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런 게 ‘빙썅’이라는 거구나.2021.06.23.
지금 누가 누구보고 날파리라는 거야? 거슬리는 표현에 발끈한 리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대화하는 무리는 아까 강수미가 가리켰던 채연희 일행이었다.
“그래, 날파리가 얼마나 꼬였으면 그렇게 서둘러서 결혼을 시켰겠니.”
리아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아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걸 보니 일부러 들으라는 것 같다.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보통은 파우더 룸 같은 곳에서 당사자 몰래 수군거리는데, 아예 대놓고 이러네.
“이번에 급하게 결혼한 것도 강수미 스캔들 덮으려고 그런 거잖아. 로미오와 줄리엣, 세기의 사랑? 그거 다 헛소리야.”
어이없는 내용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어떡하지? 정말 로미오와 줄리엣같이 사랑했는데……. 그 점에 관해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부모님 눈을 피해서 얼마나 힘들게 사랑했는지, 책으로 써낼 수도 있다고. 채연희 일행의 뒷담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러면 맘에도 없는 여자 데려다가 허수아비 시키는 거네.”
“다루기 쉬운 여자라서 그런 거겠지?”
“그게 KJ 스타일인가 봐. 그 집 첫째는 완전 흙수저 집에서 데려왔잖아.”
“진짜 수준 안 맞아.”
흙수저? 수준이 안 맞아? 결국 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향해 뒤돌아섰다. 그녀의 흉만 보는 거라면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려고 했다. 모자란 사람들끼리 뒷담화 까는 거 일일이 상대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소정까지 걸고넘어지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소정에 관해 잘 아는 건 아니다. 솔직히 소정이 같은 편인지, 적인지도 아직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소정은 엄연한 가족이었다. 5년간의 시한부 가족이긴 하지만……. 채연희와 일행은 리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모두 들었냐는 듯 생긋 웃어 보였다. 와, 이런 게 ‘빙썅’이라는 거구나. ‘웃는 낯에 침 뱉으랴.’라는 속담도 있지만, 그건 그 당시에 ‘빙썅’이 없었기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저런 ‘빙그레’ 미소라면 침이 아니라 주먹을 날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리아는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
“아 참, 여보.”
저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정 여사가 뭔가 생각난 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새아가, 지금 큰애 대신 잘하고 있겠죠?”
“당연히 잘하고 있겠지. 그래서 일부러 새아가 보낸 거 아니요?”
강 회장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정 여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긴 하지만…….”
소정이 모임에서 텃세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정 여사가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기부 모임이나 자선 행사에는 정 여사가 함께하니, 티를 내지 못하다가, 소정 혼자 참석하는 파티에서 몇몇이 심술궂게 나온 모양이다. 괘씸하긴 했지만, 손아랫사람 일에 자신이 끼어들 순 없어, 정 여사 혼자 분을 삼키던 중이었다. 그러던 참에 리아를 둘째 며느리로 맞이했다. 당찬 리아라면 소정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자신에게나 강 회장에게나 거침없이 의사 표현하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긴 하다. 아예 이참에 앞으론 첫째 대신 둘째를 내보낼까? 기 센 며느리를 얻으니까 이런 건 좋네. 혼자 골똘히 생각하던 정 여사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
“이봐요.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리아가 한마디 하자, 연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심해요? 뭐가요?”
“그쪽이 우리 형님에 관해서 뭘 그리 잘 안다고 그렇게 떠드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없는 집 보고, 흙수저 집이라고 한 게 뭐가 잘못이에요?”
연희는 진심으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오히려 더욱더 기세등등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돈 없어서 쩔쩔매는 거 맞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쪽도 그러네. 주원식품도 얼마 전에 부도날 뻔했었죠? 아빠가 그러던데……. 제발 도와달라고 매달렸다고.”
리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주 회장은 급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디코인 은행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이상한 건가? 기업인이 은행에 돈 빌리러 가는 게 뭐가 어때서? 하도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건데, 연희는 리아가 꼬리를 내렸다고 오해했는지 같잖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후, 비슷한 급끼리 서로 돕는 거예요? 없는 집 자식끼리?”
은행장 딸이라더니, 집에 앉아서 돈만 세나? 사람을 판단할 때 ‘돈 있고 없고’로 따지는 거야? 태호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다면 이런 상황에서 상처 좀 받았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리아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요. 그쪽은 있는 집 자식이라서 참 좋겠어요.”
“물론이죠.”
뭐라니? 이렇게까지 유치한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유치원 다닐 때도 이런 대화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한다. 리아는 채연희 일행을 둘러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구나. 덕분에 하나 배웠어요.”
저쪽에서 ‘빙썅’으로 나온다고 자신도 ‘빙쌍’으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던 대사가 모두 허구만은 아니었네요. 세상엔 정말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군요.”
“뭐요?”
“머리가 똑똑하길 하나, 인성이 바르길 하나, 있는 거라곤 돈밖에 없고. 정말 수준 떨어지네.”
먼저 ‘빙썅’의 가면을 벗은 연희였다. 그녀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로 앙칼지게 외쳤다.
“야! 너 말 다 했어?”
“그럴 리가요. 해줄 말이 너무 많아서 탈이죠.”
이성을 잃고 폭발한 연희와는 달리 리아는 웃는 얼굴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는 말을 그쪽이 이해 못 할 거라는 거죠. 많이 어려울 테니까…….”
“뭐, 뭐야?”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연희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은 소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판세가 뒤집혔다. 연희는 부르르 떨며 죽일 듯이 리아를 노려보았다.
“꼭 가진 것 없는 것들이…….”
하지만 연희의 말을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오빠!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선가 숨넘어가는 것처럼 캑캑거리는 태희가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태호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태희의 팔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 교통체증 탓에 태호는 예정보다 더 늦게 파티장에 도착했다. 급한 마음에 거의 뛰듯이 안으로 들어서자, 홀로 있는 리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옆에서 잘 챙기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태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태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빠르게 리아에게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무것도 없는 리아의 목과 훤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길고 아름다운 목선이었다. 살짝 보이는 가슴골까지 더하면 황홀한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어야 했다. 다른 남자의 시선이 쏠리는 게 싫어서 화려한 목걸이로 시선을 분산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태희에게 부탁했건만……. 있어야 할 목걸이는 보이지 않고 묵직한 다이아몬드 팔찌만이 눈에 들어왔다. 태희, 이 녀석!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파티장에서 리아 혼자 있다는 사실이다. 태호는 더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태호보다 먼저, 리아가 휙 방향을 바꿔 어떤 일행에게 다가갔다. 태호는 일행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저 여자는? 금융재벌 디코인 그룹, 채 회장의 외동딸 채연희였다. 한동안 채 회장 집에서 끈질기게 정략결혼을 제안했던 기억이 난다. 강 회장은 은근슬쩍 태호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아와 연희 두 사람 모두 매우 심각해 보였다. 그때 태호의 눈에 키득거리는 태희와 서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리아는 잠시 대화하게 놔두고 태희부터 처리해야겠다.
“강태희,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히익.”
태호를 본 태희와 서현은 도망가려는 듯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태호의 손에 붙잡혔다.
“오라버니.”
“사극 버전은 됐고.”
태희의 팔을 움켜쥔 채, 태호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분명히 리아 목걸이 골라주라고 했는데, 왜 팔찌만 하고 있지?”
“아, 그게, 오빠. 새언니 목선이 너무 예술이라서. 목걸이 따위가 가리는 건 범죄거든.”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목걸이로 가리려던 거다.
“누가 너보고 그런 걸 결정하라고 그랬지?”
그때 갑자기 커진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돈 없어서 쩔쩔매는 거 맞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쪽도 그러네. 주원식품도 얼마 전에 부도날 뻔했었죠? 아빠가 그러던데……. 제발 도와달라고 매달렸다고.”
분명 귀로 듣고도 태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태호는 태희의 팔을 잡은 채, 리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 오빠. 우선 팔 좀 놓고.”
태희는 태호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고, 서현은 친구를 두고 도망을 가야 하나, 옆에 남아 의리를 지켜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야! 너 말 다 했어?”
그때 갑자기 연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태희의 팔을 움켜쥔 태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태희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캑캑거렸다.
“오빠!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 소리에 격렬했던 대화가 끊어지고 모두의 시선이 태희와 태호에게로 쏠렸다. 태호를 발견한 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머, 오빠! 지금 온 거야?”
리아는 빠르게 태호에게 다가와, 살살 녹는 눈웃음을 치며 태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턱을 댄 채로 태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공식적인 장소라서 연기 중이라는 건 알겠는데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뜨겁게 사랑하던 시절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주리아가 이리도 애교를 잘 부릴 줄이야. 그녀의 웃음에 심장이 쿵, 저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것만 같았다.
“미안, 좀 늦었어.”
“괜찮아, 오빠. 파티 아주 재밌거든.”
리아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연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어쩔 줄 모르고 부들부들 떠는 연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수미가 해준 말이 사실이라면, 연희는 지금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엄청나게 배가 아플 것이다. 그렇게나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코앞에서 끌어안고 있으니 얼마나 배알이 꼴릴까! 게다가 평소엔 잘 웃지도 않는 강태호가 리아를 보며 환하게 웃기까지 한다. 원래 리아의 성격이라면 상대 앞에서 다정한 티를 안 내려 배려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배려라는 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하는 거다. 인성 쓰레기에까지 베풀 배려는 없었다. 리아는 일부러 더 보란 듯이 태호에게 몸을 기댔다.
“재밌었던 거 맞아? 내가 듣기론 아닌 것 같은데.”
“……들었어?”
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끌어안은 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리아야, 잠깐만 여기 있어 봐.”
그리고 연희 일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만 해도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