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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질투하는 거 맞아. (37/81)

37. 질투하는 거 맞아.2021.07.07.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걸까? 침대에서 일어난 리아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신호가 가도 민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또 다른 문자가 날아왔다.

[지금은 전화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링크 보낸 곳으로 빨리 와줘. 기다리고 있을게.]

민훈 성격상 이런 문자를 보냈다면, 정말 다급한 일이 있거나 심각한 일이 생겼을 것이다. 어떡하지?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태호는 등을 돌린 채, 깊이 잠든 상태였다. 그를 깨우려 손을 뻗던 리아는 잠시 후 생각을 바꾸었다. 늦게까지 야근하고 피곤할 텐데, 괜한 일로 깨우고 싶진 않았다. 그냥 살짝 나갔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리아는 서둘러 침대를 빠져나갔다.  

  ***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휘황찬란한 간판의 불빛이 거리를 대낮같이 훤히 밝히고 있었다. 민훈이 만나자고 한 장소는 번화가를 지나 주택가 사이에 있었다. 겉에서 보기엔 디저트와 커피를 파는 평범한 커피숍 같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묘한 분위기에 리아는 다시 한번 밖으로 나가 간판을 확인해야 했다. 커다란 에스프레소 머신과 디저트 진열장이 놓여있었지만, 고객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프레소 머신 뒤로 길게 연결된 복도만 보일 뿐이었다. 복도를 양쪽에 두고 프라이빗 룸이 들어서 있었다. 식당도 아니고 누가 커피숍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다행히 유흥업소는 아닌 듯했다. 그런 곳으로 리아를 불러낼 민훈도 아니긴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리아에게 종업원이 다가왔다.

“예약하셨나요?”

“동행이 먼저 와 있을 거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태블릿을 훑어보며 종업원이 물었다.

“정민훈이요.”

“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태블릿으로 명단을 확인한 종업원은 곧바로 리아를 복도 맨 끝에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리아가 안으로 들어오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민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야!”

한눈에 보기에도 민훈의 표정은 꽤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선배, 무슨 일이야?”

민훈을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되었지만, 한 번도 이런 표정의 그를 본 적이 없었다. 태호와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조차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리아야, 너 괜찮은 거야?”

민훈은 그대로 달려와 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디 다친 덴 없어?”

혹시라도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민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아의 몸을 확인했다. 급한 일로 보자고 하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잠시 후, 민훈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큰 문제가 생겼다고 이곳에서 보자고 했잖아. 아주 급한 일이라고.”

“어?”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귀신보고 큰절하라는 소리야? 지금 누가 누구를 불러냈는데?

“내가 선배에게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는 거야, 지금? 난 선배가 여기로 오라고 해서 온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민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난 선배 문자 받고 왔다고.”

“나도 네 문자 받고 온 거야.”

리아와 민훈은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 서로의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휴대폰 화면에 거의 같은 내용인 문자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의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그때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팡팡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앗!”

눈도 뜰 수 없게 쏟아지는 밝은 불빛에 리아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민훈은 리아가 넘어지지 않게 끌어안듯 허리를 잡아주었다. 팡팡, 연속으로 터지는 플래시 탓에 두 사람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잠시 후, 방금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진 탓에 리아와 민훈은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캄캄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리아는 아무도 없는 앞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방금 그거 뭐였어?”

“글쎄,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군가 이 시간에 두 사람이 함께 있도록 유인했고, 때를 맞춰 사진을 찍어갔다. 이번엔 몰래 찍은 것도 아니고, 대놓고 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며. 완전히 계획을 세워놓고 실행에 옮긴 것처럼……. 하지만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아무래도 누구보다 먼저 태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선배, 나, 이만 가볼게.”

약속 장소를 빠져나온 리아는 급히 집으로 차를 몰았다. 전화부터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보면서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훤히 불 켜진 거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 중인 태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조사해 보니까 이번 건은 ‘팩트 폭’이 먼저 터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스피커 설정이라, 상대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거의 동시에 기사가 떴지만, ‘센트럴’에서 먼저 보도했답니다.]

태호의 통화 상대는 남 비서였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통화하는 것을 보면 꽤 심각한 사항인가 보다. 그래도 리아는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태호에게 말해야 했다. 리아는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가만히 소파로 걸어갔다.

“그래서…….”

태호는 소파에 앉는 리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금 통화에 집중했다.

“인터넷 지라시도 아니고, 정규 신문사가 그런 기사를, 그것도 이 새벽에 터뜨렸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선 어떤 기사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구독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센트럴’이고 보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왜 굳이 센트럴이 KJ그룹을 건드린 걸까? 그러다 고소라도 당하면 꽤나 골치 아플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는 중입니다. 기자가 단독으로 올린 기사인지, 아니면 국장 선까지 개입된 건지, 아닌지.]

“아니, 그보단 당장 기사 내려. 기사 한 줄이라도 남아 있어선 안 돼.”

[네, 알겠습니다.]

남 비서와 통화를 끝낸 태호는 그제야 소파에 앉은 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표정을 보아, 리아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태호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손에 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15분 전, 다급한 남 비서의 전화로 잠에서 깨어났다. 리아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남 비서로부터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24시간 모니터하는 홍보팀에서 남 비서에게 곧바로 보고한 덕분이다. 휴대폰으로 리아와 민훈의 사진이 실린 인터넷 기사를 확인한 태호는 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옆자리에서 자고 있었는데, 왜 저기 있는 거야? 그리고……. 자석에 이끌리듯 리아의 허리를 안고 있는 민훈의 손에 시선이 모아졌다. 두 사람, 이리도 절절 했나? 서로 애달파 한밤중 서로에게 달려갈 정도로? 화나는 것보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럴 거면, 마음을 여는 것 같은 행동이나 하지 말지. 오늘 처음으로 태호는 그런 리아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리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태호는 툭 던지듯 휴대폰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그보단 이 한밤중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말하는 게 먼저 아닐까?”

“그건 말이지…….”

“됐어.”

설명하려고 했지만, 태호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말할 필요 없어. 거기 다 있으니까.”

빈정거리는 말투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는 걸 막으면서 뭐 저리도 못마땅한 거야?

“……아!”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리아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화면에는 서로 껴안고 있는 그녀와 민훈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누가 봐도 그녀와 민훈의 사진이었다. 그것도 바로 좀 전에 있었던 모습 그대로. 플래시가 터져서 사진을 찍혔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새벽 시간에 기사로 터질 줄이야! 기사가 올라가기 전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리아는 어두운 얼굴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한밤중 밀회를 즐기는 J. K와의 세기의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나?> 기사는 노골적으로 리아를 파렴치한 상간녀로 몰고 갔다. K와는 몰래 애달픈 사랑을 한다고 속이며 뒤에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여자로, 겉으론 고상한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여자라는 내용이 이어졌다.

“하!”

리아의 입에서 연신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사를 모두 읽은 리아는 완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 이런 쓰레기 같은 기사가 다 있어? 심지어 여기저기 맞춤법도 틀렸어.”

“그래도 한밤중에 정민훈을 만나러 간 건 사실이지 않나?”

“그건 사실이야.”

그것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 빼곤 기사에 오른 내용은 전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야기하고 나가려고 했었어. 그런데 괜히 자는 사람 깨우기도 그렇고.”

“그래서 이 한밤중에 왜 나간 거야?”

“급한 일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리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태호의 굳은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난 이미 경고했어. 넌 조심하겠다고 했고.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

“……그건.”

태호의 말대로 참혹한 결과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내에서 단둘이 있거나, 오해받을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이렇게 두 사람을 한곳으로 유인해서 사진을 찍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민훈 대리, 내일 당장 2팀으로 보내.”

“말도 안 돼. 왜 여기서 불똥이 선배한테 튀어? 이게 선배 잘못은 아니잖아.”

“아직도 녀석을 감싸겠다는 거야?”

화난 건 이해하지만,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평소의 태호라면 민훈에게 화살을 돌릴 게 아니라, 누가 이런 장난을 쳤는지부터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뭐라고? 녀석?

“아무리 화났어도 녀석이 뭐야?”

“한밤중에 남의 아내 불러내는 녀석을 그럼 녀석이라고 부르지. 왜? 놈이라고 불러줄까?”

마음 같아선 죽일 놈, 개새끼, 미친 자식 등등 마구 욕을 퍼붓고 싶었다. 욕만 퍼붓나? 당장에라도 달려가 멱살을 잡고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리아가 기겁해 할 테니까, 최대한 인내하며 참는 중이다. 리아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태호를 마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토록 화가 났는지 이해는 간다. 어찌 됐든 그녀의 책임이니, 미안하기도 했다. 말하고 나갔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명이란 걸 하자면, 곤히 자는 그를 깨울 수 없어서 말없이 나간 거다. 그런데 저리 나오니, 곤히 자든 말든, 내일 피곤하든 말든 상관없이 깨웠어야 했나? 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태호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냉랭한 시선이 계속되어 쏟아지자, 결국 리아의 입에서 한마디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까지 오버해? 어차피 남 비서가 기사 모조리 내릴 거잖아. 그리고 내가 설명했듯이 이건 누군가 우릴 함정에 몰아넣은 거라고.”

그런데도 태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말 왜 저래?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누가 보면 질투심에 어쩔 줄 모르고 부들부들 떠는 줄 알겠다. 그래서 툭 던지듯 물어본 거였다. 절대로 진지하거나, 심각하게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말에 분노에 휩싸였던 태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왜 저래?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윽고 무겁게 닫혔던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리아를 쏘아보며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질투하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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