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말로만 듣던 소유욕인가? (38/81)

38. 말로만 듣던 소유욕인가?2021.07.11.

“질투하는 거 맞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어서일까? 분명 한국말이 맞는데도 리아의 귀에는 저기 안드로메다의 외계인 말처럼 들렸다. 뭐? 천하의 강태호가 질투한다고? 고양이가 반신욕을 즐긴다고 해도 이보단 놀랍지 않을 것이다. 리아가 말문을 잃은 듯 입만 벌리자, 태호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녀의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질투한다고 하니까 안 믿겨?”

“당연하지.”

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너, 어떻게든 정 선배를 처리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뭐?”

완전 기승전 ‘정민훈’이군.

“……하.”

태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입매를 비틀었다. 참으로 눈물 나는 팀원 사랑이다. 아니, 어쩌면 순수한 팀원 사랑이 아니라, 전남친을 향한 순애보일지도 모른다.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만약 지금 민훈이 옆에 있다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도 남았을 것이다. 불끈 쥔 태호의 주먹에 힘이 가해졌다. 하지만 리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한밤중에 리아를 밖으로 끌어낸 인물은 민훈이 아니니까. 민훈 역시 속아서 장소에 나타났으니, 솔직히 그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였다. 그래도 감히 리아의 허리에 손을 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강한 플래시 불빛에 비틀거리는 리아를 보호하려다 나온 반사 행동이겠지만, 태호에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민훈이 때는 이때다 싶어 리아를 껴안은 것처럼 느껴졌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누가 뭐라도 넌 내 아내야.”

태호는 애써 화를 죽이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

리아는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올라온 기사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태호의 이런 반응은 너무나 낯설었다. 사귈 때조차도 그는 이런 반응을 보인 적 없었다. 사실 그땐 어른들 눈을 피해 몰래 사귀느라, 질투 어쩌고 하는 사소한 감정싸움에 휘말릴 여유가 없긴 했다. 서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처럼 설렐 뿐이었다. 그땐 그랬다. 질투 따위가 흘러들 틈새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 사이도 아닌 지금에 와서, 태호는 왜 질투 운운하며 과잉 반응을 보이는 걸까?

“다른 남자들이 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거, 눈에 거슬려. 특히 네 전남친.”

“뭐?”

리아는 황당할 뿐이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소유욕이라는 건가? 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내이니, 자신의 소유라고 못을 받는?

“지금이 조선 시대라도 되는 줄 알아? 외간 남자와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거야?”

리아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태호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 없으니까. 솔직히 털어놓자면, 다른 남자는 아무리 업무상이라도 단둘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 한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화가 났다. 태호는 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갑자기 왜 저래?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리아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뒤로 피할수록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왔고, 어느새 등에 거실 벽이 닿았다.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자, 리아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그래서 뭘 어쩌라고?’라는 눈으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태호는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팔을 벌려 벽을 짚자, 단숨에 단단한 품에 갇힌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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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속은 뜨끔 했지만, 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잡았다. 동물의 세계에서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눈빛을 교환하는 것처럼, 이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기 싸움이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허점을 보여선 안 된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며 부딪쳤다. 그런데……. 잠시 후, 리아를 향하던 날카로운 눈빛이 물결에 출렁하는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어라? 어느새 변해버린 분위기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눈빛으로 시작했는데 왜 갑자기 달콤해진 거지? 리아는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말랑말랑한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아느냐고? 헤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둘이 연인이었던 시간이 얼마인데……. 눈꼬리가 조금만 내려가도, 미간에 약간만 주름이 잡혀도, 그가 어떤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난 후, 그는 대부분 감정을 자제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가끔 화가 난 듯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곤 했었다. 이런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오로지 타인 앞에서 연기할 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둘만의 공간에서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단지 눈빛만 바꾸었는데, 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공격하는 방법을 바뀌었나? 강한 바람이 코트를 벗기는 게 아니라, 따뜻한 햇볕에 스스로 코트를 벗는 이솝우화처럼?

“……리아야.”

그가 나직이 그녀를 부르며 입술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와, 미쳤다! 이 와중에 왜 이리도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들리는 건데? 너무 설레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리아는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언쟁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숨을 죽였다. 그가 다시금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리아야.”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자, 리아는 스르르 두 눈을 감아버렸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눈을 통해 그에게 전달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태호에게는 그녀가 무척 지친 것처럼 보였다. 한밤중에 문자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더는 밀어붙여선 안 되겠지? 태호는 벽을 짚었던 팔을 내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피곤하겠다. 내일 이야기하자.”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하아.”

태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리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 쉴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어. 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큰일 날 뻔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원래도 그렇게 잠들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둘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한 막이 느껴졌다.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지만, 리아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함정에 빠진 게 억울해서도, 민훈이 걱정돼서도 아니었다. 태호 때문에 미친 듯 뛰던 심장이 밤새도록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호에게 화가 나서인지, 설레어서인지, 호르몬 이상으로 감정이 널뛰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운 리아는 동이 트자마자,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아침도 거르고, 회사로 향한 리아는 사무실에 있는 일회용 컵 수프로 대충 아침을 해결했다. 잠을 설친 탓에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수프를 떠먹는데 민훈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리아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일찍 출근했네. 어젯밤, 별일 없었어?”

민훈은 어젯밤 온라인을 뒤덮은 뉴스에 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남 비서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이 되자, 스캔들 기사는 말끔히 인터넷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누군가 개인 블로그로 퍼 갔지만, 그 역시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소문이 가장 먼저 퍼지기로 유명한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들은 한동안 접속이 안 되기도 했단다.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KJ에서 서버 회사에 압력을 넣어서일까? 하여간 처리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빨랐다.

“별일 없었어. 내 생각엔 누가 그냥 장난친 거 같아.”

리아의 대답에 민훈은 인상을 찡그렸다.

“한밤중, 우릴 끌어내 단둘이 만나게 하고 갑자기 들이닥쳐서 사진 찍는 게 고작 장난이라고? 그건 누군가 우리 사이를 알고 있다는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였던 것 같은데. 너, 강 이사에게 어제 일 말했어?”

“응. 말했어.”

“뭐래?”

뭐라긴, 선배 당장 다른 부서로 옮기라고 하지. 하지만 아무리 태호가 강력히 원한다고는 하지만, 민훈의 잘못이 아닌데 애꿎은 사람에게 사태의 책임을 지게 할 순 없었다. 민훈은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달려온 거니까. 그것보단 누가 그들을 함정에 빠지게 했는지를 찾는 게 우선이다. 잡히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누가 그랬는지 꼭 찾아내겠대. 태호도 우리 잘못 아니라는 거 알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을 맺었다.

“팀장님, 정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앗, 두 분 오늘 일찍 출근하셨네요.”

팀원들이 속속들이 사무실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각자 자리에 돌아간 두 사람은 어젯밤 일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훈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이것 좀 읽어봐.>

문자와 함께 온라인 뉴스가 링크되어 있었다. 뭐야? 기사가 다시 뜬 거야? 초조한 얼굴로 링크를 열어본 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제일 먼저, 강한 볼드체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 강수미, 아직 옛 연인을 정리하지 못했나? > 기사 내용은 그녀와 민훈의 이야기가 아닌, 태호와 강수미의 이야기였다. 연인이었던 재벌 3세가 유부남이 돼서도 강수미와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며, 그 증거로 시간 차이를 두고 몰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진을 기사에 실었다. 모자이크 처리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누가 뭐래도 사진 속 인물은 강태호였다. 사진이 찍힌 날의 숫자를 들여다보던 리아는 눈을 가늘게 모았다. 이날은? 급한 일이 있다면 일요일인데도 출근해서 밤늦게 돌아온 날이다. 리아에겐 분명히 업무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오피스텔에서 강수미랑 밀회를 즐긴 거였어? 자긴 재미 볼 거 다 보면서 나보곤 질투하니 어쩌니 하면서 까칠하게 나왔던 거야? 내 옆에 외간 남자가 얼쩡거리는 거 보기 싫다고?

“하!”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강태호!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직 퇴근 시간은 멀었지만, 리아는 반차를 내고 사무실을 나와 태호의 회사로 차를 몰았다. 바람피운 남편을 응징하러 가는 아내의 몸에 빙의 된 것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리아의 기사는 오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더니, 왜 태호의 기사는 막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남 비서라면 빠르게 일을 처리할 텐데……. 어젯밤 기사를 내리느라 밤샘하고 뻗기라도 했나? 어머, 정말 그런가 보다. 이사실로 들어서자, 항상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남 비서와 박 비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집무실 앞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바로 들어가면 되니까. 리아는 노크를 생략한 채, 벌컥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하지만 한 발걸음도 안으로 들이지 못하고 문 앞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너, ……너.”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두 남녀가 리아 앞에서 엉겨 붙은 자세로 서 있었다. 남자의 넓은 어깨에 가려 여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허리를 감싼 손을 보면 강수미가 틀림없었다. 리아는 저번 파티에서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던 강수미의 곱고 긴 손가락, 그리고 강렬한 빨간 손톱을 아직도 기억했다. 이젠 하다 하다, 집무실 안에서 당당하게 밀회를 즐겨? 이번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야! 강태호!”

리아는 목청껏 태호의 이름을 부리며 그의 어깨를 붙잡아 강수미로부터 떨어뜨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려는 그의 얼굴을 강하게 핸드백으로 후려갈겼다. 그러자 어떤 물체가 저 멀리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어? 저게 뭐지? 하고 물체를 따라 시선을 돌리는데…….

“무슨 일이야?”

어디에선가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휙 뒤를 돌아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태호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네가 왜 거기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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