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지금 만날 수 있을까?2021.07.04.
“……리아……야?”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환하게 불 켜진 거실은 아침에 그가 집을 나섰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180도 전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가구도 벽에 걸린 액자도 그대로이었다. 하지만 위치가 변해 있었다. 벽 쪽에 붙어있던 소파는 거실 중앙으로, 현관 쪽에 놓인 액자는 창가로 옮겨지는 등 세세한 변화가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태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때 주방 쪽으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주방으로 들어간 태호는 가스스토브 앞에 서 있는 리아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 주위로 이것저것 식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보통 사람이 가스스토브 앞에 서 있었다면 당연히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주리아였다. 요리라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과 빵에 잼을 바르는 것이 고작인 주리아 말이다. 물론 결혼하고 난 후, 불어터진 라면이나 씁쓸하고 비린내 나는 해장국을 끓이긴 했지만, 그건 정말 어쩌다 일어난 사고 같은 일이었다.
“리아야,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러니까 태호의 입에서 이런 물음이 나올 만했다.
“어, 왔어?”
태호의 목소리에 리아는 국자를 든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리아의 모습에 태호는 숨을 들이마셨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그녀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얘, 왜 저래?'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혼란스러운 태호와는 달리 리아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저녁은?”
지금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거야? 점심을 먹었냐고 물어봤을 때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탓에 목이 잠겨버렸다.
“흠, 흠, ……아직.”
“아직? 저녁이 늦네.”
가스스토브 불을 끄고 앞치마를 벗으며 리아가 말했다. 사실은 그녀도 아직 식사 전이다. 혼자서는 통 입맛이 없어 운동이라도 하면 식욕이 돌까 해서 러닝머신 위에서 30분을 달렸지만, 사라진 식욕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소파를 옮기고 액자를 재배치하는 등 쓸데없는 일에 체력을 소비했다. 그 덕분에 아주 조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데워 먹으려니 식욕이 다시 저만치 도망갔다. 간단한 음식이라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인터넷에 뜬 요리 동영상을 검색해 보았다. 항상 칼질이 어려워서 피했는데 동영상에선 가위 하나로 모든 걸 자유자재로 손질하는 등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 요리가 뭐 별거라고. 그녀가 끓여준 라면과 해장국을 입맛 까다로운 태호가 국물 한입 남기지 않고 해치우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제일 만들기 쉬울 것 같은 김치찌개에 도전했다. 그리 나쁘진 않았다. 먹고 죽을 것 같은 비주얼은 아니었다. 한입 맛을 보니 약간 시큼한 게, 뭔가 맛이 빠진 것 같긴 했다. 동영상에선 맛이 덜하다 싶으면 마지막으로 설탕 한 숟갈과 화학조미료를 1/4 숟갈을 첨가하라고 조언했기에 리아는 과감히 설탕과 화학조미료 MSG가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
“옷 갈아입고 와. 저녁 먹자.”
“어? 아…….”
“같이 밥 안 먹을 거라더니 무슨 일이야?”라는 말이 자동으로 흘러나오려 하자, 태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이유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테니까. 함께 식사하자고 묻는데, 그것도 리아가 차린 저녁인데……. 음식에 독을 탔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먹어줄 수 있었다. 태호가 옷을 갈아입고 오자, 식탁엔 이미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본가에서 요리사가 준비해준 다양한 반찬 가운데에 리아가 끓인 김치찌개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치찌개는 김치의 맛이 8할을 차지하니, 본가에서 가져온 김치를 사용했다면 그럭저럭 먹을 만할 것이다. 그가 식탁에 앉자, 리아는 그릇에 김치찌개를 덜어 태호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미처 인사하지 못했는데 어제는 고마웠어.”
“어제 일이라면 채연희에게 경고한 거?”
“응.”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그렇다면 보답의 의미로 저녁을 차린 건가? 태호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어떠한 보답보다 값지게 느껴졌으니까. 라면으로 시작해서 해장국, 이젠 김치찌개까지 끓여주는 정성이라니……. 상대가 주리아인 만큼 태호는 가슴 속 깊이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욱! 김치찌개를 한 입 맛본 태호는 급히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바로잡았다. 어떻게 요리하면 이런 묘한 맛이 나는 걸까? 겉으론 아무런 티 내지 않고 잠자코 목구멍으로 삼켰지만, 입안에선 제발 뱉으라고 비명을 질렀다. 느끼하면서도 한마디로 확 질리는 맛이었다. 단순한 김치찌개에서 이런 엄청난 맛을 낼 수 있다니……. 주리아, 정말 대단하다! 큭! 태호와 함께 김치찌개를 맛본 리아 역시 재빨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왜 이러지? 마지막으로 맛을 봤을 때만 해도 뭔가 2% 부족했지만, 이런 맛은 아니었는데? 리아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물을 따르는 척하며 가스스토브 옆에 놓인 조미료통을 확인해 보았다. 앗, 이럴 수가! 태호가 뭐라고 할까 봐 몰래 MSG를 넣다가, 그만 설탕과 헷갈렸나 보다. 1/4 숟갈만 넣는 MSG를 한 숟갈이나 넣어버렸으니……. 으, 감칠맛이 너무 돌다 못해 느끼하고 MSG 특유의 역한 향이 올라왔다. 하지만 태호는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김치찌개를 먹었다. 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어때? 먹을 만해?”
“응.”
이게 뭐냐고 짜증 낼 줄 알았는데 계속 먹는 걸 보니, 먹을 만한 걸 떠나서 맛있나 보다. 맨날 입맛 까다롭게 굴어서, 고급 입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MSG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는 거였네. 리아는 흐뭇한 얼굴로 태호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번엔 그의 음식엔 따로 MSG를 팍팍 쳐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남 비서는 연거푸 물병을 비우는 태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건 뭐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아니고, 어젠 환한 얼굴로 출근하더니, 오늘 태호는 잠 못 자서 퀭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괜찮아. 갈증이 좀 심해서. 가 봐.”
“네.”
목이 타는 게 아니라 속이 타는 거겠지? 남 비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태호는 남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새 물병의 마개를 땄다. 밤새도록 물을 마셨지만, 계속해서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무래도 어제 오묘한 맛의 주인공은 화약 조미료인 게 분명했다. 아, 평생 먹을 MSG를 어젯밤 한꺼번에 다 먹은 것 같다. “한번 상에 올린 음식은 또 안 먹는다고 했지?”라며 남은 김치찌개를 버리는 리아를 보며 태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의미로 끓여준 김치찌개인데, 하루 정도 고생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오후가 되어 어느 정도 몸이 정상으로 돌아갈 때쯤, 연락도 없이 강수미가 불쑥 찾아왔다. 태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앉으라는 소리도 안 했는데, 강수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저번 파티 때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쳐서요. 성후 씨도 들어오라고 해요. 괜히 우리 둘만 있다가 스캔들이라도 나면 곤란할 테니까.”
태호는 잠자코 남 비서를 호출했다. 얼마 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남 비서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예정에 없는 방문을 싫어했다. 이렇게 한 번 일정이 틀어지면 태호의 하루가 뒤죽박죽이 돼 버리니까. 원래대로라면 강수미는 유리 벽으로 된 개방형 회의실에서 만나야 했다. 그러나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이미 다른 팀이 그곳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남 비서가 소파에 앉자, 태호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조심하세요. 늙다리가 드디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늙다리는 한 사장을 가리킨다. 강수미는 그의 존재 자체를 입에 올리기도 싫다는 듯, 한 사장을 ‘라떼’나 ‘꼰대’ 또는 ‘늙다리’라고 불렀다.
“알아.”
“공격 상대가 주리아 팀장님이라는 것도요? 주 팀장님 주변을 돌며 예의 주시하는 이가 있대요. 그러다 특이한 사항이 생기면 바로 사진 찍어서 보고하고, 어떨 땐 기자에게도 흘려보내는 거죠.”
이미 한 번 당했다. 하지만 태호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강수미가 같은 편이라고 해도 혹여 실수라도 한 사장 귀에 흘러갈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강수미에게선 정보만 얻어내는 것이 안전하다.
“그 말은 즉, 주원식품에 한 사장이 누군가를 심어놨다는 거 아닙니까?”
남 비서의 추리에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 주변에 있는 인물일 거야. 어쩌면 그 인물이 한 사장에게 기업정보를 넘길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그 인물을 잡게 되면 동시에 한 사장의 꼬리도 잡게 되는 거군요.”
하지만 그건 말만 쉬울 뿐이지, 좀처럼 상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기 전까진……. 용건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수미가 한마디 꺼냈다.
“그나저나 주 팀장님, 가까이서 보니까 더 아름다우시더라고요. 막 질투 날 정도로.”
“직접 말해주지 그랬어. 좋아했을 텐데.”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그럴게요. 그땐 정말 잘 보여야 하니까요.”
강수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애매한 말을 남기고 집무실을 나섰다. 못마땅한 얼굴로 강수미 뒷모습을 노려보던 남 비서는 문이 닫히자, 빠르게 태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지켜만 봐. 아직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민수에게 연락해서 주원식품 직원들의 배경도 살펴보고.”
“네. 하지만 그것보단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물을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민훈 대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마케팅 2팀으로 옮긴다면 가장 큰 장애물은 제거하는 셈이니까. 결혼 직전, 민훈과 리아가 사귀는 사이였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역공 당할 수도 있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리아가 파렴치한 ‘어장 관리녀’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민훈이 두 사람의 연애를 도우려 연기해준 거라고 말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해줄까 의문이었다. 물론 돈으로 매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돕고 싶은 마음 없이 돈만 오간다면 언젠가 그 역시 시한폭탄이 될지도 모른다. 태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솔직히 리아와 민훈이 서로의 감정을 말끔히 정리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5년 후, 이혼이 성립되고 민훈에게 돌아갈 계획이라면?
“하아.”
순간 MSG를 과다 섭취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덮쳤다. 태호는 마지막 남은 물병의 마개를 거칠게 열었다. ***
“아, 참!”
위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층 불빛을 바라보던 강수미의 미간에 고운 주름이 잡혔다.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남 비서가 신경 쓰여 묻고 싶던 말을 깜빡하고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태호에게 저번 일요일, 여의도 오피스텔에 들른 적 있었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날 그녀는 후속작의 작가를 만나러 그곳에 들렸었다. 하지만 우연히 태호도 그날 그곳에 머물렀던 것 같다. 문제는 한 사장도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도로 태호 사무실에 돌아가려는데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순간 강수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돌아가기가 귀찮아졌다. 또한 경멸하듯 쳐다보는 남 비서의 눈빛 역시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사장이 작업에 들어갔다고 경고했으니까, 알아서 대처하겠지. 잠시 주춤거리던 강수미는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그날 리아와 태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늦게까지 야근하고 저녁을 먹은 후, 귀가했다. 둘은 별 대화 없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리아는 띠링, 울리는 문자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응.”
새벽 12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 리아는 손을 더듬어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민훈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리아야, 급한 일인데 지금 만날 수 있을까?]
그 밑으론 만날 장소가 링크로 첨부되어 있었다. 선배, 무슨 일이지? 잠이 확 달아난 리아는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