리아는 민 여사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기자들이 괜히 이야깃거리 만든 거야.”
잠시 침묵이 흐리고 민 여사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니야?]
“응. 나, 태호가 거기 가는 거 알고 있었어. 원래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마다 보안을 위해서 가는 곳이야. 그러니까 엄마, 다시 말하는데 전혀 걱정하지 마.”
[……그래, 알았어.]
리아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민 여사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리아는 민 여사와 이런저런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왜 그녀가 그 대신 변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급한 불을 꺼서 다행이다. 통화를 마친 리아는 신혼집으로 차를 몰았다. 어제 잠도 설쳤고 하니,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있자니, 정신이 또랑또랑 맑아졌다. 그러다 보니 별별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남 비서와 다 같이 짜고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강수미는 배우니까 그런 연기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그리고 남 비서는 태호의 오른팔이었다. 태호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리아가 왔다는 걸 로비에서 연락받고 마침 스캔들 기사 때문에 방문한 강수미와 그녀가 오해하게끔 연기한 거라면? 아니야, 아니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막장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배우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강수미는 왜 옆에서 키득거린 거지? 내가 실수한 게 웃겨서? ‘언니, 언니’ 하며 착 엉겨 붙으면서 하는 짓은 천상 여우였다. 그것도 꼬리 아홉 개가 달린 불여우! 그러고 보니 강태호와 강수미가 천생연분처럼 느껴졌다.
“하아.”
끝내 리아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초지종을 들을 때까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저녁도 거른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태호가 집에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띠리릭, 현관문 잠금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태호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거실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는 리아를 보고도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단지 지나가듯 말을 건넸을 뿐이다.
“왜? 지금 그 행동, 질투하는 거냐고 물어봐 줄까?”
뭐라니? 태호의 도발에 리아는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거 질투하는 거 아니거든!”
물론이다. 절대로 질투일 리가 없었다. 그저, 응가 묻은 댕댕이가 겨 묻은 댕댕이 보고 뭐라고 하니까, 기가 막혀서 이러는 거다. 절대로 질투로 이러는 게 아니고, 공평하지 않으니까 그에 대한 반박일 뿐이다. 하지만 다짜고짜 핸드백을 휘두른 건 잘못된 게 맞다.
“좋아, 폭력을 쓴 건 내 실수였어. 그건 나도 인정해.”
남 비서에게 충분히 사과했지만, 원래는 태호를 때릴 작정이었으니까 그에게도 사과하는 게 옳았다.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우선은 좋게, 좋게 말로 해결해야 했다.
“나 역시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리아가 사과하자, 태호도 이어서 사과했다. 굳었던 리아의 표정이 조금은 풀리는 것처럼 보이자, 태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사진은 그저 우연이야. 난 그날 강수미를 만나지 않았어. 그녀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강수미도 그랬고.”
그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숨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태호는 뻔뻔스럽게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태도로 나올 테니까. 그래도 의문이 말끔히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일요일에 그곳엔 왜 간 거야? 회사가 아니라, 오피스텔로 왜 갔냐고.”
“……그건.”
순간 태호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태호를 바라보는 리아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니, 반응이 왜 저래?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