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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내가 못 할 것 같아? (31/81)

31. 내가 못 할 것 같아?2021.06.16.

“……어젯밤에 네가.”

리아는 그다음 말을 기다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그녀가 먼저 키스한 걸 따진다면 다다다 한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덤빌 테면 덤벼라, 하는 심정이었다. 네가 먼저 끌어안았잖아. 그러니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은 건드려! 너만 못 참으란 법 있어? 나도 똑같아. 다만 내가 너보다 이성이 뛰어날 뿐이지! 할 말은 차고 넘쳤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호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숙취가 있긴 하지만 늦게 출근할 정도는 아니야.”

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야? 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기억 못 하는 게 분명했다. 필름 끊어진 거 맞지? 그렇다면 구태여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한숨 돌리자, 이제는 태호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셨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속 많이 쓰려?”

“……응, 조금.”

역시나 엄청 속이 쓰린 모양이다. 리아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침실을 나왔다. 원래는 따로따로 식사하고 출근해야겠지만, 저번에 그가 그녀를 위해 해장국을 준비해준 적도 있고, 어젯밤 그의 입술을 훔친 죄도 있으니 오늘은 그녀가 그를 위해 해장국을 준비하기로 했다. 해장국이 별건가? 어차피 즉석식품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건데 뭐 그리 힘들겠어? 경쟁사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원식품 제품을 사러 일부러 마트에 갈 생각은 없었다. 리아는 찬장에 차곡차곡 쌓인 KJ푸드 즉석식품을 쭉 훑어보았다. 어떤 제품으로 끓인 거지? 즉석 콩나물국도 있고, 사골 해장국도 있었지만, 저번에 그가 끓여준 사골 콩나물 해장국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두 제품을 섞어서 끓였나? 혼자 고민하던 리아는 두 제품을 들고 도로 침실로 들어갔다. 태호는 샤워하러 막 욕실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네가 끓여준 해장국, 어떤 제품이야?”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태호는 곧 질문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후, 그거 내가 직접 끓인 거야. 즉석식품이 아니라.”

“뭐?”

깜짝 놀란 듯 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어쩐지 즉석식품치곤 국물 맛이 엄청 진하다 했다. 그런데 어쩌나?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직접 해장국을 끓일 재주는 없었다.

“괜찮으니까, 토마토나 갈아줄래? 괜히 멀쩡한 주방 폭파하지 말고.”

“뭐?”

그의 말이 사실이긴 하나, 그래도 막상 정곡을 찌르니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흥? 내가 못 할 것 같아? 하기 싫어서 안 했다 뿐이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더 잘할 자신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속 아프다고 울상 짓는 사람에게 토마토 주스 달랑 던져주고 출근할 생각은 없었다. 나, 주리아, 나름 마음이 따뜻한 여자라고!

“걱정하지 마. 내가 해장국 끓여줄게.”

리아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곤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처음엔 리아가 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던 태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직접 해장국을 끓이겠다고? 사태를 파악한 태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갑자기 왜 저러지? 태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뜩이나 속 쓰려서 미칠 것 같은데, 리아가 해준 음식을 먹어야 하나?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야 하지? 상상만으로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

“이사님,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겁니까?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창백한 얼굴로 들어서는 태호에게 남 비서가 빠르게 다가왔다. 제시간에 출근하긴 했지만, 태호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안 좋아 보였다.

“괜찮아. 숙취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숙취 때문이 아니라면……?”

“하아, 그럴 일이 있어.”

남 비서의 질문에 태호는 자세한 설명을 피한 채 고개만 내저었다. 리아가 내민 정체불명의 해장국을 억지로 먹어 치우느라 숙취고 뭐고 다 사라졌다고 하면 남 비서는 뭐라고 할까? 태호는 힘없이 의자에 앉으며 아침에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그냥 출근해도 된다고, 토마토 주스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리아는 기어코 직접 해장국을 끓였다. 그녀가 국그릇을 내려놓자,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딴에는 콩나물국이라고 끓이긴 끓였는데, 콩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자, 식기 전에 먹어.”

“어, 그래.”

태호는 단념한 얼굴로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마음 같아선 손도 대기 싫었지만, 리아가 하도 진지한 얼굴로 권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흠.”

한입 먹는 순간, 역시나 콩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끓는 도중에 뚜껑을 연 게 분명했다. 그리고 멸치로 육수를 내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너무 오래 끓여서 떫다 못해 쓴맛이 느껴졌다. 자신 없으면 그냥 멸치 다시다 써도 되는데…….

“맛 어때?”

끓이면서 맛도 확인하지 않았는지, 리아는 정말로 궁금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태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최대한 장점을 찾아내려 머리를 굴렸다.

“간 딱 맞네.”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비리고 떫고 이상야릇한 맛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간은 딱 맞았다.

“그런데 넌 안 먹어?”

태호는 억지로 국을 떠먹으며 맞은편에 앉는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는 토스트와 샐러드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난 술도 안 마셨는데 웬 해장국?”

잘게 썬 토마토를 포크로 콕 찍어 맛있게 오물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하, 토마토 주스나 만들어달라니까. 만약에 그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면 100% 성공이다.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콩나물국을 싱크대에 다 쏟아버리고 찬물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비리고 떫은맛의 콩나물국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를 위해 요리한 두 번째 음식이었다. 적어도 사약이 아닌 게 어딘가! 그리고 어찌 되었든 간은 정확하게 맞추었으니까. 아침 일을 회상하던 태호의 입가에 어느덧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사님.”

그때 남 비서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오늘 밤, LS그룹 창립 파티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저 그런데…… 말입니다.”

남 비서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태호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

“파티요?”

리아는 회사로 찾아온 태희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떡해!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그렇게 말했던 걸까? 오늘 리아는 해장국을 끓인다고 난리 친 덕분에 하마터면 늦게 출근할 뻔했다. 서둘러 현관문을 나서는데 태호가 오후에 태희가 회사로 찾아갈 테니, 함께 오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리아는 급히 나서느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가씨, 나 준비 하나도 안 했는데 어쩌죠?”

그러자 태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준비할 게 뭐 있나요? 그레이스가 다 알아서 해줄 텐데.”

얼마 후, 리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태희의 손에 이끌려 간 KJ 호텔 스위트룸에는 그레이스와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동안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문가의 손질을 거친 후, 이번에는 호텔 꼭대기 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레이스는 복도 끝에 놓인 은행 금고 같은 육중한 방범 문 앞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레이스를 따라 안에 들어선 리아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에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온통 검은색과 은색으로 꾸며진 벽에는 한국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주로 유럽이나 아랍 왕실의 보석 디자인을 맡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 진열돼 있었다. 민 여사가 워낙 보석을 좋아해 함께 유명한 보석회사 매장을 여러 군데 다녀보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여기 있는 작품은 일반인에겐 판매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명단에 있는 고객님께만 소개되죠.”

이곳이 처음인 리아를 위해 그레이스가 짧게 설명했다.

“시간 없으니까, 그때 내가 고른 거 보여주세요.”

태희의 말에 그레이스는 진열장에서 꽤 묵직해 보이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꺼냈다. 태희는 건네받은 팔찌를 리아의 손목에 채웠다.

“새언니는 목선이 예쁘니까, 목걸이로 가리면 안 돼요. 대신 팔찌를 화려한 걸로 해야지.”

그 말에 리아는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혔는지 손목에 무게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이아몬드 하나에 적어도 1캐럿은 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다이아몬드가 도대체 몇 개나 박힌 거야? 수백 개는 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라면 단순한 억이 아니라, 억에서 공 하나는 더 붙을 것이다. 화려한 보석을 좋아하는 민 여사라도 그녀만의 규칙이 있었다. 아무리 비싸도 아파트 가격보다 비싼 보석은 하지 말자. 자신뿐만 아니라, 딸인 리아에게도 항상 말하곤 했다.

―우리가 왕족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사치할 필욘 없잖니.

민 여사와 달리 보석에 그리 관심 없던 리아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목에 민 여사의 규칙에 어긋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가씨, 이거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

“아뇨. 전혀요.”

“그래도…….”

리아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태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강수미, 이거 저번 시상식 때 하고 나왔었어요. 하지만 잠시 빌린 거죠. 시상식 끝나자마자 도로 반납해야 하고.”

그래서 뭐? 내가 무슨 한류스타도 아니고…….

“참, 그리고 새언니, 오늘 강수미 파티에 참석한대요.”

“네?”

팔찌를 풀려던 리아는 그 한마디에 움찔 동작을 멈췄다. 절대로 경쟁심에 그러는 건 아니지만, 강수미가 온다는데 왠지 조금은 화려하게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거 엄마가 새언니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결혼식 급하게 하느라, 제대로 패물 준비 못 했다고 지금부터 하나하나씩 장만해주신대요.”

“어머님이요?”

부담은 됐지만, 정 여사의 뜻을 거릴 순 없었다. 5년 후, 태호와 이혼하게 되면 그때 돌려드리면 되겠지. 이런 보석은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오르니까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결국 리아는 팔찌를 착용한 채,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파티 장소로 향했다.

“이런, 오빠가 급한 회의가 생겼다고 좀 늦을 거라네요.”

파티 장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태희가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리아는 얼른 그녀의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문자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은근히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둘이 함께 있는 것을 아니까, 한 사람에게만 보냈겠지, 하며 상한 마음을 달랬다.

“참, 새언니. 이따 파티에서 ‘빙썅’ 조심해야 해요.”

휴대폰을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태희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빙썅이라면 빙그레 썅 어쩌고저쩌고, 그거 말이에요?”

리아가 조심스럽게 확인하자, 태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맞아요. 살살 웃으면서 욕인지 칭찬인지 사람 헷갈리게 하는 여자들 많거든요. 특히 새언니는 LS그룹 창립 파티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거라서,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예요.”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나 초대받을 수 없는 그들만의 파티라 이건가? 사실 그녀의 부모인 주 회장과 민 여사는 아직 한 번도 초대받지 못하긴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기 싸움과 영역 싸움이 펼쳐질 거라는 말이에요?”

“와, 새언니 역시 빠르다. 맞아요. 일종의 텃세죠.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오빠 올 때까지, 내가 쭉 새언니 곁에 붙어 있을게요.”

……는 개뿔. 파티 장소에 도착하고 또래 친구들이 부르자, 태희는 리아를 본체만체하고 쌩, 친구들 쪽으로 달려갔다. 하, 시월드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리아는 외롭게 샴페인 잔을 홀짝거렸다. 리아를 빼곤 모두 이미 아는 사이인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중 그 누구도 먼저 리아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태희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샴페인 잔을 다 비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파티에서 혼자 멀뚱히 서 있는 건 그녀의 취미가 아니었다. 리아는 두 번째 샴페인 잔을 홀짝거리며 말을 건넬 만한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는 서둘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견고하고도 투명한 막이 사방에 놓인 느낌이랄까?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리아는 아무 생각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목소리 주인공을 확인한 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바로 강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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