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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누가 날파리라는 거야? (32/81)

32. 누가 날파리라는 거야?2021.06.20.

“이사님 어디 가셨어요?”

태호의 모습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강수미가 물었다. 리아는 대답해주는 대신,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갔다. 마음 같아선 “그쪽이 왜 내 남편을 찾아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뻔히 아는데 쓸데없는 질문일 것이다. 보고 싶으니까 물었겠지. 강수미를 정리하라고 태호에게 준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아직 기한이 남았으니, 불편해도 참아야겠지.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관계를 정리할 거라 믿는다. 사실 강수미 처지에서 보면 졸지에 연인을 잃어버리는 거다. 같은 여자로서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걸까? 지금은 그녀의 코가 석 자였다. 리아는 한 모금 샴페인을 마신 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이사님은 급한 회의가 생겨서 좀 늦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강수미는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저리 나오면 보통은 얄밉다거나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단……. 하아, 뭐지? 그새 미모에 홀렸는지, 리아는 강수미 얼굴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얘, 왜 이렇게 예뻐? 물론 강수미의 실물을 오늘 처음 본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 막상 코앞에서 강수미를 보니, 여자인 리아도 한순간에 반할 것 같았다.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미모였다. 여신 미모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사용하는 거다. 리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강수미는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마치 자기가 예쁜 줄 알고 교태를 부리는 한 마리의 고양이 같달까? 강수미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리아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주위에서 도는 소리, 너무 믿지 말아요. 사람들은 하고 싶은 소리만 골라서 하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강수미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뒤에 핑크빛 드레스 입은 여자, 특히 조심해요. 금융재벌 디코인 은행장 딸, 채연희예요. 이사님과 결혼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는데 잘 안 됐거든요.”

리아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하자, 강수미는 재빨리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티 내지 말고 천천히 고개 돌려요. 지금 무리 지어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으니까.”

무리를 지어서 노려본다고? 리아는 샴페인을 마시는 척 고개를 돌리며 힐끗 시선을 옮겼다. 정말 강수미가 말한 대로 서너 명 여자들이 무리를 진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중에서 단연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눈에 확 띄었다. 외모가 뛰어나거나 분위기가 화려해서는 아니다. 불타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향한 적대감일까? 강태호와 결혼한 주리아? 아니면 강태호의 진짜 연인인 강수미? 아니면 둘 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얼굴에 티 내도 되나?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겉으로는 아닌 척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신경 쓰진 말아요. 누가 뭐래도 게임의 승자는 언니니까.”

“네?”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수미는 아예 매달리듯 리아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어머, 언니라고 불러서 기분 나쁜 건 아니죠? 저보다 나이 훨씬 많으시잖아요.”

“아뇨, 기분 나쁜 게 아니라…….”

말을 그렇게 했지만, 나이 많다는 걸 강조하니, 살짝 기분이 그렇긴 하다. 강수미보다 고작 3살이 많을 뿐인데……. 이게 바로 태희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빙썅’인가?

“이제 앞으로 자주 볼 텐데, 편하게 언니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괜찮죠?”

“네. ……뭐.”

리아는 살갑게 다가오는 강수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태호와의 관계를 곧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러나? 혹여 형님, 아우 하면서 잘 지내보자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탁 터놓고 물어볼까?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침 누군가가 강수미를 불렀기 때문이다. 강수미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이따 이사님 오시면 그때 다시 올게요.”

그리고 그녀는 리아가 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리아는 웨이터가 내미는 은쟁반에서 세 번째 샴페인 잔을 집었다. 강수미가 반가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옆에 있어 줘서 덜 적적했던 건 사실이다. 그녀마저 가버리자, 외딴 섬에 남겨진 것처럼 다시 홀로가 되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리아는 클러치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럴 수가! 파티장에 들어선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니……. 리아는 실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태호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전화라도 해볼까? 하지만 결국엔 도로 휴대폰을 클러치 백에 집어넣었다. 급한 회의 때문에 늦는다는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아프리카 정글 한가운데 떨어진 것도 아니고, 먹을 것 가득한 파티장에서 뭐가 아쉬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파티에 왔으니 맘껏 즐기면 된다. 혼자 멀뚱멀뚱 서 있는 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초콜릿 주면 안 잡아먹지~♬”

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알록달록 다양한 음식으로 가득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것저것 맛보다 보면, 강태호나 강태희나, 망할 놈의 오누이 중에서 한 명은 나타나겠지. 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살이 통통한 코코넛 새우튀김을 집어 들었다. 먹고 욕한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

“와, 너희 새언니 대박!”

멀리서 리아를 지켜보던 서현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태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뭐랬어. 새언니 장난 아니라고 했지. 작은오빠랑 싸우면서도 눈빛 한번 흔들리지 않더라.”

원래 태희는 친구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서현과 함께 리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새언니가 낯선 곳에선 어떻게 행동할까? 조금은 어색해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혼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자신이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겠지? 등등. 그런데 리아는 태희가 돌아오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로 파티장을 돌아다녔다.

“너, 지금 가면 반가워하는 것보단 왜 지금 왔냐며 혼내는 거 아니니?”

서현의 말에 태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야, 그러지 마. 농담이라도 무서워.”

누가 호랑이 신부 아니랄까 봐. 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웬만큼 기가 센 사람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파티장에 혼자 남겨지면 조금은 어깨가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웬걸! 리아는 오히려 혼자라서 홀가분하다는 듯 표정이었다.

“태호 오빠는 언제 와?”

“올 때가 되긴 했는데……. 한 30분쯤 늦는다고 했거든.”

“그럼 빨리 가자. 너희 새언니 혼자 뒀다고 한 소리 듣기 전에.”

“그래야겠지?”

하지만 두 사람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익숙한 얼굴의 무리가 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태희와 서현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거 완전 팝콘 각이겠는걸! 태희와 서현은 리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

“이사님.”

조수석에 앉은 남 비서가 걱정스러운 듯 돌아보자, 창밖을 바라보던 태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태호는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오전에는 숙취 때문에 그렇다고 치고, 오후가 되며 나아졌을 텐데도 어두운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거 같습니다만.”

그 말에 태호는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래.”

……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문제가 있긴 하다. 그러나 태호는 말을 아낀 채,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 비서에겐 털어놓을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였으므로.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위로 어젯밤 꿈의 영상이 흐릿하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끊겼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혹시 현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느낌이 생생했다. 태호는 필름이 끊기기 전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현관문에 기대고 섰던 것까진 확실히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턴 부분부분 끊어진 채로 떠올랐다. 먼저 끌어안은 쪽은 자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술 취한 탓에 리아를 보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에 기억나는 건 모두 꿈이었다고 생각했다. 리아가 먼저 그에게 뜨겁게 키스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럴 리가 없잖은가. 도대체 리아가 왜?

“……아.”

그러다 문득 어젯밤 기억의 단편 하나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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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아는 입술에만 키스한 게 아니라, 목덜미에도 흔적을 남겼던 것 같다. 흔적을 확인하려 급히 넥타이를 풀던 태호는 차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행동을 멈췄다. 지금 여기서 옷을 벗고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 아침엔 비몽사몽으로 샤워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태호는 좌석에 몸을 기대며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만에 하나, 꿈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왜? 그동안 풀지 못하고 쌓인 욕구가 폭발이라도 했나? 솔직히 남자만 욕망이 있으리란 법은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앞으로 5년 동안 금욕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리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후우.”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태호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 괜한 상상에 헛물을 켜고 싶진 않으니까. 그나저나 태희는 옆에서 제대로 리아를 도와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급한 일이 생기지만 않았어도 리아를 혼자 파티에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LS그룹 창립 파티에 참석하는 이 중에 텃세를 부리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마음 약한 소정은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눈물을 터뜨리곤 했었다. 태문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은 태문도 눈치채고 말았다. 오늘 아침, 태문이 홍콩으로 출장을 떠난 이유도 그래서이다. 정 여사가 소정 혼자 파티에 참석하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리아는 소정과 다르다, 그리고 태희에게 항상 리아 옆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해 놓기도 했다. 그래도 리아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파티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교통체증은 왜 이리도 심한지 모르겠다. 태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코코넛 새우튀김을 크게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번졌다. 바삭바삭한 튀김옷의 씹히는 맛이 그만이었다. 리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머지 새우튀김을 마저 입에 넣었다. 그때 뒤에서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잘생긴 남자는 얼굴값 해서 안 된다니까.”

“맞아. KJ 강태호 보면 몰라?”

KJ 강태호? 난데없이 태호의 이름이 거론되자, 리아는 숨을 죽이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한 인물 하느라 날파리가 끊임없이 달라붙잖아.”

“그렇긴 하네. 강태호 주변엔 날파리가 너무 꼬여.”

날파리? 듣기 거북한 저속한 표현에 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날파리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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