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잠시 동물의 본능에 충실해지자!2021.06.27.
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끌어안은 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리아야, 잠깐만 여기 있어 봐.”
그리고 연희 일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만 해도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반대로 태호가 다가오자, 어쩔 줄 모르고 부들부들 떨던 연희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연희는 그가 하룻강아지처럼 멋모르고 까부는 아내를 대신해서 사과하러 오는 거라고 넘겨짚었다. 역시 KJ그룹의 차기 후계자는 다르네. 흐뭇한 마음에 연희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면 그렇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금융재벌 디코인에게 밉보이면 안 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KJ그룹의 강태호라면 모르고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업에 관해선 아주 이성적이면서도 매우 냉철하고 또…….
“채연희 씨.”
자신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연희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얼음처럼 싸늘한 눈빛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지만, 연희는 태호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까워, 정말 아까워. 내 남자가 될 뻔했는데……. 연희는 아쉬움을 담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아찔하게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주리아는 고작 주원식품 딸내미 주제에 KJ 강태호를 그녀에게서 가로챘다. 그러다 보니 저런 남자를 차지한 리아가 더더욱 괘씸하고 재수 없게 느껴졌다.
“주원식품이 부도 날 뻔했었다는 말, 채 은행장님께 직접 들은 겁니까?”
“네?”
예상외의 말이 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연희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난데없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저의가 무엇인지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직접 들었든, 아니든 그게 그리 중요한가? 사실 연희는 아버지 채 은행장이 서재에서 전화하는 걸 슬쩍 엿들었을 뿐이지 직접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태호에게 일일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하죠?”
연희가 대답을 회피하려 하자, 태호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그는 연희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누군가의 혀끝이 리아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더더욱.
“방금 채연희 씨 입에서 나온 말, 기업 기밀인 거 모릅니까? 채 은행장님이 그런 이야기를 따님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할 줄 몰랐군요.”
정확하게는 시시콜콜 이야기한 게 아니라, 엿들은 거지만 연희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체면상 쥐새끼처럼 엿들었다는 사실을 말한 순 없으니까. 연희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태호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기업 기밀이 쉽게 흘러나간다면, 디코인 은행과의 거래는 다시 한번 고려해 봐야겠군요.”
순간 연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금융재벌 디코인이었지만,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아닌 자신 때문에 KJ그룹과의 사이가 틀어지는 거라면 곤란했다. 채 은행장에겐 5명의 자녀가 있었고, 연희는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한 푼이라도 더 유산 상속받으려 형제들과 경쟁 중인데 괜히 이런 일로 책잡힐 순 없었다. 엿들은 것을 털어놓으면 망신은 당하겠지만, 아버지의 눈 밖으로 밀려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연희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강 이사님.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아빠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서재를 지나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걸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것도 문제군요. 어찌 되었든 은행장님이 비밀유지에 허점을 보인 건 사실이니까. 서재를 지나다 들을 정도라면 이미 예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겠군요.”
그 한마디에 연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결단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뭐라고 해도 태호는 믿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저, 이사님…….”
아까 리아에게 당해 부들부들 떨던 모습과는 상대가 되지 않게 연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약 옆에서 누가 툭 건드린다면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질 것 같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리고, 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오늘은 이쯤 해서 그만하죠. 하지만…….”
태호가 한발 물러서자, 연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어두워졌다.
“우리 아내에게 사과는 해야죠.”
“네?”
“방금 자신이 한 말, 사과해야 한다는 거 모르는 건 아니겠죠? 채연희 씨.”
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아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호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를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모르지 않으니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희는 리아에게 다가가 형식적으로나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깐 내 말이 좀 지나쳤네요. 그냥 흘려들어요.”
그러곤 리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뛰어나가듯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연희의 뒤를 그녀 일행이 빠르게 뒤따랐다. 리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연희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집 딸이라면 사과하는 법도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과 같지 않은 사과이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저 여자 딴에는 노력한 거야.”
태호의 말에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실소를 흘렸다.
“하,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저게 사과라고? 그리고 나보단 형님에게 사과해야지.”
웬만한 준재벌인 리아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지금까지 소정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 것 같아서, 리아는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아직 소정을 잘 모르지만, 저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건 차차 하고.”
“너, 형님이 저렇게 당하는 줄 알고 있었어?”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야.”
“그래.”
몰랐다니 다행이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다. 아무리 형과 치열한 후계자 경쟁을 벌이고 있다지만, 가족은 가족이니까. 내가 가족을 때릴 순 있어도 남이 가족을 때리는 걸 지켜만 보아선 안 된다. 그게 가족이다.
“그런데 태희는?”
태호의 말에 리아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새 도망갔는지 태희와 서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눈치 빠른 녀석,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재빨리 자리를 피했나 보군. 태희를 찾으러 파티장을 둘러보려는데 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끌어안듯 태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연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집에서도 이렇게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저나 숙취는 좀 어때?”
“많이 나아졌어.”
“역시 내가 끓여준 해장국이 효과가 있었네.”
그건 사실이다. 비리고 떫은, 아주 오묘한 맛이 모든 통증을 날려버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리아에게 물어야 할 말이 있었다. 어젯밤 일이 꿈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아직 목에 남은 흔적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우선은 밀어붙이기로 했다. 태호는 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그녀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어젯밤, 나에게 키스했지.”
순간 리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이런, 방심하고 있는데 훅 치고 들어왔다. 물어보고 싶은 거라면서도 ‘키스했지?’라며 말꼬리가 올라가는 게 아닌, ‘키스했지.’ 하고 말꼬리가 내려가는 말투. 완전 사실을 확정한다는 느낌이었다. 찰나 가슴이 덜컹했지만, 리아는 짐짓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에게 키스해?”
사실은 ‘다짜고짜 남 끌어안고 안 놓아준 게 누군데? 그러니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왜 건드리고 난리야!’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세게 나가면 상대도 세게 나올 테니까, 수위를 낮추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운 게 벌써 몇 년째인가! 어떻게 해야 유리하게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지, 이제 슬슬 그녀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강태호는 강하게 나가는 것보다 약하게 나가는 거에 약했다. 아예 모르는 척 순진하게 나가는 것도 효과가 좋은 편이었다. 태희가 하는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가끔은 그녀는 정말 뭘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은근슬쩍 위기를 피하려 그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아는 태희처럼 무슨 질문인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 어제 술 많이 취했었어. 기억은 나니?”
그러자 태호가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 목에 남은 흔적은 뭐지?"
흔적? 그런 거 없었는데? 헐, 나중에 생겼나!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곰곰이 어젯밤 일을 되짚었다. 셔츠를 벗기던 중 조각처럼 완벽한 몸매에 저도 모르게 감탄한 건 맞다. 그래서 금화나 진주를 깨물듯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을 잠시 만끽해 보았다. 하지만 맹세코 흔적이 남을 정도로 세게 물진 않았다. 그리고 또 취한 상태이긴 했지만, 제발 그만두지 말라고 애원한 쪽은 태호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하지만 막 되받아치다 흥분이라도 하게 되면 어젯밤 일을 들킬지도 모른다. 이럴 땐 뭐니 뭐니 해도 오리발 내미는 게 최고다. 리아는 톡 쏘아붙이는 대신 도통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상처라도 생겼어? 어제 네가 하도 끌어안아서 그거 뿌리치느라 내가 좀 거칠게 대하긴 했어. 그때 생겼나?”
뿌리치느라 거칠게 대하다 그랬다고? 태호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리아의 말을 백 프로 믿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솔직히 자신도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태호는 오늘은 이쯤 해서 그만하는 게 나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계속해서 리아를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연기겠지만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니까. ‘오빠, 오빠’라고 부르며 애간장을 녹이는 애교는 덤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중요하지 않은 질문으로 흐뭇한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말자.
“그만 들어가자.”
태호는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리아를 이끌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그녀가 키스했든, 그저 허망한 꿈이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녀가 자신 곁에 있다는 것이니까. 넌 지금 누가 뭐래도 내 아내, 주리아로서 이곳에 와 있는 거니까. 태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아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 파티에서 돌아오고 그날 밤, 리아는 드디어 태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녀 혼자 침대에서 대자로 팔다리를 벌리고 자던 것처럼 자유로웠다. 그래, 자고로 이래야 잠들 맛이 나는 거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연신 눈을 깜빡이던 리아는 침대맡에 놓인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왜 잠이 안 오지? 저녁도 아주 넉넉하게 먹었고, 침대도 매우 마음에 쏙 들게 널찍한데…….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속삭였다.
“……추워.”
언제나 느껴지던 태호의 체온이 없으니,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옆을 슬쩍 훔쳐보니, 태호는 이미 잠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덜 추우려나? 리아는 슬금슬금 티 나지 않게 태호 쪽으로 다가갔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니 어느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러다 혼자 자는 것보다 함께 자는 거에 익숙해지면 어쩌지? 은근히 불안하긴 했지만, 리아는 잠결에 그러는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자다가 따뜻한 곳으로 몸을 움직이는 건 동물의 본능일 뿐이다. 잠시 동물의 본능에 충실해지자! 하지만 한 번 발동한 본능은 어깨가 맞닿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태호의 넓은 가슴에 파고든 후였다. 헐!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멋대로인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차마 리아는 그를 껴안은 팔을 풀 수 없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뜻해서……. 단단한 가슴이 완벽하게 포근해서…….
“하아.”
미치도록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