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난 네가 어젯밤 한 짓을 알고 있다!2021.06.30.
“이사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성큼 사무실로 들어서는 태호를 보며 남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는 어두운 모습으로 출근하더니, 오늘은 주위가 환해질 정도로 밝은 모습이니 호기심이 생길 만도 했다. 오랫동안 태호를 보좌했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좋은 일? 흠, 그럴지도 모르지.”
태호는 생긋 웃으며 남 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곤 어리둥절한 남 비서를 뒤로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입가에 어린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솔직히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왜냐고?
“훗.”
태호는 어젯밤을 떠올리며 입가에 더욱더 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잠결인 척하면서 살며시 자신을 끌어안던 리아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먼저 다가온 것도 놀라운데, 품에 안기기까지 하다니……. 그때 태호는 잠든 것처럼 가만히 있었지만, 리아의 조그만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는 절대로 잠버릇에 멋모르고 그를 끌어안은 게 아니었다. 힐끗힐끗 쳐다보며 잠들었는지 확인한 후에 한 행동이니까, 잠결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리아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태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미비하긴 하지만, 드디어 리아가 경계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날 밤 키스도 꿈이 아닌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아가 그를 껴안은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몇 번 꼼지락거리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저만치 멀어졌다. 마음 같아선 손을 뻗어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그랬다 자신이 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시는 먼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듯이 천천히 나아가면 되겠지.
“후후.”
어쩌면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태호는 얼굴 가득 느긋한 미소를 떠올리며 결재 서류 파일을 열었다. ***
“팀장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회의를 끝내고 팀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자, 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 도중 리아의 표정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회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업무보단 개인적인 이유로 안색이 나쁜 건 아닐까? 그래서 이번에도 막내인 채영이 총대를 메고 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아는 채영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침에 마주한 남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라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오늘 아침 태호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하며, 눈빛 하며……. 너, 나한테 들켰어,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난 네가 어젯밤 한 짓을 알고 있다! 하는 것 같은 표정이랄까? 하여간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밤중에 몰래 껴안은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따뜻한 품을 만끽하던 리아는 잠시 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껴안은 건 껴안은 거다. 아, 미치겠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어쩌다 이성을 잃고 본능에 빠져버렸는지 리아는 자기 자신이 실망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 쏟아진 물을 주워 담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겠지. 리아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 좋은 일은 무슨. 그냥 어젯밤 늦게까지 파티에 참석하느라 좀 피곤해서.”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어젯밤 파티가 늦게 끝나긴 했다. 그래서 피곤하기도 했고.
“파티 어땠어요?”
“뭐, 나쁘진 않았어.”
그렇다고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리아는 말을 아꼈다. 채영은 그걸로 답이 되었는지 더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간 리아는 잡념을 떨치고 업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연락도 없이 태희가 불쑥 회사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새언니.”
어제 말도 없이 파티장에서 사라진 주제에 태희는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하듯 와락 리아를 끌어안았다. 팀원들 앞에서 친한 척 연기를 하려는 건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건가? 리아는 자신을 향해 눈꼬리를 휘는 태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요. 새언니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왔죠. 근처에 맛집 많다면서요?”
태희는 리아의 팔에 매달리며 부산스럽게 조잘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척이나 싹싹한 시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어제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아를 통해 알아내려고 애교를 부르는 중이었다. 태호가 연희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서현과 함께 걸음아 나 살려라, 파티장을 빠져나왔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재수 없기로 소문난 채연희에게 작은오빠가 도대체 어떤 빅엿을 선사했을까? 하지만 대놓고 묻긴 뭐하고, 슬그머니 접근해야 한다.
“새언니, 어제 화제의 중심에 섰던 거 모르죠?”
회사 근처에 있는 에그 샌드위치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기고, 태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요?”
리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채연희, 그 여자. 언젠가 한 방 먹이려고 벼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새언니가 따악 터트린 거죠.”
한 방 먹이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전혀 아니던데? 파티장에 있던 다른 이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며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타인의 불행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랄까. 리아가 의심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태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다다 말을 쏟아내었다.
“그뿐 아니라, 작은오빠까지 합세하니까 다들 놀란 거죠. 완전 대박!”
솔직히 태희는 그가 채연희에게 다가가는 모습만 보았지,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태호 성격에 아는 척 인사하러 갔을 리는 없고,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게 분명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는지, 리아는 놀란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웬만해선 채연희 심기는 안 건드려요.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디코인 그룹이 뒤에 있잖아요. 그러니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죠.”
디코인 그룹은 대한민국 기업의 자금줄이라고 불리는 금융재벌이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재계에서 입김이 세다고? 그런데도 태호는 어제 리아를 위해 채연희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오빠가 정확히 채연희에게 뭐라고 그랬어요?”
“기업 기밀을 쉽게 흘린다면 앞으로는 디코인과 거래 못 하겠다고 했어요.”
“네에? 정말이요?”
태희의 두 눈이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와, 작은오빠! 아무리 성질 더러운 강태호라지만, 그렇게까지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태희는 이렇게까지 리아를 두둔하는 태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소정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태문조차도 디코인 그룹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채연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태호는 리아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 태희는 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이리저리 궁리해보았지만, 그녀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에그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원래부터 태호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결혼하고 나서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사실 불어터진 라면을 군말 없이 먹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식품회사 딸내미가 라면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하냐고 짜증내도 시원찮을 판에 왜 그걸 먹는 거냐고! 도대체 왜? 혹시? 유심히 리아를 바라보던 태희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어쩌면 새언니는 전생에 호랑이 조련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작은오빠는 완전 제대로 된 짝을 만난 게 분명하다. 태희는 묵묵히 에그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는 리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금 찬찬히 보니, 리아가 태호의 이상형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강태호의 이상형이 어떻게 생겼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태희는 리아 같은 타입이 태호의 이상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 퇴근이 가까워질 때쯤, 리아는 민수의 연구소 사무실로 찾아갔다. 바쁘게 작업 중이던 민수는 놀란 얼굴로 리아를 맞이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왜? 넌 내 사무실에 찾아오는 거 괜찮고 난 네 사무실에 오면 안 돼?”
“그게 아니라, 너 여간해선 여기 안 오니까 그런 거지.”
리아가 앉을 수 있게 소파 위에 쌓아놓은 파일을 치우며 민수가 말했다. 리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무실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접대용 소파 위에는 파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곤 했다.
“물어본다고 하고선 계속 까먹었는데, 저번에 왜 태호 사무실에 찾아갔던 거야?”
순간 민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날 이후, 물어보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지나간 줄 알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면 어쩌라고.
“그게…….”
민수는 커피 머신 앞으로 걸어가며 시간을 끌었다. 뭔가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야 하는데……. 최대한 천천히 커피를 내린 민수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호에게 한마디 하러 갔었어.”
“한마디?”
“응.”
민수는 리아 앞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어.”
“네가? 태호에게?”
리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네 오빠라고.”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토끼 같은 민수가 호랑이 같은 태호에게 경고하러 갔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민수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해서 리아는 뭐라고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몸은 약하지만 멘탈은 그 누구보다 강한 민수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리아가 아무 말 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가자, 민수가 넌지시 물었다.
“결혼 생활은 어때?”
“결혼 생활이랄 게 뭐 있나.”
“그래도 좋다, 나쁘다는 있을 거 아냐.”
“뭐, 그럭저럭.”
리아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태호와의 결혼은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좋은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서 불안했다. 이러다 태호와 함께 있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건 아닌지. 5년 후, 그가 없는 옆자리를 보며 우울해지는 건 아닌지. 강태호란 존재가 하루하루 새록새록 커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한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민수의 사무실을 나서게 되었다. 퇴근길, 리아는 신혼집으로 차를 몰며, ‘태호는 벌써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태호를 보면 반가운 것도 아니면서 집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그래도 같이 사는 동거인인데, ‘나 왔어.’라고 먼저 말을 걸어볼까? 아니면 ‘오늘 어땠어?’라고 물어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저 단순한 인사일 뿐이니까. 이런저런 인사말을 떠올리다 집에까지 도착했지만, 막상 리아를 기다리는 건 텅 빈 실내였다. 만약에 평범한 신혼부부였다면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늦어?’라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저녁은 먹었어?’라고도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범한 신혼부부가 아니니 상대가 야근하든 말든, 저녁을 먹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태호가 돌아오기 전, 저녁 식사를 마칠 생각으로 리아는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지도 못하고 도로 침실로 돌아갔다. 이상하게도 전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태희의 수다를 들어주느라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말이다. 시댁에 있을 때는 마음은 불편해도 식욕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었다. 오히려 너무 배고파서 한밤중에 몰래 주방으로 내려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 입맛도 없는 걸까? 리아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벽에 걸린 시계로 눈길을 돌렸다. 시곗바늘은 저녁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었기에 태호는 선뜻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아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태호는 퇴근 시간을 두 시간 조금 넘기고, 일거리를 챙겨 들고 집으로 향했다. 서재에 틀어박혀 일한다고 해도 리아가 있는 집에서 하고 싶었다. 고작 며칠 살았다고, 신혼집에 들어서자,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이 그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던 태호는 문득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리아……야?”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